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의 문화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버마의 문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버마에서는 얼굴 닦는 수건과 허리아래부분 닦는 수건을 구분하여 씁니다. 한국처럼 큰절은 흔히 하지 않습니다. 또한 큰절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것에서부터 상대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는 것에까지 존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은혜 베푼 사람이나 부모님, 선생님, 스님들에게 존경의 표시로 발을 닦아드리기도 합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의 꿈과 학교를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어렵고 위험하면서 더럽다고 하는 일자리에서 임금은 턱없이 낮았지만-사실 이것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래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때문에 동생들은 나를 제2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우리더러 돈 벌려고 한국에 온 것 아니냐며 핀잔하지만 가족들은 압니다. 돈 벌러 온 이유를요.

 

얼마 전 동생이 나를 만나러 한국에 왔습니다. 15년 만에 보는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영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며 난민지위를 얻었습니다. 난민인정을 받은 동생이 저를 만나러 한국에 오려 했지만 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국에 들어와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남아 있을까 염려해주시는 분 덕분이었답니다. 영국 시민권을 받고서야 한국에 온 동생은 꼭 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마를 내 발에 대어 큰 절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오랫동안 일한 오빠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 성공회성당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시청광장에 들렀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도 불어 몸에 한기가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큰 화면에 보여주는 영상은 일 년 전에 본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걱정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 또 들으면서도 1년 전 그날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렇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버마사람들이 아웅산장군을 기억하듯이 말입니다. 버마사람들이 그토록 아웅산장군을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그가 버마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고, 행동한 대로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좋지 않은 나무를 심어놓고 어찌 좋은 열매를 바라겠습니까?

 

다음 달부터 정부가 G20정상회의를 빌미로 대대적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을 벌인다고 합니다. 나의 꿈을 접고 우리의 꿈을 만들려고 낯선 땅에 일하러 온 이들의 이름이 이주노동자입니다. 이들은 일하고 싶고 희망을 갖고 싶고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일할 자유를 허락한다면,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신다면, 이들에게 생존의 권리를 누릴 기회를 주신다면 이들의 마음에 한국은 발을 닦아드리고 싶은, 발에 이마를 대고 큰절 올리고픈 곳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면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밍글라바 코리아~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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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4 2010/06/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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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이주노동자로 간 한국인들이 미국 이주 1세대를 형성했다고 들었다. 이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왜 하와이에 사탕수수밭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왜 머나먼 하와이까지 갔는지는 잘 알 것 같다. 한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먹고 살기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어라 일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웠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받은 임금이 얼마나 됐을까? 다행히 지금 한국에는 최저임금이라는 참 좋은 제도(?^^)가 있다. 덕분에 우리 이주민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면 이 최저임금을 받는다. 한국에 최저임금 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4백 5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며칠 전 최저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 노래하러 갔다. 그 집회에 참석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라고 했다. 그런데 노래하러 무대에 올라가는 저에게 한 분이 부탁의 말을 하셨다. 전에 몇 번 들어 본 내용이었다.

 

무대에 선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공장을 차릴 때 내 공장의 일자리는 돈을 많이 주는 한이 있어도 꼭 우리 국민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힘들어도, 위험해도, 오래 일 시켜도, 군말 없이 일 잘하고, 돈은 조금 받아가는 사람을 원할까요?”

 

