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미얀마 새로운 대통령 떼인세인은 전국 교도소에서 14천여명의 수감자들을 석방했다. 그 것은 그의 정부가 이전의 전임자와 같은 임의의 법 적용을 하려고 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임자는 탄쉬에(Than Shwe)으로, 유명한 독재자였다.

 

권력을 잡고 나서 첫 6주가 됐는데도 떼인세인(Thein Sein) 정부는 국가의 정치적인 발전에 중요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와 민주화 세력 그룹들은 여전히 새로운 정부에 의해서 정치범들이 석방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 인세인 교도소 앞에서 정치수감자들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

 

그러나, 떼인세인(Thein Sein)의 엠네스티 프로그램은 긍정적인 정부를 향한 그러한 기대들을 저버렸다. 1988년의 민주화 운동 이후로, 떼인세인(Thein Sein) 군부 체제는 임의적으로 엄격한 법을 적용했고, 그 법은 수천의 정치 활동가들에게 장기의 수감형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감옥에 남아있던 2200명의 정치범들은 88 Generation Students(1988민중항쟁 때 주도한 학생지도자 모임) 그룹의 리더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리더들은 2007년으로부터 65년의 형을 받았다. 2005년 초기에 수감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100년에 가까운 형을 받았으며, 2007년에 승려 혁명(샤프론 혁명)을 이끈 많은 승려들은 긴 수감형을 받았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공정하지 않은 판결에 직면해서, 떼인세인(Thein Sein)은 엠네스티 프로그램을 고안했고, 그 프로그램은 1년까지 모든 죄수의 형을 감소시키고 모든 사형 선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이상의 형을 받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단지 1년까지 형을 감하는 것은 그저 경멸을 받아 마땅한 농담에 불과했다.

 

최소로 정치범들을 고려하려고 한 이 프로그램을 보면, 새로운 정부가 정치범들의 다수를 석방시키지 않으려는 계획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단지 거의 형을 다하고 있었던 40-50명의 정치범들만이, 떼인세인(Thein Sein)의 엠네스티 프로그램에서 첫째로 석방될 것이다.

 

하지만 떼인세인(Thein Sein)의 전임자 탄쉬에(Than Shwe)정부는 이것보다는 잘 했었다. 1992년에 탄쉬에(Than Shwe) 1990년 선거 결과의 영광을 거부하고 권력을 잡은 후400명의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그에 비하면, 단지, 떼인세인(Thein Sein)은 탄쉬에(Than Shwe)가 정치범을 이용한 전례를 따랐고, 새 정부는 유엔 고위급 인사인 남비아르 툭사의 첫 버마 방문이 지나 몇 일 후에 그러한 국제적인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시도를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희망적이게도, 이것은 증가하는 국제적인 압력이 새 정부에 효과가 있다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정치범을 석방하는데, 떼인세인(Thein Sein)정부의 의지 부족은 개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정부가 이전의 통치방식을 따라갈 것이란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정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막기 위한 적용이란 점도 보여준다.

 

국가에서 진짜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한 첫 걸음으로 요구되는 것이 정치범 석방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정부가 버마를 진짜 민주주의로 이끄는데 전혀 흥미가 없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떼인세인(Thein Sein) 정부가 전혀 정치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단지 탄쉬에(Than Shwe)에 의해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 정부라는 사실을 보는 것은 이제 쉬워졌다. 떼인세인(Thein Sein)의 엠네스티는 단지 연극에 불과하며, 그것은 버마의 새로운 정부의 수치로, 모두에 의해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글 소모뚜

감수 한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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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4:42 2011/05/25 14:42

