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원… 공무원… 문화운동가로… 새길을 낸다

 

[따로 또 같이, 다문화 우리문화!]
<1부> 우리 안의 다문화 ⑵ 다문화 리더 시대
이주민의 이익 대변자로 사회 각 분야서 두각
"구색 맞추기·정권 따른 부침 탈피 다양성 기여를"

김청환기자
chk@hk.co.kr                 안산=김창훈기자 chkim@hk.co.kr  

몽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이라(33)씨는 6ㆍ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의원 비례대표로 당선돼 1호 다문화

정치인이 됐다. 2003년 9월 한국인과 결혼한 친구의 소개로 당시 여행업을 하던 사업가(50)와 결혼해 입국한 이씨는 2008년 10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받았던 고난을 다른 결혼이주여성에게는 안겨 주지 않으려고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결혼이민자 네트워크 부회장과 경기 성남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2008년 5월 세계인의날에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이런 그의 이력을 높이 사 비례대표후보 1번으로 공천했고,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다문화인들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킬 정치인을 배출할 만큼 외연을 넓히고 있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국민참여당도 충북도의원 비례대표후보 1번으로 몽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체체그수렌(37)씨를 내세웠다. 1988년 입국해 200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청주YMCA 등에서 다문화인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다문화 강사를 맡고 있다.

두 사람에게서 보듯 다문화인에 대한 관심은 주로 결혼이주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100만여 다문화인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다. 이주노동자를 대변하는 다문화 리더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95년 정치적 자유를 위해 버마를 떠나 한국에 들어온 소모뚜(35)씨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다국어 방송인 MWTV(이주노동자의방송) 대표로 10개 국어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도록 하는 일에 열심이다. 그는 이제 다문화인뿐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유명 인사가 됐다.

시민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경우도 있다. 35년째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옥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2)씨는 한옥 지킴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지난해 6월 동소문6가 주민 20여명 명의로 시를 상대로 재개발 정비구역 지정 처분 등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공무원 사회도 다문화인들의 활약은 예외가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중앙공무원교육원 행정자치부 교육담당 계약직 나급인 더글라스 빈즈(미국)씨 등 5명이 국가직 공무원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안토니 우디위스(영국)씨 등 123명이 교육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남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계약직 가급인 호셀라몬 로살(미국)씨를 비롯한 35명은 지방직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다문화 리더의 증가에는 함정이 있다. 특히 정치 분야의 경우 여야가 구색 맞추기용으로 징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효용성이 떨어지면 바로
폐기 처분된다. 또 정치 권력이 변하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많다.

미국이나 영국의 소수민족 공동체도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진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회는 자유방임과 경쟁의 원리가 기본이어서 인위적 지분 배정은 드물다. 다문화 리더의
성공 비결은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똑같은 조건, 아니 더 열악한 조건에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결과인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리더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김창준(53) 전 미 연방 하원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연세대 법학과 3학년 때인 1961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그는 지방신문 독자부 직원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주경야독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사업에 성공한 김씨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이어 미국 정치의 꽃인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현재 그는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시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미와 달리 주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소수자로서 다문화 그룹에 대한 지분을 배정해 리더를 키운다. 하지만 이들도 그 많은 다문화인 사이에서 확실하게 경쟁력이 검증된 사람만 선택하기 때문에 한국의 부속품형 리더와는 다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리더라면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해 새로운 이주민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국제적 관점에서 자기 분야의 경쟁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문화인이 늘고 있지만 아직 귀화자는 7만여명에 불과해 소수자의 이익 대표성을 반영한다는 식의 다문화 리더론은 합리성이 떨어진다"며 "냉정하게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다문화 리더들이 나와야 소수자에게도 희망을 주고 문화 다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산 거주 필리핀인들의 우상 "적응 힘들겠지만 희망 잃지 않길"


필리핀 출신 귀화인 카스트로 경장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국경없는마을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외국인 밀집 지역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위해 삶을 공유하는 이 마을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이가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리핀 출신 귀화인 아나벨 카스트로(42ㆍ여ㆍ사진) 경장이 그 주인공.

