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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23:36 2011/07/11 23:36

세계난민의 날에 들어본 한국거주 버마난민의 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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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위 주최 난민인권 순회 상담  때.

 

지난 2010년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한국 내 난민,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인권순회 상담을 했다. 나는 인권위 담당자의 부탁으로 순회 상담 초기 기획을 만들 때부터 순회 상담하는 곳까지 같이 다니면서 기록 촬영, 공연 등을 함께했다. 순회 상담이란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있는 이주민지원센터에 가서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인권문제에 대해 인권위, 노무사, 변호사, 법무부, 노동부 등이 함께 상담을 해주는 것이다.

 

그때 우리 단체 회원 부부가 난민신청을 했는데 난민실에서 이들 부부와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이들의 신청서를 없앴다. 그런데 남편 분이 운이 나쁘게도 출근길에 출입국 단속반에게 걸려 보호소로 잡혀 갔다. 그래서 나는 회원의 석방을 위해 순회상담 때 오는 법무부 담당자한테 가서 우리 회원의 석방을 위해 상담을 했다.

 

회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 내가 그 분에게 "저희 버마행동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에 나에게 "현 정부는 당신네 단체에 대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서 나에게 "당신 같은 사람들을 조직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주나. 난민 인정 해준다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도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람들을 조직해서 사회를 흔든다? 한국 내 이주민들도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는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이 사회를 흔드는 것인가, 이주민들을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차별, 탄압과 배제를 하는 법제도가 사회를 흔드는 것인가?

 

그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그냥 웃음 밖에 안 나왔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버마 민주화 하나만 신경 쓰고 활동할 테니까 이주민들이 사업장내 겪고 있는 폭행, 욕설, 임금 무지급 등 우리가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여러 탄압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당신들이 책임지고 해주세요.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주민에 대한 활동들을 안 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니 그는 그저 나를 보고 웃었다.

 

이 날 내가 알게 된 것은 난민 인정이란 한국 정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입 닫고 사는 사람들에게만 해주는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가 이주민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출입국법에는 외국인은 정치활동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작년 이주민 인권현황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버마행동의 한 회원이 자신들의 탄압 상황을 발언하는 이주민들에게 통역을 하기로 했는데 전날 출입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단다. 내일 기자회견 때 통역을 하면 출입국법 위반으로 강제추방하겠다고. 우리 회원이 통역하는 게 전부라고 답하자 출입국 직원은 그것은 네 사정이고 그래도 하겠다면 출입국 위빈이니 알아서 하라고 했단다. 협박에 겁이 난 그는 그날 통역하러 가지 못했다.

 

사회 소수자들의 아픈 소리를 외면하고 통제하며 보호도 못해주는 그런 법은 따르는 것보다 위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백만원짜리 외국인 등록증?

 

인도적 지위 허가를 받은 사람이 취업을 할 수 있게 법이 개정되자 우리 회원들은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 허가를 받으러 출입국 사무소로 갔다. 그런데 난민신청을 하기 전에 비자 없이 체류한 것에 대해 최소 400만 원에서 2000만 원까지 벌금을 내야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 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400만 원 또는 2000만 원이라는 큰 돈을 한꺼번에 내고 외국인 등록증을 받을 능력도 없고 그렇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자 없이 체류했지만 그동안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성실하게 일했던 것뿐인데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허가증 없이 일하게 됐다.

 

벌금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난민 신청을 한 지 일 년 넘었는데도 결정이 안 나와서 취업 허가를 받게 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 허가증을 받으러 출입국에 갔는데 비자 없이 체류한 기간에 대한 벌금

400만 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수백만 원 벌금을 내고 등록증을 받는 것은 이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단속이 강화된 시기에 임신 때문에 병원으로 자주 가야 하는 아내의 안전을 위해 남편은 주변 친구들한테 돈을 빌려 400만 원 벌금을 내서 외국인 등록증을 받았다.

 

나는 이들 부부에게 인터뷰하러 갔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임신 중인 아내의 병원비마저 힘든 상황에서 할 수 없이 400만 원 벌금을 눈감고 냈던 이들 부부에게 내가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자신들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다.