농성장에서 결성 된 Stop Crack Down Band
 

농성시작 이틀 째 우리의 농성장으로 미누와 강라이를 포함해 네팔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왔다. 네팔공동체가 결합해서 우리의 농성장이 더욱 강해졌다. 사람이 많아져서 더 재밌는 것 같아. 우리는 오전과 저녁마다 한 번씩 농성장 밖으로 나가 집회하고 나머지 시간은 농성장안 에서 지냈다. 이때 나, 미누와 강라이는 농성장 내 작은 음악회를 가진다. 미누가 노래하고 내가 기타 치면서 농성장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나는 유레카밴드 때 10만원으로 샀던 드럼, 기타들과 앰프들을 이란주 선생(아시아 인권문화연대-대표)이 내준 5만원으로 차 빌려서 농성장으로 가져와 농성장 한자리를 아예 음악실로 만들었다. 내가 드럼을 치며 강라이가 기타를 치고 소띠하의베이스 소리에 맞춰 미누가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농성장 내 음악활동이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농성하느라 힘든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들의 노래가 피로 회복제가 됐다. 함께 노래들을 부르며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순간에는 지금 우리가 이 한국 땅에서 쫓겨날 대상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토요일마다 농성장 내 문화제가 열러 명동성당 앞 농성장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여러 곳 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부를수록 재밌는 ‘우리가 원하는 건’노래가 가장 인기 많았고 그 노래 때문에 농성장 내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밴드를 Stop Crack Down 밴드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우리도 소중한 우리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 이름 ‘Stop Crack Down’ (강제추방 중단!!)를 밴드 이름으로 했다. 농성하면서 우리는 각종 단체들의 후원행사 때 나가서 공연하게 됐다. 우리 밴드는 농성하느라 밖에 나가 공연하느라 정말 기쁘게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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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탑크랙다운밴드의 농성장내 공연 중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 ‘친구여~ 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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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추방 공포 때문에 자살한 이주노동자들

정부의 단속 추방이 강화가 될수록 매일 들은 소식들은 좋지 않았다. 강제 추방 공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은 자살하기 시작했다. 전동차 앞에서 뛰어내리는 이주노동자, 배 타고 고향으로 들어가면서 바다로 뛰어내린 이주노동자, 빚지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밧줄에 목을 매어목숨과 희망을 버린 이주노동자. 이렇게 꿈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 들어온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하나씩 안타깝게 죽어가는 이 강제 추방은 정말 싫다. 고향에 계신 이분들의 가족과 부모님들이 이 슬픈 소식을 알면 어떻게 될까? 정말 가슴이 아프다. 이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와 미누가
‘친구여~ 잘 가시오’라는 곡을 함께 만들었다. 역사가 이들을 잊지 않기를 위해서다.

 

친구여 잘 가시오 

우리의 친구여 동지여

편안하게 가시오.
 

저 세상 끝에서 보아라.
 

너를 위해 우리 기도해
 

오~오 오~ 잘 가~
 

오~오 오~ 너를 위해 우리 기도해~
 

우리 친구여 동지여
 

얼마나 힘들었나.
 

더 이상 이런 죽음 없게
 

널 위해 기도하네
 

우리 함께 기도하네
 

(작곡/사- 소모뚜, 미누)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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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20:55 2011/05/21 20:55

 

지난주 금요일. 김포 어린이집 아이들 대상 다문화 교육을 하는 두 번째 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소모뚜 선생님이다! 소모뚜 선생님이다!” 라고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난주 금요일. 아이들에게 교육했던 첫째 날에는 아이들은 나를 “아저씨 누구세요? 뭘 하러 여기 왔어요?” 등등 낯선 질문들을 내에게 던졌다. 다르게 생긴 나를 보고 질문들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의 질문 하나, 하나를 친절하게 답해줬다. 우리들은 만난지 10분만에 서로 친해졌다. 나의 질문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더 이상 낯설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주는 버마어를 상큼한 목소리로 따라하면서, 나도 아이들의 궁금한 것들을 따뜻하게 대답해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어떤 이익을 받을까 라는 이윤이 우선이라는 논리도, 마음도 전혀 없다. 서로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지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이는 순수하고 참 편했다. 사랑이란 무엇을 얻을까를 바라서 한다하면 그것이 없어질 때 사랑도 없어진다. 하지만 무엇을 해 줄까라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아이들과 나의 사랑이다.

 

어린이들과 재밌는 시간을 지낸 후 나는 연합뉴스 기자랑 만나러 종각역으로 갔다.

나에게 “다문화 뉴코리안”이라는 인터뷰를 해 달라 해서 가는 것이다. “다문화 뉴코리안”이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거주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한국인이 되어 가는 이주민 1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기획기사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내가 이제 사회 구성원이 되어가면서 어느새 내가 새로운 한국인으로 변했나가 핵심인 인터뷰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할 것이 없다. 솔직히 내가 언제부터 한국인이 됐냐는 것에 고민한 적이 없었다. 김치 없이 밥 먹을 때 김치를 찾는 것이 한국인이 됐다하면 그럼 나는 이제 한국인이 된 것 같다. 버마 말을 할 때보다 한국말 할 때가 더 편하다는 것. 뭐 이런 것이라면 내가 한국인이 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나는 16년 동안 한국인을 포함해 수많은 외국인들과 만나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모양은 달라도 모두 다 똑같이 슬플줄, 기쁠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경험을 통해 한국인, 버마인, 네팔인 등 명칭만 다르지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됐다. 그래서 나에게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왜 차별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올 때마다 사람은 사람에게 차별하면 안 된다고 답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한국인도, 버마인도, 외국인도 없어져서 그렇다.