지금 한국에는 120만 명의 이주민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두가 4백 50만 명 중 일부입니다. 이주민들을 붙들고 물어 보십시오. ‘고향과 집을 떠나 올 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왔느냐?’ ‘임금은 제대로 받고 있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100년 전 하와이에 간 한국 사람들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국적이나 피부색이나 언어를 떠나, 일하고도 먹고 살 만큼 받지 못하는 우리 서로는 마음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일 시키는 사람은 자기나라 사람이냐? 이주노동자냐? 하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만 자기가 원하는 노동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렵고 한국 노동자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오해하지 않고 뭉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최저임금을 올리고 생활임금을 받는 데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일하러 가면, 100년 전 하와이로 간 사람들이나 50년 전 독일로 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가 됩니다. 한국의 여러 상황이 나아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주민들도 우리 살던 나라의 상황이 좋다면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이주노동자가 많아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 정치상황이 좋아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서 일할 뿐 아니라 도와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한국의 5.18은 버마인들을 깨우쳐 88민주항쟁 가능케 하였습니다. 5.18에서 6월로, 오늘의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에도 지금의 한국이 될 수 있게 도운다면 얼마나 감사를 받겠습니까? 한국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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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1 2010/06/1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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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일은 세계노동절 120주년. 120년 내걸었던 '8시간 노동 쟁취'는 여전히 전 세계 많은 노동자들에게 숙제로 남겨져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여전히 법전 안에서만 존재한다. 2004년 8월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이들의 열악한 작업 조건과 저임금은 '상식'처럼 굳어졌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라며 이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한국인들이 더 이상 꿈꾸지 않는 공간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소모뚜씨(35)의 명함에는 직함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2004년 결성된 '버마행동' 총무,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작곡·기타리스트… 날래 보이는 작고 마른 몸으로 그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날라 간다. 어디 한 군데 편히 앉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소모뚜씨는 바빴다. 그와 인터뷰는 이동 중인 전철 안에서 주로 이뤄졌다.

소모뚜씨를 만난 4월29일, 그는 언론시민단체 활동가 14명이 낸 '공영방송 국민 컨설팅 보고서'의 공저자로 참여해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오후에는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 다문화 톡톡 > 의 진행을 위해 인천으로 향해야 했다. OBS 라디오 < 다문화 톡톡 > 의 김희성 PD는 "이주노동 당사자가 직접 라디오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장일호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 다문화 톡톡 > 의 진행하는소모뚜(맨 오른쪽)

이날은 인천여성의 전화 김성미경 회장이 게스트로 출연해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 '아시아 이주 여성 마을'을 소개했다. MWTV의 대표이기도 한 소모뚜씨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방송이 끝난 후, 소모뚜씨는 김성미경 회장이 일하는 곳을 방문해 둘러보고 방송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다시 서울로…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보증금 50만 원짜리 작은 단칸방은 집이 아닌 '자는 곳'이다. 그는 다음 날 스탑 크랙다운 공연을 하러 대전으로 간다고 했다. 빼곡한 스케줄을 듣고 있던 기자가 놀라워하자, 소모뚜씨가 말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주노동자)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해요. 그 사람들 생각하면 힘들 수가 없어요"

여느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소모뚜씨는 이 곳 저 곳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다. 공장 같은 '현장'에서 일하기보다,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그가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현재 소모뚜씨는 난민 신청 소송 중이다.

물론 소모뚜씨도 처음부터 '활동가'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15년, 스무 살 때이다. 버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는 정치적으로는 올곧았으나,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했다. 그러나 소모뚜씨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민주화 운동'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모뚜 '주임'에서 '활동가'가 되기까지

처음 한국에 와 들어간 곳은 박스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8년을 일했다. 그 공장은 '소모뚜 주임'이라는 직책을 붙여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심해졌다. 추방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주임으로 눈 딱 감고 일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성공회 성당 앞에 농성장을 꾸렸는데 '주임' 소모뚜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이주노동자들이 외친 구호,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ㆍ단속을 멈춰라)'은 그대로 밴드 이름이 됐다. "피부 서로 달라도/문화 서로 달라도/우리 서로 아름 다음 동지/혼자 가는 것보다/함께 가면 좋은 걸/함께 사는 이 세상 우리를 위하여.(스탑크랙다운 노래 < 와 > 中)" 그들은 그렇게 '함께 살자'라고 한국말로 노래했다.

농성이 마무리 되면서 소모뚜는 소화기 압력계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소모뚜의 '강행군'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월~토요일까지 일하고, 단 하루 쉬는 일요일이면 밴드 연습을 하거나 공연을 가졌다. '버마행동'이 꾸려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5년 MWTV가 만들어지면서는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장은 늘 소모뚜를 배려해주곤 했다.