카스트로 경장은 안산 단원경찰서 외사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문화인이 많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들과 소통하고 외국인 범죄를 사전 예방하는 게 그의 임무다. 22일 외사계에서 만난 카스트로 경장은 한글로 문서 작업을 하느라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제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처음에는 경찰관이 되고 무척 난감했습니다. 업무도 서툰 데다 너무 긴장도 됐고요."

그는 1995년 친구 소개로 지금의 남편(49)을 필리핀에서 만났다. 2년간 교제하다가 결혼한 뒤 한국으로 온 게 13년 전이다. 그는 전남 함평군에서 농사를 짓는 남편과 시부모를 모시며 2남 1녀를 낳았다. 피부색만 다를 뿐 여느 한국인 며느리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 함평경찰서에 필리핀과 관련된 사건의 통역을 도우며 경찰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카스트로 경장은 필리핀에서 8년간 고교 생물교사로 근무했다. 모국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능통해 경찰관이 되기 전까지 함평 지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능력과 부지런함을 인정한 함평경찰서는 외사 특채에 지원해 보라고 권했고, 2008년 7월 당당히 경찰관이 돼 안산시로 갔다. 시내에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1,500여명의 필리핀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 카스트로 경장은 우상으로 통한다. 하지만 법을 집행해야 할 대한민국 경찰관이기에 그들을 단순히 동포로만 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경찰 업무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직장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무엇보다 어렵다. 현재 남편은 큰 아들과 함께 함평군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아나벨 경장은 안산시에서 자녀 둘을 데리고 있다.

그는 주말이 더 바쁘다. 다문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안산시에서는 외국인 관련 행사들이 주말과 휴일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가족을 만나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고 경찰관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는 "경찰관이 돼 필리핀 사람들과 한국인들을 위해 봉사하니 정말 행복해요. 다만 우리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도 우리처럼 똑같은 감정으로 대해 주길 바래요"라고 당부했다. 국내 거주하는 다문화인에들에게는 희망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 적응이 힘들겠지만 시간은 금방 지나가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22 23:40 2010/06/22 23:40
Tag //

지난 토요일 저녁 2010남아공 월드컵에 한국팀이 그리스팀을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첫 경기에 한국팀이 이겼으니 참 기쁘고 다음 경기도 기대가 됩니다. 2002년도에도 4강까지 올라갔던 한국팀을 응원하느라 저와 이주민 친구들도 광화문광장으로 갔었고 대~한~민~국~ 라고 힘껏 함께 외쳤던 것이 기억 납니다.

 