 

낮은 곳으로부터 사랑하자

 

난민에 대한 나의 글은 이번 것까지 해 3번째다. 난민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어려운 현황을 더 많이 쓸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만 쓰겠다. 60년 역사를 가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한 지 10년이 넘는 한국이 난민 처우를 더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아렬주기 위해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현황을 알리자는 의지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탓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해야만 진정한 다문화 사회, 달콤한 다문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소수자들, 약자들이 자신의 꿈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나가자는 것이 나의 외침이고 요구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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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2 00:36 2011/07/02 00:36

“세계 난민의 날에 들어본 한국거주 버마난민의 삶②

 

우리 버마행동 회원들은 난민 인정이 거부되자 법무부 장관에게 이의신청을 했다. 지난번 기사에 얘기 했던 사소한 활동이라 해도 버마 군사정부는 버마인들에게 무거운 증형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오랫동안 했던 다양한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귀국시 분명히 감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이의 신청에서 밝혔다.

 

이의신청한 후 몇 주 후, 난민실에서 면담하러 오라고 연락 왔다. 난민실 관계자는 우리단체의 다양한 버마반정부 활동에 대해 질문 했고 나는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줬다. 그런데 그는 나를 놀라게 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버마행동이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왜 한국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냐고 물어 본 것이다.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했다. 독재국가인 버마정부가 하고 있는 못된 짓을 한국정부가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단체가 어떤 활동을 하기에 한국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나를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참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가 버마 반정부 운동가들이면서도 난민지위를 받지 못한 이유를 눈치 챘다. 그의 질문에 대한 얘기하기 전에 2007년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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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여수 외국인 보호시설 화재 사건 때 사망한 이주노동자들

 

지난 2007년 2월 11일 전라남도 여수시 화장동 여수출입국관리소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해 이주노동자 10명이 숨지고 18명의 부상을 입었다. 화재사고 당시 보호(?) 중인 55명의 외국인 가운데 28명만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도움(?)으로 구조되었고, 나머지는 불길과 쇠창살에 갇혀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외국인 보호시설에는 그 흔한 스프링쿨러와 화재경보기 등 소방시설이 제대로 작동치 않았다.

 

전남 여수지역 사회단체들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맞아 희생된 이주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재발방지 대책과 인권개선책 등을 정부에 촉구하는 추모회를 가졌다. 특히 화재참사 이후에도 정부는 위법성 논란이 되는 강제추방과 반인권적 외국인 구금시설을 계속 운영하고 있고, 법무부(출입국)가 나서서 외국인노조 탄압과 표적단속 등을 일삼고 있다.

 

한국이 희망이 땅이라고 생각해서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이 매일 성실하게 노동자로서 일을 하고 있지만 단지 체류허가 기간을 초과했다는 이유가 죽음의 이유로 변한 것에 대한 이주노동자출신 우리단체가 어떻게 외면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 때 참사 추모제나 성명서에 여러 인권단체들과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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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여수 외국인 보호시설 화재 사건 때 자유발언 하는 필자.

 

난민실 관계자의 질문은 우리단체가 왜 그 참사에 함께 하고 왜 성명에 참여했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했고 서운하게 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에게 건강히 잘 다녀오겠다고 약속 하고 한국에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이 재가 되어 가족 곁으로 간다는 것이 같은 이주노동자인 우리뿐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인데, 모두에게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리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기를 원해서, 아무도 억을 하게 당하지 않기를 원해서 그 추모제 활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내가 난민실 관계자의 질문에 속상하지만 이렇게 대답을 했다.

“우리가 한국정부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한 것이고 행동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에 찬성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버마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한다 해도 자신이 와 있는 곳의 상황에 대해 외면 할 수 없다. 우리가 와 있는 곳에서 인권이 존중되는가도 버마민주화 만큼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내 나라 버마만 민주화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와있는 곳에서도 제대로 민주화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함께 노력할 것이었다. 단지 난민인정을 받으려고 눈앞에 있는 인권침해까지 모른 척 할 정도의 비겁한 마음은 없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

 

그는‘ 그럼 앞으로 어떤 행동들을 할 것인가’ 물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고 인권을 무시하면 버마정부든 한국정부든, 어느 정부든 가만있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한 대답을 꼼꼼히 적었다. 그날 인터뷰가 끝난 후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마음이 참 아팠다.