 



 
ⓒ한향란 스탑크랙다운 공연

그러다 지난해 10월 스탑 크랙다운의 멤버인 미노드 목탄, '미누'라고 불리던 '유명한' 한 이주노동자가 강제 추방 됐다. 미누의 추방과 함께 소모뚜씨 역시 '미누의 친구'로 언론에 입길이 오르내렸다. 어느 날 사장이 소모뚜씨를 불렀다. "네가 열심히 활동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활동하는 줄은 몰랐다. 혹시나 정부에서 압력이 올까 무섭다. 일 정리 해달라" 추방당한 것은 미누씨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모뚜씨는 일자리에서 '추방' 당했다. 그리고 돌아보니 2003년 결성 된 스탑 크랙다운의 멤버 5명 중 남아 있는 사람도 둘 밖에 되지 않았다.

공구 대신 소모뚜씨는 카메라를 들었다. MWTV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그에게 MWTV는 단순히 방송이 아니다. 그는 "MWTV를 통해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노동법, 산재,
최저임금법 등을 공부했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 꼬박꼬박 참여해 강의를 듣곤 한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은 또 한 번 실직의 벼랑 끝으로 몰렸다. 정부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수를 제한하는 '건설업 취업허가제'를 도입했고, 기존에 회사에서 부담하던 기숙사비와 식대 등을 이주노동자 월급에서 공제하는 방안 도입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시행되던 취학 아동을 둔 미등록 이주 노동자 부모들의 한시적 체류 허용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 들어 중단 됐다. 노동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도 선 구제하고 후 통보한다'라는 지침을 삭제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노동부는 문제 해결에 앞서 법무부에 신고부터 하게 했다.

누구보다 이런 현장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의 '속살'을 잘 알고 있는 소모뚜씨는 말한다. "이주노동자들에 나라를 떠나올 때,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것 아니에요.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떠나오는 경우가 많죠. 저 역시 그랬구요. 이주노동자들,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해요. 미디어에서는 명절 때 TV에 한복 입고 나와 한국말로 노래하고, 한국 음식 잘 먹는…그런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마이크를 놓을 수가 없어요. 아직 알려야 할 현실이 더 많으니까요"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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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14:21 2010/05/0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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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는 “축복입니다” 라는 버마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축복이고 살아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것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도 거대한 축복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밍글라바”라는 인사말을 드립니다. 저는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면서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듭니다. 저의 글과 노래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 소수자들에게 사랑받는 한국 축복을 받는 한국을 만들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경험을 통해 나오는 내용으로 담은 글 과 노래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마음으로 제 글을 읽으시고 노래를 들으시면서 동시에 머리로 생각을 함께 해주셨음 합니다.

이제 제가 한국에서 거주한지 15년이 됐습니다. 한국이 외국인 이주역사가 한 20년 정도 된다는데 저의 이주민 생활이 이주민 역사라고 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동안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던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눈물 없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기쁨을 준 일도 있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은 꿈과 희망을 위해 좋든 싫든 돈을 벌어야 먹고 삽니다. 돈을 많아 모아야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님들을 도울 수 있고 나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주민들은 꿈을 안고 한국으로 들어와 일을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돈을 버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때문에 외국에서 들어 온 이주민들에게는 훨씬 힘든 일에 부딪힙니다. 하루 12시간의 노동과 산업재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주민에 대한 정부의 정책미흡으로 자기 뜻과는 달리 미등록노동자가 되어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의 현실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기서 잠시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 볼까 합니다. 한국은 이미 최소한 700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이주노동자로 보낸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이런 어려움은 한국에서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이주해간 한국인 이주노동자들도 겪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도 꿈과 희망을 위해 한국을 떠나 낯선 외국 땅으로 떠난 것이지 않습니까? 현재 미국에 한국인 미등록노동자가 20 만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한국에 있는 미등록외국인 숫자와 비슷합니다. 미국에 사는 미등록 한국인이 위에 말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한국의 언론, 정부와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주민 문제는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이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한국 사람들의 문제라는 면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치 이주민이 한국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는 인상을 줍니다. 이주민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포용의지가 부족합니다. 요즘 들어 무슨 유행처럼 다문화라는 말이 번지고는 있지만 정책변화는 없습니다. 정책을 만드는 정부나 집행하는 기관이나 심지어 시민들의 의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찬찬히 따져 생각해 봅시다.