 

나의 뉴코리안 인터뷰기사가 지난 일요일에 인터넷 세상으로 노출됐다. 앞서 말했던 대로 뉴코리안 인터뷰대상은 독일인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탈리아인 미수다의 크리스티나, 소련인 축구 골키퍼 코치 신의손, 몽골 출신 아리옹씨, 중국동포 이림빈 한마음협회장, 베트남댁 이유정씨, 스리랑카인 이주노동자 상담원 프레마랄씨, 중국동포 강광문 서울대 교수, 여성 가족부 공무원 정수림씨와 나를 포함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이주자 총 10명인데 내가 마지막 인터뷰 대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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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차별 없애야 한다는 뉴코리안 기사와 압플들.


 

 

 

 

그런데 이들과 인터뷰한 기사들에는 답글도 없고 압플도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서양인이나, 교수의 기사에는 압플이 없고 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겸 난민인 나에게는 압플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개선 활동하는 나에게는 압플이 풍부하다. 대부분 압플은 이주노동자가 위험한 존재, 살인자, 범죄자 뭐 이런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인권수준에 대한 당사자 내가 직접 겪었던 이야기를 말한 것에 대한 반감의 압플이 많다.

 


 

사람은 사람에게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한 내게도 압플이 많지만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동남아 여성들이 노인이랑 결혼해서라도 한국에 시집오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런 여성들도 탐탁지는 않지만 인종이 다른 동남아에서 원숭이를 데려오는 것보다는 낫다”며 동남아 출신 이주결혼여성을 원숭이에 빗댄 글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 인터넷상에

▷혼혈인 증가를 막기 위해 국제결혼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등 뿌리 깊은 순혈주의

▷특정국가 출신 외국인을 테러리즘과 연결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경향

▷특정 국가나 피부색에 대한 편견 등 인종차별적 표현이 난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G20 회의장 인근에 무슬림 사람 접근을 금지시켜야 한다. 테러 대비를 위해 접근 시 전원 사살해야 한다.” “우리 기숙사에 수단에서 온 흑인 두 명이 있는데 흑인 냄새가 아주 지독하다”는 등 외국인을 위협적 존재로 표현하거나 비하하는 표현 등이 적지 않았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도 피부색이 까맣거나 행색이 남루한 연예인을 두고 ‘동남아 스타일’ ‘동남아마약판매상’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내 차별의 원인이 어릴 때부터 단일민족이 자랑스럽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등등할 수 없다는 교육을 받아 온 것의 결과라고 본다. 음악, 예술, 스포츠 등 물질적인 면에서 국가 간, 사람 간에 우리는 남보다 잘한다는 것의 표현들을 강조하다보면 국가와 인종주의 애국심과 함께 다른이들은 우리보다 못한다는 방향으로 빠져 차별과 무시가 생긴다. 자제할 필요 있고 겸손할 필요 있어서 참 중요한 부분이다. 태양의 밝은 빛이란 쳐다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꽃의 향기로움도 향을 맡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때 힘들었던 한국의 아픔기억을 잊으려 하는 자세를 충분히 이해해도 그것으로 또다시 아픔을 만들면 안 된다.

 

한집에 사는 가족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되면 이해와 배려도 그만큼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이 소통을 해야 할 대상이 더 이상 늘 동경의 대상으로 빛내온 서양인만 아니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덜 발전한 아시아 국가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잘 보이고 약자에게는 무시해도 된다는 차별의 원론을 이제 없애야한다. 이제 한국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이 아니고 그동안 숨겨져 왔던 약자이면 차별하는 인식이다. 그것이 이주민들과 함께 사는 것에도 필요하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도 바꿔야 할 시급한 문제다.

 

요즘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쳐 주고 있는 활동들이 많다. 환영한다. 하지만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잘 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본인들의 언어 본인들의 문화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사람은 다양한 문화를 겪게 되면 생각도 넓어지고 사람에 대한 편견도 달라진다. 생각이 넓어진 이주여성들이 이주아동들을 키운다면 미래세계에는 요즘 같은 한심한 상황들이 줄여들 것이다.

