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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탄생했는가?

이 글은 트위터에 한 문단씩 나눠서 올린 것인데, 블로그에는 모아서 올려 놓는다.

 

이 글은 서동진이 최근에 책으로 낸 박사학위논문(책 제목: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에 대한 논평이다. 이 논평의 주 목적은 남은 ‘연구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서동진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서동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와 무관한 이야기를 했다. 서점에서 책을 훑어본 뒤 논문 초록을 읽었다. 내용은 1)국가인적자원개발이란 국가 담론 2)인적자원에 관한 경영 담론 3)자기계발이란 문화 담론 분석이다. 현실 분석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한국 사회에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등장한 것처럼 말한다. 담론(쉽게 말해 “이념적 주장”)이 곧 현실이라는 ‘망상’에 빠진 게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연구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책과 6년전 논문은 거의 똑같지만, 제목이 다르다. (논문-‘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자기계발 담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책-<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부제의 차이는 의미심장하다. 논문은 ‘담론 분석’이지 ‘현실 분석’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책의 부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은 마치 ‘현실 분석’인 것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는 책 관련 인터뷰에서도 이런 인상을 준다.

 

논문 초록은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체성의 변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호구성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에 관심을 둔다”고 밝혔지만, 실제론 담론만 분석했다. ‘담론’이 주체 형성의 ‘결과’를 낳았는지는 따로 검증할 문제다.

 

이미 주체가 형성된 것처럼 말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건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자기계발서를 본다는 사실, 앞다퉈 스펙을 쌓는다는 사실이 ‘새 주체 탄생’의 증거는 아니다. 이게 증거라면 논문까지 쓸 이유가 없잖은가?

 

서동진의 논문(과 책)이 말해주는 것은, 지난 20년동안 국가, 기업, 문화 세력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담론을 퍼뜨렸다는 것 그리고 이 담론이 유행한 것은 민주화가 가져온 ‘자유’와 이 담론이 공명한 탓이라는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이미 등장했다는 주장과 어긋나는 증거들은 실제로 있다. 이번에 나온 서강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청년백수와 자기계발’은 기업 요구에 맞추려다 우울증 앓는 부류, 적극적으로 자기계발하다가 좌절한 부류를 보여준다.

 

이 석사논문엔 자기계발 담론을 “상황 탈출”용으로 변형해 수용하는 이들도 나온다. 하고 싶은 일 위해 회사 그만두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프로그래머한테서도 확인된다. “자기계발=영어+전문지식 공부”로 보고 이를 통해 한국을 탈출하려는 것이다.

 

석사논문의 사례와 프로그래머 사례는, “자기계발 담론”이 먹히지 않는 “부분적인 증거”다.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 담론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그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를 탈출하는 데 이 담론을 이용하려 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강대 석사학위 논문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트위터 글 1 2) 트위터 글 2 3) 트위터 글 3

*프로그래머 사례는 곳곳에 있는데, 예컨대 자바서비스넷 같은 곳을 보라.

* 서동진의 논문 정보는 국립도서관에서 검색할 수 있다.

 

추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증하게 요약한 것이 이 글이다. 이 학자들의 문제 의식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아직 초고 수준이니, 인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2010/01/08 19:03 2010/01/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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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바른 껍데기

이 글은 한번에 140자씩만 쓸 수 있는 트위터에 올린 것이어서 아주 압축적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주절 주절 늘어놓는 것보다 이렇게 짧게 쓰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앞으로도 이렇게 한 문단을 140자 이내로 써볼까 싶다.

 

* ----- *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서점에서 훑었다. 20대를 위한 ‘시사적 수필’을 늙은(?) 사람이 진지하게 따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정도면 족할 것 같다. 시사 상식 없는 20대가 부담없이 읽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큰일 난다.