한국-스페인 경기 때 한 이주민 친구가 스페인팀 쪽으로 돈을 걸었지만 한국팀이 스페인팀을 승부차기로 이겨서 자기는 돈은 잃었지만 한국팀이 이긴 것을 기뻐하며 함께 대~한~민~국~ 라고 외치며 광화문거리에 행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미등록 노동자였던 그 친구는 지금은 이미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하는 말은 “스페인팀이 이길 가능성이 많아서 돈을 걸었지만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한국팀 쪽에서 응원을 했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와서 한국에 정들었기 때문에 한국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돈 잃었지만 기분은 참 좋다”고 말 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 얘기를 하는 친구를 보고 저는 그의 말에 진심을 느꼈습니다. 왜냐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한국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는 1998년도에도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에 각 팀이 자기 나라 애국가를 부릅니다. 그 때 마다 저는 애국가를 진지하게 부르고 있는 선수들을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만 그들이 부르고 있는 애국가는 저에게 아무 느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눈물이 나 올 정도로, 닭살이 나고 부르고 있는 동안 애국자가 되는 느낌이 오게 하는 애국가는 오직 버마애국가 뿐 이였습니다. 또한 한국에 들어와서 “동해물과 백두산…” 으로 시작하는 한국 애국가를 처음 들었을 때도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7년이 되는 해. 2002년도 월드컵. 우리 회사에서는 한국팀 경기 때는 잠깐 기계를 멈춰 놓고 회사동료들과 함께 축구경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팀과 하는 경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경하게 됐는데 한구팀이 16강, 8강 또한 4강 까지 올라 갈 수록 저의 심장도 빠르게 떨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팀과 스페인팀 경기 때. 저와 이주민 친구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한국팀을 응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도 다 같이 빨간 티를 입고 대~한~민~국~ 외치면서 말이죠. 어려운 경기 이였지만 결국에 한국팀이 스페인팀을 이겨서 4강으로 올라갔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매우 기뻐서 경기가 끝났는데도 집에 안가고 한국인들과 함께 대한민국이라고 외쳐 하나가 되어 길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이 때 한국인들과 우리 이주민들 모두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니다. 그 동안 저에게 아무 느낌이 없었던 한국애국가를 저는 제 자신도 모르게 눈물 글썽거리면서 닭살도 나면서 아주 기쁘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버마애국가를 부를 때 느낌처럼 말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저는 내가 왜 이렇게 되냐 라고 생각을 해보니 나도 인간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답을 찾았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꿈이 태어날 수 있는 곳. 실천 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삽니다. 자기 나라 안 에서도 이동하고 또한 다른 나라로 이동해서도 삽니다.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 곳, 매일 보게 되는 사람들, 그 곳의 풍경들 등에 정이 듭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끊을 수 없는 쇠사슬 같은 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끊기 힘든 줄이 정이라는 줄”이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비록 버마에서 태어나서 버마애국가를 불려 왔지만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보니 이곳이 내 나라, 이 나라 사람들이 내 나라사람들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문제. 이 나라사람들의 아픔. 이 나라사람들의 즐거움. 그 모두가 나의 문제. 나의 아픔. 나의 즐거움으로 되어 갑니다. 왜냐면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정들 줄 알고 사랑 할 줄도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표적 단속으로 강제추방 당한 미누씨가 추방당한 이유는 한국 내 문제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 왔는데 이곳에서 문제가 생길 때 나와 상관없다고 하며 이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미누씨 같은 한국인들의 진정한 친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어난 나의 친구들의 아픔과 기쁨이 나의 아픔과 기쁨으로 변해가는 것이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는 한국애국가를 부를 때 버마애국가를 부를 때처럼 같은 느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여기가 나의 제2의 고향이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20 22:55 2010/06/20 22:55
Tag //

월급날

오늘 MWTV사무실로 출근하며 스탑크랙다운 밴드의 월급날노래를 들었다. 오랜만에 우리 밴드의 노래를 mp3로 들어본다. “오~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 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라는 가사을 들으니 또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진다. “나를 욕한 것을 참을 수 있어도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라는 노랫말에 지난 날 겪었던 일이 영화라도 보는 듯 떠올랐다.

96년의 어느 달 월급날이 되자 사장이 나를 부른다.

“소모뚜야~ 이리와 월급 줄께!”

그래 갔더니 월급봉투는 없다. 사장은 천원, 5천원, 5백원.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 돈과 동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 나의 월급을 다 채우기 전에 주머니 속 돈이 없어졌다. 사장은 마치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을 하며 “어? 다 떨어졌네! 나머지 거는 나중에 줄게” 한다.

87년 이전에는 한국의 직장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더이상 아니겠지만 이주노동자에게는 아직 흔한 일이다. 욕하고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이기에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필요하고 한국의 절차대로 불러온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임금체불, 욕, 폭행은 다반사다. 일을 시키는 이들의 생각이 일하는 사람을 천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일하러 왔기에 돈을 조금만 주어도 자기 나라에 비하면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사장님들만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에 놀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미국에 가서 일하고 살면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만큼 받으라 그러면 살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던 그들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며 그 좋아하는 미국에 가라면 갈까?