 

다르게 생긴 아이들하고 지내게 될 한국아이들에게도 신경 쓸 필요하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가르치는 부모들 때문에 한국아이들과 이주 아이들 사이에 벽이 생기고 있다. 지혜로운 부모에서 착한 아이들이 나오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거주 이주민들이 이사회의 뉴코리안으로 탄생해서 살아가는 것에 관심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인종차별 하지 않은 새로운 한국인들, 뉴코리안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함께 사는 다문사회, 국격을 올리는 것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소모뚜
2011-05-10

@ <다문화 뉴코리안> ⑩미얀마 난민 소모뚜씨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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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3:50 2011/05/10 13:50

연합뉴스 | 양태삼 | 입력 2011.05.08 07

 

"외국인 차별보다 사람 차별 없애야"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한때는 간절히 한국인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김치 없인 밥을 못 먹으니 한국인 같은데 버마(옛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일하니 버마인이기도 하거든요."

미얀마인 소모뚜(36)씨는 체류 외국인이 120만 명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이 독특하다며 이렇게 정체성을 설명했다.

 

                          < 인터뷰 중인 소모뚜씨 >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체류하는 외국인, 한국에 살러 온 이주민 등으로 나누자면 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4월 말 현재 243명인 난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소모뚜씨는 2004년 낸 난민 신청을 법무부가 2009년 기각하자 바로 소송을 제기, 최근 대법원 최종심에서 이겨 3월25일자로 외국인등록증과 난민인정서를 받았다. 난민은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고국을 떠난 사람으로 1992년 유엔(UN) 난민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난민으로 인정된 게 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때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첫 월급을 타서 고향에 송금했던 때"라고 꼽았다. 경기도 김포의 한 박스 제조업체에서 새벽 1시까지 일해 75만 원을 받은 뒤 64만 원을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온갖 죽을 고생을 해 번 돈이 무엇보다 반가웠고 깨끗한 것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내 힘으로 해냈다는 성취감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 공장이 가끔 꿈에 보이면 지금도 식은땀을 흘린다고 술회했다.

미얀마의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린 게 두 번째로 기뻤던 때라고 말했다. 김포 공장에서 8년을 일하고 소송 끝에 받은 퇴직금 600만 원에 친구들에게 꾼 돈을 보태 1천200여만 원을 만들어 보냈다. 그의 모친은 창문을 열면 미얀마에서도 이름난 쉬다공 사원을 바라보고 절할 수 있는 집에 사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지 15년 만인 지난해 여동생을 만났다. 그가 보낸 돈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여동생은 영국 시민권을 얻자마자 오빠부터 찾았다. 그간 가장 노릇을 한 보답으로 여동생은 오빠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고 소모뚜씨는 전했다.

가리봉동 소화기 제조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하며 월급을 송금하던 그에게 2009년은 고비였다.

그는 "돈을 벌려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이주민 활동을 저버린다면 생을 마칠 때 나를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부터 이주민 밴드인 '스톱 더 크랙 다운'(Stop the Crack-down)의 멤버이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단체인 '버마행동' 회원으로 활동했다. 버마행동은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매달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집권한 미얀마 현 정부가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자 이에 반대하고 정체성을 지킨다는 뜻에서 '버마'라는 이름을 고수한다.

아울러 2009년 재정 위기로 난파 직전인 이주민방송(MWTV)의 공동대표를 맡아 후원금 배가 운동을 펴 위기를 넘겼다.

그는 당시 200만원의 월급을 받고 휴일과 퇴직금이 보장되던 공장을 그만두는 게 몹시 아까웠다면서 "지금 강연료 등의 수입으로 그 때만큼 버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벌 팔자인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리봉동의 월세 12만 원짜리 쪽방에 산다. 이주민방송에서 일한 활동비에다 여러 곳에서 받은 강연료로 여전히 한 달에 200여만원 수입을 올린다.

최근 한국이 직면한 다문화 바람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다문화 활동가는 점점 사라지고 다문화 사업가, 다문화 사기꾼이 늘어난다"고 꼬집으며 "정부와 관련한 다문화 단체가 200여 개로 급증했는데 정부의 재원이 이주민뿐 아니라 한국인 활동가에게도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주민방송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인권상 단체상 수상을 거부하자 '고맙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면서 "건전한 비판정신이 있어야 지금 걸음마 단계인 다문화 운동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법체류 노동자 때는 단속을 피할 수 있도록 한국인처럼 보이길 간절히 바랬고, 지금은 김치 없인 밥을 먹질 못한다"고 말한 뒤 "하지만 미얀마 젓갈이 반찬으로 나오면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온종일 한국인과 만나고 한국어로 얘기하다 보면 한국인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면서 "어느 사회든 차별이 없을 수 없지만 '미얀마인 또는 난민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 '사람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tsy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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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14:44 2011/05/08 14:44

한국!! 희망이 땅인가, 죽음의 땅인가

2003년도 정부의 고용허가제 도입과 미등록노동자 강제 추방이 결정되었다.