 

자신의 꿈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볼에 타서 재가 된 이주노동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이 더 이상 없도록 노력하는 이주노동자들까지 반정부 세력으로 보인다는 현실이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민심사란 출신국가로 귀국시 박해받을만한 반정부 활동을 했나 안 했나를 심사하는 것이지, 한국정부에게 어떤 말을 했느냐를 심사 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 후, 우리의 이의신청도 불허 당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때문에 이런 결정이 나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이 라고 알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 그런 사실을 우리의 난민신청 관련 담당 변호사를 통해 알았지만 몇 개월 후에 그 사실을 내 귀로 직접들을 수 있었던 날이 왔다. 그 얘기를 다음 글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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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8 22:24 2011/06/28 22:24

비정한 한국... 살 수는 있지만 일은 못 한다?

 
[오마이뉴스 소모뚜 기자]
버마 민주화를 위한 세계공동행동의 날
ⓒ 소모뚜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해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는 4000만 명 이상의 난민 등이 국제사회의 보호를 찾아 떠돌고 있다.

 

한국에는 1994년 난민신청을 받기 시작한 이후 2010년 3월 현재 모두 3073명이 난민신청을 하였고 이 가운데 235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132명은 인도적 체류 자격을 허가 받았고 1604명은 불허, 자진철회가 580명이며, 현재 522건이 심사 중이다(난민인권센터 자료).

나는 2004년에 난민신청을 했다. 우리들('버마행동' 회원들)이 한국 내 버마 이주노동자들을 과도한 세금으로 착취하는 미얀마대사관을 상대로 싸웠다가 테러리스트로 찍혀 생명보호를 위해 난민신청하게 됐다.

우리는 인천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난민신청 접수를 했다. 난민신청 접수 담당자가 미등록체류자들을 단속하고 있어서 한참 기다렸다. 더운 날씨에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어온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우리를 보자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우리를 향해 맘껏 풀었다. 반말과 멸시를 들은 끝에 난민신청 접수가 끝났다. 어차피 접수 후에 난민신청에 대한 이유를 자세히 심사할 건데 왜 난민신청 접수 때부터 기분 나쁘게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살 수는 있지만 일할 순 없다... 그럼 뭐 먹고 살라고

며칠 후 6시간 가까이 심사를 받았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내가 한국으로 오게 된 이야기, 한국에서의 나의 생활들을 아주 자세히 심사받았다. 나는 통역 없이 한국어로 답할 수 있기 때문에 6시간 후 심사를 다 끝낼 수 있었지만 통역이 필요한 신청자들은 하루 안에 못 끝내서 다시 와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심사다. 그게 원칙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난민이 된 이유와 상관없는 나의 개인정보 내용까지 모두를 자세히 다 이야기해줘야만 하는 것에 무척 기분이 불쾌했다. 생명을 보호받고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답하기 싫어도 꼬치꼬치 물어본 것을 참고 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는 난민신청을 해둔 동안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계를 위한 아무 지원도 없지만 난민신청자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법으로 명시돼 있다. 법이라서 지키고 싶지만 지킬 수 없었다. 일을 해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

우리 회원 한 명(난민신청자)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출입국 단속반을 만난 경우도 있었다. 그는 단속반원들에게 난민실에서 그에게 준 A4용지 사이즈 크기 난민신청접수증을 보여줬다. 단속반원이 그에게 난민신청자는 일하면 안 되는데 왜 일하냐고 물어봤다. 그가 거지가 될 수 없어서 일한다고 답하자 단속반원이 그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그냥 나갔단다.