2002년 유레카 밴드 멤버들과 박스공장에서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무시한다. 심지어 욕하고 때린다. 이주민이라고 다 똑 같은 이주민이 아니다. 일한 만큼 임금을 못 받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무시해도 되는 이주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이주민자들은 존경해마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주민의 국적은 뭐 말 안 해도 뻔하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 미국말하면 만사 오케이 무사통과다. 우리보다 검은 색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미국말과 한국말이 아닌 다른 말 하는 것이 문제다. 미국말은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문제고 가난한 나라 말은 네가 한국말 못하는 게 문제다. 심지어 노동운동을 하는 유명한 간부에게서도 이런 태도를 보고 마음아파 한 적이 여러 번이다. 이런 분열증 같은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문화사회를 말하고 노동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노래하고 싶다. 행복한 세상, 함께 사는 세상을. 그 때에는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임금이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국적이 다르다고 놀림 받거나 병원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즐겨먹는 음식이 다르고 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월급봉투도 받을 것이다. 피부색과 머리칼은 짬뽕이 될 것이고, 서로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말을 가르쳐 주고, 서로 가난하지 않은지 돌아보며 살 것이다. 나의 새로운 노래 ‘월급날’이 이런 노래가 될 때 우리의 코리아는 ‘밍글라바 코리아’가 될 것이다.

– 소모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10 23:11 2010/06/10 23:11
Tag //

전선인터뷰- 소모뚜 버마이주노동자활동가

“Stop Crackdown! 끝나지 않는 나의 노래”

버마의 어느 작은 마을, 부챗살로 퍼지던 햇살이 몸을 접는 시간이면 기타를 멘 청년들이 하나둘 거리로 흘러나온다. 저마다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딩딩 기타를 매만진다. 가슴에 고이 접어두었던 오선지가 서서히 펴지고 감미로운 선율이 날개 달고 훨훨 허공으로 떼 지어 난다. 부르고 또 부르고, 여기서 한 소절 저기서 한 소절. 섬처럼 떨어져 노래하던 청년들은 어느새 따로 또 같이 화음을 맞춘다. 어스름 밤공기 타고 골목골목 휘돌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청량한 바람 되어 동네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 소모뚜, 노래하다

“버마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기타를 다룰 줄 알고 노래도 잘해요. 밤새 기타를 쳐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얼굴 붉히거나 신고하지 않아요. 거리를 지나는 행상은 노래를 불러줘서 덕분에 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노래 한 곡씩 듣고 가요. 매일 그 자리에서 노래하던 청년이 안 보이면 동네 사람들은 어디 아픈지 안부를 묻고요.”

날마다 새벽 2시까지 하얗게 밤을 지우던 그. 노래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손끝 부르트고 목청 터지도록 노래하던 청년 소모뚜. 그는 스무 살에 정든 고향을 등졌다.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TV가 필요하면 전자제품 가게에 가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가는 것처럼” 꿈을 찾는 그에게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돈 벌어 효도도 하고, 민주화 투쟁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배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1995년 한국에 온 소모뚜의 첫 일터는 김포의 박스공장. 매일 14-15시간 씩 긴 노동이 반복됐다. 암담했다.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으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상이 사막이었다. 물을 찾듯 기타를 찾았다. 주말이면 공장은 연습실로 변신했다. 버마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좋은 친구, 좋은 음악으로 피로를 풀고 다음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소모뚜의 노래는 공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어느 성탄절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서 노래 불러주는 잔치에 참가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도 아이들도 행복했다. 곁에 있던 아시아인권연대 이란주 대표가 제안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면 어떨까?’ 흔쾌히 응했다. 소모뚜는 곧장 네팔, 버마,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친구들과 유레카라는 밴드를 꾸렸다. 1999년 9월 추석에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2003년에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아주 심해졌죠. 쫓겨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강제추방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친구들이 자살을 했어요. 충격적이었죠. 저희는 IMF 때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이랑 라면 먹으면서 일했고 월드컵에 같이 빨간 티를 입고 응원했어요. 한국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법을 만드는 건가요?”

소모뚜는 답을 찾아 떠났다. 8년 동안 묵묵히 일하던 박스공장 대신 미등록이주노동자 추방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출근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모두가 재밌게 외칠 수 있도록 구호를 노래로 만들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우리가 원하는 건’의 가사 ‘스탑크랙다운(Stop Crackdownㆍ강제추방 중단!)’은 팬들의 요청에 의해 아예 밴드이름으로 지정됐다. 뮤지션 소모뚜는 전국 방방곡곡 공연을 다녔고, 자연스레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참한 노동환경과 노동 권리에 대해 눈 떠 갔다.

