"입국 뒤 반정부 활동 시작해도 난민 인정"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한 뒤에 자국 정권에 대한 반정부 활동을 시작한 경우라도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버마 민주화 운동 단체 '버마 행동' 회원 아웅묘우 씨 등 8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해달라며 법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을 깨고 난민 신청을 받아줘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들이 경제적 목적으로 입국해 난민 신청 때까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뒤 4년 동안 적극적인 반정부 활동을 했다며, 발언 수위가 높고 오랜 기간 활동이 지속돼 진정성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들이 불법 체류자로 본국에 송환되면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웅묘우 씨 등은 지난 1994년 이후 각각 산업연수생 등으로 입국한 뒤 2004년 버마 행동을 결성해 버마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도원 [dohwon@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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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09:48 2010/11/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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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내서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여러분~

추카해주세요~

어제 고등법원이 법무부한테 저와 버마민주화 활동가7명에게 난민인정불허를 취소하고 난민인정하라고 판결냈습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좋은소식도 있다니 참 다행이 입니다.

여러분들도 힘내세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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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4:44 2010/11/0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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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2003년 8월

정부의 고용허가제도가 국회를 통과했다.

제도 실행을 앞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강제 추방 하겠다는 뉴스가 신문에서도 나오고

심지어 라디오 에서도 경고음과 함께 방송했다.

길거리 가로등에 미등록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관련 현수막도 거기 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90년도 초에 산업연수제도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을 기술을 배우러 온 연수생이라고 불러주면서 밤 낮 갈리지 않고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 저임금을 주고 때로 그 저임금마저 받지 못 하고 욕설과 폭행에 지친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이탈을 했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증가 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고 노동력만 보니 문제가 발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미등록이 많다는 이유만 해결하려고 하고 왜 이들이 뭐 때문에 이 꼴로 당했는지에 대한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과정에 대한 관심이 없고 결과에만 집증한다면 참 위험한 사고다. 처음부터 투명하게 노동자라고 불러주고 노동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국가에 필요한 노동력을 떳떳하게 받았다면 모두에게 기쁜 일만 있을 것이다.

 

좋다. 허약한 제도로 사람을 착취했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창피한 모습을 그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도를 만들겠다면 그 동안 고생했던 이주노동자들은 이런 변함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 줄 수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그 힘들었던 외환위기 때 함께 극복해 줬고

그 기뻤던 월드컵 때 함께 응원을 해 줬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줬던 진정한 친구들인데. 무슨 죄가 있나?

 

나는 우리는 죄가 없다는 것을 생각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이에 대해 행동을 보여주고자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나처럼 행동으로 보여주자 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농성장에 참여하는 것 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11월 15일 저녁에 농성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사장님에게 지금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농성하겠다고 말했다.

돈을 벌고 싶든 꿈을 꾸고 싶든 이루어지고 싶은 것이 있는 사회약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바른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다고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됐다고 얘기 했지만

사모님이 나에게 이런 사회운동을 해서 나중에 너에게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사회운동 하는 것이 개인을 위해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이 세상에 늘 있는 아픈 것들을 함께 고치고 올바른 길을 안전하게 든든하게 함께 갈 수 있도록 바르게 노력하는 행동이자 또 하나의 나눔이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과 사모님은 나의 말을 이해 못 했다.

그들의 생각은 본인들의 일을 평생 해 주기 위해 내 어머니가 나를 낳아 줬다는 것뿐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 두기를 결정 했고 내가 8년 동안 일했던 것에 대한 받아야할 권리에 대해 사장님에게 물어보자 사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너는 불법체류자인데 왜 내가 퇴직금을 줘야 되냐?

 

나는 이런 말을 듣자 너무나도 놀랬다.

내가 불법체류자라서 사장님에게 못 해 준적도 없고

그 어느 불법체류자도 일하러 오지 않은 지옥 같은 이 공장이 천상으로 올라 갈 수 있게 함께 노력해 줬고

중고 소나타2를 타는 사장이 새차 소나타3을 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일해 줬던 것뿐인데.

 

나는 사장님의 배신 때문에 서운하고 화도 많이 났다.

그래서 회사에서 나오는 날에 편지를 써서 경리에게 주고 나왔다.