 

만약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산다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이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국제사회가 부러워할 만한 이주민 정책을 가지게 된다면 한국교포들도 그 나라에서 자랑하겠죠. 자랑만 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좋은 정책을 요구 할 수 있지요. 이들만 좋아질까요?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이 됩니다.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하고 한국국민은 힘들게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 18년 동안 거주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고 열심히 일하고 싶은 데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던 미누( 미노드 목탄)라는 분이 있었죠? 한국은 참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한국이 법이 아니라 관용을 선택해서 그의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요? 외국에 이른바 불법체류하고 있는 한국교포들의 지위에 대해 정부는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인권과 관용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도 당연히 존중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이주민들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와 있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 때문입니다. 내가 가족에게 준 사랑, 가족이 나에게 준 사랑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는 희망을 노래하며 살고자합니다. 우리의 노래는 한국교포들의 노래로 또 이 땅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노래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가 노래할 수 있게 당신의 손을 피아노 위에 놓지 않겠습니까?

“밍글라바 코리아~”

이글은 수유너머R의 weekly 웹진에서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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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00:18 2010/05/03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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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뚜/ 이주 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

  

2010년 3월 5일은 내가 한국에 온 지 15년째 되는 날이고 3월 7일은 내가 이주 노동자가 된 지 15년째 되는 날이다. 열아홉 살 때부터 한국에 와 있었기 때문에 몇 년만 더 있으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15년이라는 세월은 참 오랜 시간이고 그동안 내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 온 지 15년 됐다는 내 얘기를 듣는 분들은 나보다 더 놀라워한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나 내가 활동하는 이야기를 인터뷰하러 오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내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부모님 안 보고 싶으세요?”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울해진다.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부모님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고, 고향도 그립지… ….

하지만 “‘살고 싶은 곳’보다 ‘살아야 하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왔다. 내 꿈과 희망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움 또는 다른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면, 누구나 나처럼 ‘살고 싶은 곳’보다 ‘살아야 하는 곳’을 선택할 것이다. 나에게는 한국이 내가 선택한 곳,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다. 한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인연 때문이다. 여기서 살면서 내게는 친구들이 생겼고 스승들도 여기 계신다. 그리고 한국에 오랫동안 살다 보니 여기가 바로 내 집, 내 나라가 됐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는 내가 사는 이곳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받아먹은 적이 있다면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고 어렸을 때 배운 적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대가나 기분 좋은 대우를 못 받더라도, 지난 15년 동안 내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대해 주고 나를 성장하게 해 주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나는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일들을 해 왔다. 내 노래로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나의 경험으로 한국 사람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벽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이주민들에게는 ‘세상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안 좋은 한국 사람들만 보고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나쁘다고 판단하지 마’ 하고 강조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든, 잘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든,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고 알리고 있다.

나는 “너희 나라에도 해가 있냐? 달이 있냐?” 하고 어처구니없는 물음을 하는 한국 사람도 만나 봤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 한국 사람도 만났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다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만났다.

공장 기숙사 내 방에 있는 불단에 자기 양말을 벗어 올려놓는 한국 사람도 만난 반면에 자신이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와 함께 절에 다니며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만났다. 손으로 밥을 먹는 나라라고 더럽다고 무시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내 나라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존중하며 배우려 하는 사람도 만났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며 처음 보자마자 반말을 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만났다.

나한테 월급을 주는 게 얼마나 아깝고 싫었으면 오백 원짜리,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 … 등을 주머니 속에서 하나하나씩 꺼내서 월급을 주는 한국 사장님도 만났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정직하게 월급을 주는 사장님도 만났다. 한국 땅에서 이주민과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만났다.

물론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처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반반씩 겪은 사람의 생각과 늘 안 좋은 일만 겪어 온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좋은 일만 생길 수도 없고 늘 나쁜 일만 있을 수도 없다.

내가 15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인과 이주민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같은 땅에 함께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서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주민들도 한국이 뭘 해줄까 하는 것만 기대하기보다 한국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한국어도 배우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함께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꿈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꿈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며 손으로 실천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서 한국에 보답하고 싶다.
 

이 글은 작은책4월호 "우리 밖의 우리"코너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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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00:12 2010/05/0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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