 

우석훈의 주장은 한마디로 “20대가 스스로 권리선언문을 만들고 그를 관철시키려 혁명을 꾀하라”는 것. 다만 이 혁명은 멋지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혁명이지, 구닥다리의 과격한 혁명이 아니다. 그건 ‘현실성’없단다! 그렇다고 치고, 진짜 문제는 알맹이다.

 

알맹이인 권리선언문은 없다. 그래도 4대 권리는 제시한다. 1.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유연성 있는 ‘노동권’ 2. 지하를 벗어나 햇볕보며 살게 해주는 ‘주거권’ 3. 문화 누리고 무상의료 받을 ‘복지권’ 4. 원대로 배울 수 있는 ‘교육권’.

 

우석훈은 이 엄청난(!) 4대 권리를 누리는 삶을 위해 싸우라고 한 뒤 “이 정도의 소박한 꿈도 혁명 없이 가능하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 명박 시대에 살고 있다”고 끝낸다. (‘명박 시대’는 구시대적 토건국가의 시대로 읽어줘야 옳다)

 

노동권, 주거권, 복지권, 교육권, 이건 사소한 게 아니다. 20대에게만 필요하거나 그들만 원하는 게 아님은 물론이고. ‘과격한 계급투쟁과 혁명’의 역사가 목표로 한 것도 이것이었다. 이것만 되면 대부분의 민중은 더 바라지도 않는다.

 

계급적 투사들이 목숨 걸고 싸웠는데도 안되는 건, 이게 ‘자본의 독재’가 깨지지 않는 한 절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걸 ‘코코 사넬의 혁명’처럼 멋지고 엣지있게 하라고 20대에게 말하다니, “불가능한 걸 요구하라”의 싸구려 변주인가?

 

<88만원 세대> 비판에 대해 공저자 박권일은 계급의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를 입혔다고 변명했지만, 그 속편의 단독 저자는 ‘당의’가 본질임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설탕 바른 껍데기’ 진짜로 믿다간 큰 코 다친다. 20대에게 전하고픈 내 진심이다.

 

2009/10/31 11:25 2009/10/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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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참고문헌 가이드

논문에서 남의 글을 인용하는 방식부터 참고문헌 표시하는 방식까지 luxnox님과 트위터로 나눈 이야기를 luxnox님이 정리해놨었는데, 최근 확인해보니 글의 링크가 깨졌다.

 

앞으로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기를 바라면서, “각주에서 시작해 하버드 레퍼런싱까지”라는 제목의 luxnox님 글을 검색을 통해 찾은 뒤 내가 쓴 내용들만 아래에 정리해둔다.

 

-- 각주에서 시작해 하버드 레퍼런싱까지 --

 

- ‘인용은 꼭 필요한 경우만 하고 주를 남발하는 건 좋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겁니다. ‘남의 것’은 필히 인용 표시 해야 하고, 직·간접 상관없이 인용했으면 주석 달아야 합니다. 안하면 무조건 ‘표절’

 

-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면, 따옴표 쳐서 인용하는 것만 인용이 아닙니다. 바꿔서 표현하기(paraphrase)와 주장 요약하기(summary)도 따옴표 친 것과 마찬가지로 인용(간접인용)입니다. 이 경우도 주석 없으면 표절.

 

- 주장 자체가 남의 것이면 누구 것을 요약했는지 밝히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번째, “우선은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라”는 말이어도 곤란합니다. 논문을 그렇게 쓰면 논문이 아니라 잡설이죠. 필연적으로 논문은 이전 연구들을 전제로 한 것.

 

- 제가 ‘주석’이라고 칭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참조문헌 표시’(영어로 referencing)입니다.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히는 것을 총칭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논문에서는 미주, 각주 처리를 잘 안합니다. 하버드 레퍼런싱 방식을 많이 씁니다.

 

* Harvard Referencing Guide [ 영문 PDF 파일 ]

* 영국대학에서 낸 비슷한 버전 하나 추가 [ 역시 영문 PDF 파일 ]

2009/10/14 09:33 2009/10/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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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