생명을 보호받으러 난민신청을 한 사람이 굶어 죽지 않게 해주는 지원조차 없는 데다가, 신청자가 자기 힘으로 먹을거리를 찾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이 참 마음 아픈 현실이다. 힘없는 약자인 우리들이 먹는 밥 한 끼를 그리 아까워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주한 미얀마대사관 앞 버마군사독재정권 규탄 시위에 참석한 소모뚜씨의 모습.
ⓒ 스탑크랙다운 제공  

 

정부 풍자만화 '펌질'했다고 12년형... 버마의 '현실' 알고 있나

2004년에 난민신청 심사를 받은 이후로 나와 난민실의 인연이 한참 동안 끊겼다가, 4년이 지난 2008년에야 난민실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모두 난민인정 '불허'를 받았다. 하지만 버마 국내 상황이 안 좋아 모두에게 '인도적 지위'를 허가한다고 했다.

 

법무부는 우리가 난민신청을 한 뒤 4년 동안 미얀마 정부에 반대하는 수많은 정치활동들을 할 때는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면서, 우리의 정치활동이 미약해 귀국할 때 생명에 위협을 받거나 하는 문제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적 지위를 허가한다는 것은 난민처럼 정치, 종교, 민족 등으로 귀국 당시 박해 당할 가능성은 없지만 신청자의 나라 상태가 전쟁, 태풍 등 열악한 상황이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현재 거주 국가에서 신청자를 인도적인 차원에서 당분간 보호를 해주겠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법무부에서는 그런 상황에 있는 이들뿐 아니라 '난민으로 인정해주기에 부담스럽고 내쫓기도 어려운' 애매한 상태의 난민 신청자들에게도 인도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법무부가 말하는 대로 정말 우리가 귀국할 때 아무 문제가 없을까? 인터넷에 있는 미얀마정부 풍자만화를 자기 블로그에 올려다가 12년형을 받은 학생, 국제노동기구 관계자 명함을 가지고 있다고 35년형을 받은 사람, 해외에서 단체를 만들었다고 불법단체 설립 혐의로 35년형을 받은 사람, 태풍 피해지역에 구호의 손길이 없다고 외신에 이야기했다고 59년형을 받은 사람 등, 버마 내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 법무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궁금하다. 난민들의 생명보호 결정을 내리는 기관으로서.

2010년에 중동에서 온 난민신청자를 만났다. 그는 고국에서 야당 지도자였고 정치적 박해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난민신청을 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난민인정을 불허받았다. 그는 "인터넷에서 자신이 활동했던 야당과 나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도 한국정부가 왜 난민 인정 불허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도 이해가 어렵다.

2008년에 우리는 난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인도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어 한국에 계속 거주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인도적 지위자도 난민신청자처럼 일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난민실에 가서 인도적 지위 허가증을 받는 날에 법무부 직원이 우리에게 허가증을 주면서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웃을 얘기는 아니지만 그 얘기를 듣자 우리 모두는 그냥 웃었다. 그냥 황당해서.

그래서 내가 "그럼 우리 뭐 먹고 살아요?"라고 물어보자 그가 법이 그렇게 돼 있어서 할 수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법을 지킬 수 없었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일을 했다. 몇 개월 후 난민법이 개정되어 인도적 지위자도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난민실에서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이제 일해도 된다"고 했을 때, 이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은 "예, 감사합니다"뿐이었다.

그 후 2009년에 난민법이 개정됐다.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기나긴 심사기간에 기한을 정해, 심사결과가 1년 안에 나오게 했다. 그리고 심사기간이 1년을 넘는 경우 취업허가를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청자가 1년 동안 어떻게 먹고살게 해주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3명뿐인 출입국사무소 난민실에서는 난민심사를 1년 안에 처리하는 것이란 여전히 그림의 떡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 다음 기사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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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12:28 2011/06/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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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4년도부터 현재까지 초등·중학생들 대상으로 다문화 강사활동을 해 왔다.

 

버마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버마 내에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다는 것, 버마와 한국 두 나라간의 다른 점들 등등을 ppt와 영상으로 설명해주는 식으로 강연을 했었다.