강제추방 공포에 지쳐 전동차 앞으로 뛰어내려서 세상을 떠난한 이주노동자의 소식, 경고음과 함께 라디오에서 나온 불법체류 외국인을 신고하라는 방송 등이 강제추방 공포에 빠진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충격이 됐다.

 당시 40만 이주노동자들 중 80%가 미등록노동자이며 이들에게 이제 희망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되어가는 한국. 단속에 걸려서 잡힐 때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을까,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죄가 되어 쫓겨나야만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까.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함께 걸어온 역사를 생각해본다.

 1997년도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는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과 라면 함께 먹으면서 노력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본인들이 가진 금품을 기부하여 한국경제 되살리기에 적극 참여했다.

 2002년도 월드컵 경기 때 우리도 빨간 티를 입고 빨간 머리띠를 메며‘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한국 팀을 응원하러 광화문 거리에 나갔다. 우리의 힘찬 박수와 목소리 그리고 한국 국민들의 박수와 목소리 모두 다 하나가 되어 한국을 지배했다. 이를 보면 우리는 기쁠 때도 함께 힘들 때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한국 국민들에게 진정한 친구라는 뜻이다.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법제도를 도입한다면 당연히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하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제도를 만드는 건가? 제도에 따르면 체류 4년 미만자는 합법화, 4년 이상 체류자 13만 명 에게는 강제추방이다.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한 번 닦고 버린 휴지 조각이 되는 건가? 오랜 친구를 쫓아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정부의 비인간적 강제추방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몇 달 동안 숨어 있기 위해 친구들이랑 방을 얻어 지내기를 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낮에 하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일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와 버마공동체 회원들은 부천외국인 노동자센터와 함께 우리의 권리를 위해 농성투쟁하기로 했다.

 

우리는 2003년 11월 15일 저녁에 명동성당 앞으로 버스를 빌려서 갔다. 농성투쟁을 할 이주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알고 지냈던 소띠하와 내가 얘기하게 됐다. 우리 둘은 그때서야 서로 제대로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소띠하가 내게 자기가 유레카밴드에 대해 관심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본인도 대학교 때 밴드 활동했고 베이스기타 쳤다고 했다. 나도 소띠하가 베이스 친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래서 내가 우리 농성하면서 같이 노래하자고 말했다.

 

11월 15일 저녁에 명동성당 앞 계단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이 모였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도 모였고. 우리는 우리의 권리 그러니까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구호들을 외쳤다. 밤이 깊어갈수록 날씨도 추워진다. 우리 모두가 명동성당 앞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줄줄이 앉아 도시락으로 저녁 먹고 침낭으로 온몸을 덮어 밤을 새웠다. 날씨가 너무 춥기 때문에 추운 것 너무 싫어하는 내게는 지옥 같은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성공회 성당 쪽으로 옮기게 됐다. 어떤 이주노동자들과 단체들은 명동성당 앞에서 남아 농성했다. 왜 따로 하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밤새 구호 함께 외치며 친해진 이주노동자들, 한국인들과 다 같이 농성을 하고 싶었다. 
 


                           ▲2003년 강제추방저지 농성중
 

 농성 첫날에 만든 노래 ‘우리가 원하는 건’

 농성 시작하는 그날 저녁 나는 똑같은 구호들만 외치고 있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외칠 수 있게 모두구호들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 노래는 지금까지 여러 곳곳에서 열린 수많은 이주노동자 집회 때 사용하게 된 ‘우리가 원하는 건’이라는 곡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STOP! STOP! STOP! CRACK DOWN
 

WE ARE LABOR
 

WE WANT LABOR’S RIGHTS
 

투쟁 투쟁 투쟁
 

 


강제 추방 반대 한다
 

우리는 노동자
 

우리는 노동자 권리 보장해
 

투쟁 투쟁 투쟁
 

(작곡/사- 소모뚜)


 


노래 들어 보기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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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12:20 2011/05/05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