 

그편지에는 나는 사장님이 그 동안 나에게 한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일을 해 왔지만 결국 사장님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에게고 배신하고 한국인의 이미지까지 망쳤다. 나에게 사장님과 사모님이 늘 하는 말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같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잘 표현 못 하지만 마지막에 떠날 때는 엄청 잘 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고 하는 우리 사장부부는 정이 많은 약속을 잘 지키는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나는 8년 동안 일을 열심히 일 했던 것. 함께 있었던 것에 정말 후회 했다고 편지에 썼다. 나는 내가 가는 마지막 시간에 만약 이렇게 배신하지 않고 2, 3달 워치 월급만 줘도 퇴직금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살 어린 시절 때부터 함께 있었던 것에 하나도 감사하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장님에게는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나의 권리를 당당하게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서 내겠다고 편지에 썼었다.

며칠 후 노동부에서 나와 사장님을 노동부로 오라고 했다.

나는 나를 배신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부천 노동부로 갔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노동부로 안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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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10:02 2010/10/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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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나에게 김포 지역 다문화 강의를 맡아 달라고 김포이주여성 센터 소장님께서 연락이 왔다.

 

김포...

95년도. 내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8년 동안 일했던 곳이다.

그때는 김포읍 이였었는데 이젠 김포시로 변했다.

내가 일했던 곳도 그때 작은 마을 같았는데 이젠 높은 건물들로 꽉 찬 동이 됐다.

마을버스밖에 안 다녔던 그 곳에 이젠 커다란 버스들이 정신없이 다니고 있고

좁았던 도로도 이젠 지하 지상 도로로 서로 눈치 보필 없이 바꿨다.

95년도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내가 일했던 언덕에 있는 작은 회사도 이제 어떻게 됐을까. 너무 궁금해서 김포 첫 강의 끝난 후 거기로 찾아 가봤다.

 

오랫동안 살았던 곳인지

내가 지냈던 도로,

내 친구들이 일했던 공장,

외국인들하고 같이 목요하기 싫다는 한국인들의 항의 때문에 우리를 거부했던 사우나,

회식 할 때 늘 갔던 고기 집 등등

하나하나의 앞에서 서서히 지나 갈 때마다 왠지 애인과 첫 만남을 하러 갈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은 슈퍼도 큰 슈퍼로 변했고 늙은 아주머니도 늙은 할머니가 되셨다.

내가 일했던 공장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심박 수가 더욱더 빨라진다.

참 신기하다.

15년 전 김포에 처음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 2명의 아주머니가 김포에 있는 내가 일할 곳으로 승용차로 데려다 줬다.

높은 건물. 재밌을 것 같은 곳이 많은 서울을 떠나 논밭 밖에 없는 김포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19살 어린나이에 시골 같은 곳보다 볼게 많은 서울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나는 서울에 꼬박꼬박 올라가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 공장에 놀러 갈거나, 동대문시장이나 광화문교보서점 등에 구경하러 갔었다. 아마 한국 드라마 에서 본 대도시에 거주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게 된 어린 결혼 이주여성들도 나와 같은 기분일 것 같아. 누가 재미없는 곳에 살고 싶겠나.

드디어 도착.

내가 8년 동안 일했던 일터, 먹고 잤던 집이 있는 공장.

이젠 이미 이사 가버려서 공장은 완전 폐쇄 상태다.

나는 한참동안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공장 내 내가 일했던 자리. 내가 생활했던 낡은 집. 출입국단속반에 잡혀간 내 소중한 친구들이 열심히 일했던 자리. 하루에 15시간 이상 우리와 함께 수고했었던 낡은 기계. 이젠 쓸모없어서 버리고 갔네.

우리공장. 종이 상자를 만든 작은 공장.

이곳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도 일하러 오지 않았던 곳 이였다.

사장님의 동생도 며칠 일하다가 그만뒀고 일이 아주 힘들다는 선박에서 일했던 내 친구도 일주일 일하다가 말없이 도망갔던 이 곳. 그는 나한테도 왜 그 지옥 같은 공장에서 계속 있냐고 했었다. 그의 질문에 내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첫째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쁘지 않아서. 둘째 월급 제때 줘서. 셋째 힘들어서 포기한다면 더 이상 해 낼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넷째 내 역사에 포기했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원치 않아서...

