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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비판에 얽힌 두가지 태도

대학원 2학기가 시작됐다. 1월말부터 5월초까지가 2학기다. 3월15일부터 4월13일까지 거의 한달동안 부활절 휴가 기간이 있어서, 실제로는 두달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

 

1학기에는 전공 필수 과목 외에 '프로파간다' 강의를 선택 과목으로 들었는데, 2학기에는 '언론 비판' 강의를 선택했다. 대학원 과정에 처음 개설된 과목이다. 주류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나로서는 흥미있는 과목인데, 언론인 경험이 있는 미합중국인 학자(크리스 패터슨)와 영국인 학자(폴 테일러)가 나눠서 강의를 맡는다. 미합중국인 학자는 국제 커뮤니케이션 전공 책임자(학과장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고 영국인 학자는 이 사람보다 학과내 위치가 불안한 사람이다. (강사격이라고 할까?)

 

이 수업에 배정된 강의실을 보니 꽤 큰 강의실이었다. 그래서 이 강의가 꽤 인기가 있는 줄 알았다. (이 강의의 대상 학생들은 4개 세부 전공 곧 커뮤니케이션학, 국제 커뮤니케이션, 정치 커뮤니케이션, 국제 저널리즘 전공자들이고 숫자로는 대략 120명쯤이다. 대다수는 외국인 학생이다. 내 전공인 국제 커뮤니케이션에는 영국 학생이 딱 한명이다.)

 

하지만 막상 첫 강의를 들어가보니, 수업 들으러 온 학생이 20명이 안됐다. 결석한 학생까지 해도 20명을 많이 넘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두 학자가 야심차게 새로 시작한 강의가 정원 미달로 폐강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수강 신청자가 적어서 폐강된 과목이 이번 학기에 하나 있다.)

 

이 수업이 개설된 과정에 대해 미합중국인 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과목 아이디어는 테일러가 냈다. 그가 내게 제안을 해서 학교에 개설을 신청했는데, 놀랍게도 받아들여졌다. 마지못해 받아들여줬지만.”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영국인 학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과격한 사람이어서 혼자 강의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패터슨에게 제안을 했다. 과격한 내 강의 내용을 패터슨의 강의가 보완해줄 것이다.”

 

이 영국인 학자는 수업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말을 했다. 그로서는 이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주 기분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언론에 대해 노엄 촘스키 같은 인물들과 비슷한 강도로 비판하는 학자인 그로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니 말이다. (언론학자들은 어디나 대체로 언론인들에 비판적이다. 영국 언론학자들도 비슷하고, 내가 다니는 리즈대학 언론학 분위기도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막상 몇개월동안 받은 인상은 아주 심하게 비판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미합중국 언론에 대해서는 꽤 비판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냉소적이다'.)

 

아무튼 이 영국인 학자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학생들에게 국적을 차례차례 묻더니,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페퍼민트 캔디'라고 하길래, 왜 갑자기 사탕 이야긴가 했다.) 좋은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영화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런데 이 학자가 한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 그건 지젝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두시간 동안, 사실 두 학자가 절반씩 말을 했으니 정확하게는 한시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여러번 지젝을 입에 올리는지... 나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인기인' 지젝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개인이 싫은 게 아니라 그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젝은 정확한 사실, 구체적인 내용을 철저히 파헤지는 걸 강조하는 촘스키 같은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은 비판을 한다. “촘스키가 미 중앙정보국의 니카라과 개입을 분석한 책을 봅시다. 많은 세부 사항들을 알려주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게 있나요? 극적으로 새로운 걸 얻은 게 없습니다.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진정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로 된 인터뷰 원문)

 

(“근본적으로 새로운 게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이미 몇천년전 이스라엘왕 솔로몬이 확실한 답을 줬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지젝은 아무래도 성경 읽을 시간이 없었나보다!)

 

나는 이것만큼 멍청한 생각이 없다고 본다. 진짜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출발하는 진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언론을 논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미합중국 언론이 이라크 침공을 위해 온갖 거짓말을 퍼뜨린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고 정부의 나팔수 구실을 한 사실은 철저하고 세세하게 까발리고 분석해야 한다. 이 작업이 첫번째 작업이고 이것이 없이는 그 어떤 '언론 비판'도 유식한 인물들의 냉소적인 자기만족에 그치게 된다.

 

지젝 같은 얼치기 '대중 스타'가 절대로 촘스키를 따라갈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의 힘이다. 촘스키의 현실 비판을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실에 대한 해박함이다. 역사적인 사실부터 현대의 구체적인 국제 분쟁 관련 사실까지 그는 철저히 챙기고 그걸 근거로 삼아 비판하는 인물이다. 골방에 처박혀 할리우드 영화를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본다고 이런 힘이 나오는 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중세 유명론자 '얼간이 둔스 스코투스'의 후예라고 한 테리 이글턴의 말이 딱 맞는 소리다. (Terry Eagleton, 'On Telling The Truth', 소셜리스트레지스터 2006년호, 273쪽.)

 

대학원 수업 이야기가 지젝 이이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언론 비판에서 '사실'(fact)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이 사실은 진실과 어떤 관계인가,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에 관한 두가지 태도 곧 촘스키가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지젝이 '순진하게'(그는 “나이브하게 말하자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했다. 나이브하지 않게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말장난 수준의 수사학을 구사한 것이다.) 대변하는 태도를 따져보는 것이, 2학기에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이다.