# 소모뚜, 절망하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 아주 영세한 곳에서 일해요. 그런 사업장의 관리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어요. 저희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피부색이 시커멓다고 인간취급을 못 받아요. 심지어 너희 나라에도 해와 달이 있느냐 묻는 사람도 있어요.”

천태만상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냉대는 노골적이고 극심하다.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실무교육도 안전교육도 없다. 혹여 이주노동자가 일을 더 잘 할까봐 기계사용설명서를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부상위험이 따르는 일을 맡아도 누구 하나 ‘조심하라’ 귀띔해주는 이 없다. 우주베키스탄의 한 노동자는 사료기계에 손이 절단됐다. 그런데도 치료비를 못 받았다. 이에 항의하면 담당자는 당연하단 듯 내뱉는다. “농업은 한국사람도 산재 처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안 돼!)”

“농업 인력으로 온 이주노동자가 다른 일을 하면 바로 불법이 돼요. 그런데 농촌은 겨울에 두 세 달이나 일자리 없잖아요. 실업급여를 안 줘요. 그 기간에 다른 일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어업은 3년 내내 배에서 일해요. 한국어를 배울 조건이 안 되니까 부당한 일을 겪고도 모르죠. 역시 다른 일터로 옮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월급도 제 때 못 받잖아요. 그런데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문제 해결은 안 하고 법무부에 신고부터 해버려요.”

법이 아니라 덫이다. 소모뚜는 절망했다. 이주노동자는 곧 불법체류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20만 명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은 뿌리 깊다. 정부당국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보다 불도저의 효율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도 예외 없다. 그런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소모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강한 사람이 약자 편에서 생각한 적이 없잖아요. 고용허가제도도 이주민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짜낼까 이용할 생각만 해요. 국익과 노동자의 권리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하잖아요. 현대판 노예허가제가 된 거죠.”

소모뚜와 함께 MWTV에서 활동하는 아웅틴툰은 “버마는 소도 쉬는 날이 있다.”고 한탄했다. 버마에서는 기후조건상 3모작을 할 수 있는데 1모작만 한다. 그래도 가족이 넉넉히 먹고 사니까 고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소 1마리로 충분한 일도 2마리 시켜서 쉬엄쉬엄 일 한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엔 사람도 소도 같이 쉰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처음에 한국인들이 불철주야 일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 묻지만, 저는 그렇게 일만하고 어떻게 사느냐 물어보았죠.”

# 소모뚜, 행동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선 농성은 2003년 11월 15일부터 2004년 11월 26일까지 농성은 385일 간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소모뚜는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거듭났다.  일자리를 다시 구해 월~토요일까지 소화기 압력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스탑크랙다운의 기타리스트로 버마행동의 총무로 다문화활동가로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2005년부터는 이주노동자방송 MWTV 제작에도 참여했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댈’ 친구도 여럿 만났다. 이주노동자 밴드 ‘유레카’ 시절부터 함께한 음악적 동지 미누(미노드 목탄)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미누가, 강제추방 당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던 그 미누가, 지난해 18년 간 살아온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누의 구속이 연일 매스컴을 탔고 소모뚜의 이름도 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장은 소모뚜에게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까 두렵다며 조용히 나가줄 것’을 당부했다. 하루아침에 친구도 잃고 일터도 잃은 소모뚜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졌다.

“미누형 사건 때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기본적인 것이 보장 안 된 사회에서 내 목터져라 노래 불러도 소용이 없는 일인가. 그 전에도 미누형과 밴드 때려 치자는 얘길 했었죠. 우릴 적으로 보는 이 사회에 기여할 게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적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상황이 안 좋다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면 내 스스로 창피하고 죄를 짓는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얘기에 공감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 있으니까 희망을 가져야죠. 제가 아주 초기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왔기에 후배들이 우리처럼 힘들고 헤매지 않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책임감이 있어요.”

소모뚜는 ‘해고’를 계기로 MWTV에 대표를 맡았다. “안 그래도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메라 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그며 활짝 웃는 ‘다문화가족’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 온정과 연민 혹은 무시와 혐오, 교육과 상담의 대상이 아닌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신음하는 노동자, 내면적 풍요를 꿈꾸는 존엄한 인간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려준다.