 

하지만 거기서 계속 일하게 된 이유 중 큰 이유하나는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 할 곳은 그런 곳 밖에 없다는 것. 또한 그런 곳들의 필요성 때문에 우리들이 한국에 들어 와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이주노동자들도 아무도 오랫동안 일을 해주지 않아서 나는 아주 일 잘하는 내 친구3명을 회사에 소개 해줬고 나와 내 친구들의 노력함으로 작은 공장이 큰 공장으로 변했다.

 

6년 후 나도 주임이 됐다. 나보다 3년 늦게 회사에 들어온 내가 일을 가르쳐줬던 한국인 후배가 계장이 됐다. 내 후배이지만 그는 한국인이니까 그게 가능 할 수 있다고 마음 편히 생각 해 줬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나에게 일을 계속 배워가면서 했었고 가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 때마다 나는 참 불편했다.

 

내키 만한 입구를 가진 작은 공장에서 큰 공장이 되어 우리 사장님도 사장다운 사장이 됐다. 그는 새벽에 일이 끝나고 야식 할 때마다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전에 내가 데려온 친구들이 일이 힘들어서 그만둘 때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친구들이 가도 나는 오랫동안 여기서 있어라. 내가 버마갈 때 뭘 해주겠다고 진지한 모습으로 약속 했다. 나는 그 뭘 해주겠다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약속 때문에 거기서 8년 동안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에게 정도 들고 나에게 형제 같이 잘 해 준 한국 분들, 나 때문에 참고 일하고 있는 내 친구들 때문이다.

 

내가 일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우리공장에 방문한 몇 몇 사장님들은 나에게 다가와 30만원 더 줄 테니 우리 회사 와서 일 해주겠냐고 물어 볼 때마다 나는 거부했었다. 왜냐면 돈 때문에 정을 끊고 좋은 친구들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은 약속을 안 지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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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1:55 2010/10/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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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요즘 나는 정말 바쁘다. 학교와 여러 단체들에 이주관련 강연과 공연, 그리고 MWTV 활동으로 정말 몸이 두 개, 세 개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 말 회사를 그만 두고 나니 사장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참 행복하다. 15년 동안 평일활동이 있는 날이면 사장이나 상사한테 거짓말로 이유를 대고 나오곤 했다. 정말 싫은 일이다. 또한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주5일 근무제라면서 토요일마다 일을 시키는 부장한테 활동이나 공연 때문에 토요일에 일을 못한다고 매번 얘기하는 것에도 지쳤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을 할 줄 아는 직원이 없어 토요일에 작업할 일을 전날에 미리 해놓으려고 2배 속도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젠 돈은 회사일 할 때처럼 못 벌지만 왠지 맘이 편하고 참 좋다.

한국인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시기에 돈 안 되는 활동을 한다며 나오는 것은 이주노동자인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이었다. 200만원이 체 되지 않는 월급이 한국 사람에게는 작을지 몰라도 이주노동자인 나에게는 정말 큰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5년 동안 일과 활동을 병행 하면서 너무도 답답했기에 자유롭게 활동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집회에도 나가고, 아무 때나 공연도 하고 싶었다. 부족한 공부도 해서 보다 나은 활동도 하고 싶었다. 특히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 내일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결국 사장은 나에게

“회사를 선택 할래? 활동을 선택 할래?”
라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활동가로서 계속 살아 갈 것입니다”
라고 답 할 수 있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본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소중히 하는 활동가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고 나부터 그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쓰는 ‘그리 당첨되기 어렵다는 로또도 매주 한 명 정도는 나오는데, 이주민활동가는 1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합니다.’는 말이 과도한 것 같지 않다. 가진 것 없는 이주민이 오래 동안 살아가기 어려운 한국에서 활동을 하겠다는 이주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혹 마음이 있더라도 활동가를 적으로 보는 이런 상황에 오랫동안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어느 날 법무부 관계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조직해서 사회를 흔들고 있는 너 같은 사람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 주겠냐? 난민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가도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내가
“저도 버마에 민주화를 위해서만 활동을 집중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들께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이주민들이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사회, 한국말을 알아 들지 못 해서나 다른 이유로 발생한 사업장 폭행. 욕설이 없는 사회, 다른 피부색, 다른 문화와 가난이 죄가 되어 무시당하는 것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주실래요? 책임 맡아 주실래요?”
라고 말하자 그는 그냥 웃으면서 나를 보고만 있었다.

‘차별하지 말라고, 평등하게 함께 살자고, 사회의 약자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나와 이주민 활동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께 사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 보다 더 이루어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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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00:33 2010/10/1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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