 

아이들은 내가 버마가 남한 보다 7배가 크다고 할 때, 버마에 여러 가지의 보석들이 나온다고 할 때, 버마에 있는 우리 집의 앞뒤에 바나나 나무가 4개 있다는 것을 얘기 해줄 때마다 우와, 우와 하며 귀엽게 반응하면서 유심히 들어준다.

 

대나무로 만든 버마정통 공 (칭롱)을 보여주고 관련 영상을 보여줄 때는 영상에서 나온 버마 어린 소녀가 발, 무릎, 머리 등으로 다양한 자세로 공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치는 것을 아이들은 입을 쫙 벌리고 신기하게 본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영상에 봤던 대나무공을 가져서 열심히 따라 쳐본다. 처음에 공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치는 버마정통 칭롱 공놀이를 직접 해보던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렵자 나중에는 칭롱 공을 가지고 축구나 배구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버마정통 웃을 입혀주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버마 웃을 입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점점 자기도 한번 입어보겠다고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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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져온 통기타로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를 불러주면서 다 같이 부르게 한다. 역시 이번에도 아이들은 아주 귀엽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아이들과 나의 사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가까워진다. 내가 버마어 인사말, 감사 말을 가르쳐줄 때도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 외친다. 나에게는 아이들이 외치는 버마 말이 왜 이리 귀엽고 아름답게 들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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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는 기부 문화가 강해서 사람들이 매일 매일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의 집 앞에서 시원한 물이 담긴 항아리를 갖다 놓고 길가다가 목이 마른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물 기부를 한다. ‘기부는 남아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적더라도 기부를 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기부문화에 대한 설명을 했을 때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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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님 앞에서 팔짱끼고 있는 버마 어린이 사진을 보여 주면서 왜 이 아이가 팔짱을 끼고 있는 걸까 물어보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선생님한테 혼나서라고 답했다. 버마에서는 선생님이나 어른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이야기해야 예의 바른거라고 설명 해주자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한국에서는 그게 건방진 모습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를 교류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 어렵지 않았다. 왜냐면 아이들과 나는 이미 하나가 되어 가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버마에서 보내준 버마간식을 맛보라고 준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답게 버마간식을 맛있게 먹어 준다. 그리고 나는 준비해온 카드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림들이 들어 있는 카드들과 그림을 뜻하는 버마어가 적혀진 카드들을 맞춰보는 놀이다. 신기하게도 아이들 대부분이 엄마, 아빠, 선생님 그림이 있는 카드들과 그 뜻을 의미하는 버마어가 있는 카드들을 잘 맞춘다. 나는 여러 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카드놀이를 시킬 때마다 같은 경우를 보게 되어 늘 놀라워했다.

아이들과 나는 문화로 노래로 놀이로 음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서로 친해지고 정도 들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사이에 편견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자,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버마의 문화, 음식, 놀이 등을 많이 설명 해줬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손들어서 물어보세요.”라고 얘기를 한다. 아무도 손을 안 든 적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 대한 많이 궁금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이 틀려버렸기 때문에 좀 당황했다. 그래서 내가

“좋다, 그럼 선생님에 대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손들어 봐요.” 라고 얘기하자 아이들 거의 손을 들어

“선생님! 몇 살이에요? 애인 있어요? 첫사랑 이야기 해 주세요” 등등 나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둘씩 던져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면 아이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문화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해줘도 아이들에게 진짜 궁금한 것은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한국어를 하는 자신들과 친하게 노래하고 노는 아저씨가 누군지에 대해만 궁금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보다 다르게 생긴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울림을 통해 서로 간에 벽을 없앨 수 있다. 이미 아이들이 나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 머릿속 기억 속에 남을 것은 버마가 어떻게 생겼고 문화가 어쩌고 하는 것 보다 소모뚜라는 다르게 생긴 버마아저씨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문화보다 먼저 사람에게 집중 합시다”

아이들에게 얻은 교훈이다.

 

소모뚜

[이글은 한국장애인 재단 “세상을 여는 틈”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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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23:10 2011/06/21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