이밖에도 참다운 소통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쓴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자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다.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진행을 맡고, 위클리수유너머에 ‘밍글라바코리아’를 매주 연재한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주노동자 단체의 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강행군을 소화하는 그에게 ‘버마행동 한국(Burma Action Korea)’ 활동은 각별하다. ‘버마행동’은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 받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조속한 민주화를 위해 노동하며 투쟁하는 버마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종각역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국제민주연대, 버마민주화를지지하는모임, 인권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와 기자회견을 연다.

“지난 4월 말에는 버마군부의 비민주적 선거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한국이 독재정권에 탄압받았을 때 해외의 많은 단체들이 힘을 쓴 것처럼 버마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하루 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한국도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또 한국의 버마 노동자들에게 조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버마행동의 중요한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서 한국어 교육, 산업안전교육, 인권교육이 있을 때 버마의 내부 상황 사진전을 여는 등 간접적으로 알리죠.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후원금을 내겠다는 분들도 있고 관심을 많이 가져줍니다.”

# 소모뚜, 함께가다

소모뚜는 현재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처음엔 한국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라 힘들었어요. 힘 있는 사람들이 탄압할 때 NGO나 조직 활동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라도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약한 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정글에서 호랑이가 작은 동물 다 잡아먹는 것처럼 그런 사회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버마는 마을이에요. 아들 없는 집에서는 다른 집 남자들이 나서서 도와줘요. 코코넛 나무 높은 곳의 열매를 따주고 물탱크를 청소하죠. 무거운 짐 같이 들고요. 정치는 개판인데 (웃음) 국민들은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아요. 나눔의 기쁨이 행복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았어요.”

버마는 불교국가다. 마을에 학교는 없어도 절은 있다. 불경을 일상에서 새소리처럼 듣고 자란다. 버마 사람들은 관계와 전체 속에서 사고하는 동양적 가치관이 몸에 배었다. 결초보은, 역지사지.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며, 남에게 밥 한 수저만 얻어먹어도 은인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지난 15년간 한국 밥을 먹고 산 소모뚜는 “한국에 갚을 게 많다”고 여긴다.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정 그리고 책임감.

“길거리에 돌이나 유리가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치워야 하잖아요. 저희한테 한국을 비판한다고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암 환자에게 증상과 치료법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사회에 아픈 일들과 치료법 알려주고 같이 고쳐가자는 거죠. 한 사회의 소수자가 본인 얘기 하려고 나왔을 때 부정적으로 보면 안 돼요. 나쁜 얘기 안 하고 덮어두면 더 좋은 건가요? 한국의 한계 드러내주는 것이 더 나아지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 인권교육을 하러 갔을 때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이주민이 요구하는 인권이 무엇이냐”고. 때로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되는 법. 소모뚜는 되물었다. “이주민 인권과 한국인 인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이주민인권이 궁금하면 인권이 뭔지를 배우면 돼요. 내가 맞는 거 싫으면 다른 사람도 싫어하고 월급 받고 싶으면 이주민도 받고 싶은 거죠. 나의 입장에 맞추어 생각하면 그게 인권이에요.”

인권이 무언지 알 필요가 없던 나라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인권교육 한다는 게 무척 힘들다며 소모뚜는 멋쩍게 웃었다.

인생의 절반, 그것도 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시대를 보낸 “한국을 사랑한다”는 소모뚜.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초상은 암울하고 쓸쓸하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는 황금율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 GDP는 높아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관계적 부가 사라져 가는 나라. 일터의 빈자리를 채워줄 동료시민을 구해 와야 하는데 노예를 얻으려 하는 나라. 87년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는 내몰았지만 사는 게 여전히 팍팍한 나라. 이름만 민주주의 하고 딴 짓 하는 나라…….

“언제든 제가 버마에 돌아갈 때 한국의 민주화를 교본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한국에서의 경험한 일들이 버마의 미래에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하지 말아야할 것. 따라할 것이 보이니까요. 또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 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라면 한국도 그것이 싫지 않을 거예요.”

여행자 소모뚜. 그는 여기 아닌 저기의 생을 꿈꾸며 길 떠났다. “열심히 일했고 충분히 인정받았고 더불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자가 되는 순간 기후에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에 더 영감을 받듯이 그는 이 땅에 자욱한 차별의식과 모순투성이 제도에 반응했다. 높은 벽에 부딪히고 모난 돌에 쓰러진 친구들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다. 벽에 문을 내고 돌멩이를 입김으로 녹일 때까지, “Stop! Crackdown!” 소모뚜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은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10 23:08 2010/06/10 23:08
Tag //

아름다운 고통

얼마 전에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해서 남자들처럼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중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을 들을 때 마다 왠지 슬픕니다.
가족을 위한 노력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까지 취급되어 강의까지 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는 저에게는 슬픔만 남았습니다.

 

강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듣고 있는 여성들과 죄인이 되는 기분으로 어두운 표현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남성분들을 보면서 이주민 입장에서 보는 저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자하는 말은 남녀 간에 평등, 가부장제, 페미니즘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가 더 고통 받고 누가 더 편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내용들은 워낙 민감한 이야기들이라서 저는 그저 이런 것에 대해 저 같은 이주민들의 생각을 전하고 싶은 뿐입니다.

 

한국인들 포함해 전 세계에 이주하면서 살고 있는 분들 중 대부분이 자기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남자, 여자 모두가 다른 나라로 들어가서 고된 일,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일, 작은 공간에 반복된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이 뭔지 몰라도 매일 매일 그런 고통을 기쁘게 받아주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형제들의 미래를 위해 오빠로서, 언니로서 ,또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등 1인 다역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그래서 내 자신이 힘들어도 그 아름다운 고통을 내가 먼저 받겠다는 것이 이주민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가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자로서 가는 날. 공항에서 서로를 미안하고 서로를 위해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을 흐리면서 약속을 하는 그 마음. 자신이 그토록 다니고 싶고 꿈꿔왔던 대학을 포기하고 동생들 학비를 위해 해외 나가서 일하겠다는 오빠를 보면서 미안해하는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오빠의 마음. 이런 마음은 “나보다 가족이 먼저” 라는 사랑 또는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받는 다라고 생각을 하지 않다는 거죠.

 

내가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을 가족에게 보내주고 가족이 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고 나에게 보내준 사진을 자꾸 꺼내어 보면서 기뻐하는 마음이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민에게는 아주 효과 만점 보약입니다.

버마독립영운 아웅산장군 가족, 오른쪽부터 아웅산 장근,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맨앞에는 아웅산수지여사)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온 국민이 가족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에 기뻐하셨던 아웅산장군과 아웅산수지여사의 사랑과 책임을 존경함으로서 이사진을 배치합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있는 벼를 먹으러 오는 앵무새들을 잡으러 농장으로 나왔습니다. 농장에 있는 벼들을 맘껏 먹고 있는 수많은 앵무새들 중 아주 크고 통통한 한 앵무새는 맘껏 먹고 난후에도 많은 벼들을 또 가져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농부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통통한 앵무새를 잡으러 결심했습니다. 농부는 손에 집힌 앵무새에게 “너는 다른 새들처럼 배부르게 먹었으면 됐지 왜 또 가져가려고 하냐?” 라고 물어보자 앵무새가 “저는 새로운 빚과 헌 빚을 갚아야 해서 그랬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농부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앵무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헌 빚이란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갚아야하는 빚을 말하고 새로운 빚은 내가 낳는 자식들에게 해야 할 임무를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먹고난후에도 그들을 위해 벼들을 또 가져가는 겁니다.”라고 답하자 농부는 부모님의 은혜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통통한 앵무새를 평생 자신의 농장에서 맘껏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책임들을 가지게 됩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누군가가 시켜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임 있다고 생각해서 갖게 된 것입니다. 가족과 멀리 떨러져 살고 있더라도 이를 눈물이 가득한 미소로 받아 주고 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는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 대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것에 의미, 또한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화 할 때마다 아버지가 저에게 늘 하시는 말씀은 “고맙다. 네가 나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서 정말 고맙다.” 라는 것과 “오빠는 우리에게는 제2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제 삶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책임을 알고 가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 소모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10 23:05 2010/06/10 23:05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