2008/01/30 10:41 2008/01/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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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도 윤리는 있다

번역은 내 주요 관심사다. 내가 처음 번역을 시작한 것은, 개인 홈페이지가 유행이던 시절인 1998년쯤(정확한 때는 기억이 안 난다) 엉겁결에 만든 '밑에서 본 세상'에 뭔가 채워 넣을 게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번역서들이 워낙 엉망이니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었고, 그렇게 몇번 하다보니 '번역이야말로 내가 공공을 위한 봉사 차원에서 할 적합한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10년이 넘었다. (책으로 내놓은 것은 2000년이 처음이니 공식적으로는 8년이 넘은 셈이다.) 지금은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훨씬 크지만 정말 하기 싫어질 때는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팔자'려니 한다. (번역료를 생각하면 번역은 정말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못 할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번역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로, 아무리 마음에 들고 번역하고 싶은 책이어도 자신의 처지 또는 입지를 생각해서 손을 데서는 안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 같은 사람이 본격적인 철학책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면 안된다. 소설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로 안 될 일이리라.

 

두번째로, 번역하는 자세에도 윤리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조금 더 기술적이고 미묘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읽기 편하게 이른바 '의역'을 하더라도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이 있다. 할 수 있는 한 원문을 최대한 충실히 옮기는 것이 번역자의 첫번째 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하나, 원 저작의 의미나 성격을 훼손하는 번역 출판에 번역자로 동원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심각하고 진지한 책을 논술 교재처럼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번역서의 성격이 애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진 것을 출판 직전에 알고 몇개월동안 고생한 결과를 허공으로 날린 경험이 있다.)

 

한국의 출판 현실에서 두번째 부분은 기대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오역으로 가득한 번역물이 산처럼 쌓이는 게 현실인데, '원문에 충실하라.'거나 '원서의 의미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 따위는 사치스런 주장이다. 그저 눈에 띄는 오역이나 많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도 첫번째 부분은 지켜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번역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관련 분야에 최소한의 지식은 있는 사람에게 번역을 맡겨야 한다. 그런데 이젠 이런 최소한의 윤리도 실종된 것 같다.

 

알라딘 서점에서 어떤 책의 저자와 역자 소개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저자는 “루이 알튀세의 수제자”이고 “파리 8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것이다. 그러니 책은 철학서인 셈이고 원문은 프랑스어다. 번역하기 가장 까다로운 두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책이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어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분야가 없는데, 게다가 철학자이니 이건 정말 '최악'이다.

 

그런데 역자는 “1999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2001-2002년 OO증권에 근무했으며”, “200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주식투자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알라딘 검색 결과로는 이번이 두번째 번역서다.)

 

이 번역자의 첫번째 번역서는 주식에 관한 것이었으니 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맡지 않았어야 했다. 번역 경험도 많지 않은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가 쓴 책이라니, 이건 무모한 수준을 넘는다. 윤리 문제다. 이 번역자가 프랑스어를 잘 할 수도 있고, 주식투자를 연구하는 틈틈이 철학을 많이 공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보다 더 프랑스어 번역 경험이 많고 철학도 더 많이 공부했을 번역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정상이다. (외국어를 잘 하는 것과 그 외국어 번역을 잘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건, 번역을 해보면 절감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출판사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마땅한 번역자를 구하기 힘들다고 해도,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나도 한 1년전쯤 한국 출판 현실을 절감할 충격적인 경험을 했지만, 한국 출판사들의 의식이 이 정도까지 왔다니 참으로 걱정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배경 지식과 언어 실력을 갖춘 성실하되 소심한 번역자, 번역자의 글을 분별할 정도의 배경 지식과 언어 실력을 갖춘 꼼꼼한 편집자, 책과 번역 활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예의를 갖춘 출판사, 이 3자의 결합은 한국에서는 정녕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꿈'인가?

2008/01/23 02:45 2008/01/23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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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질과 퍼머넌트 링크

블로그의 개별 글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주소를 갖고 있다. 이를 영어로는 퍼머넌트 링크라고 한다. 퍼머넌트 곧 결코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블로그에서 퍼머넌트 링크는 퍼머넌트와 거리가 멀다. (외국은 어떤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내 관심사가 아니니까.) 이른바 '파워 블로거'라는 사람들도 이에 대한 인식이 약한 것 같다.

 

오늘 우연히 내가 2005년 12월에 쓴 글을 찾아봤다가 링크가 있길래 눌렀다. 글이 없다고 나온다. 잠깐 뒤져보니 글은 보존되어 있었지만, 주소가 바뀌었다. 이른바 '파워 블로그'로 분류할 수 있는 곳인데도 그랬다. '퍼머넌트 링크'라고 해놓고 바꾸면 어쩌나? 이래서는 퍼머넌트 링크라는 게 무의미하다. 장식품일 뿐이다. (재미 있는 것은 주소의 끝이 post_190.html에서 post-192.html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숫자까지 바뀌는 것일까?)

 

상황이 이래서는 링크로 처리하기 불안하다. 펌질 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정보라면 퍼다놓는 게 안전하겠다. 일일이 바뀌는 링크 확인하고 그 때마다 주소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펌질 하는 사람 욕하기 전에, 퍼머넌트 링크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건 비단 블로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문사 사이트부터 각종 게시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인터넷 사이트들이 시시때때로 바뀌고 사라진다. 인터넷 주소, 결코 못 믿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대다수의 정보는 대단한 자료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의 순간의 기록이 그렇게 가치가 없는 것인가? 게시판에서 싸우고 떠든 기록은 조금 지나면 무의미해지는가? 거창한 글만, 유명 인사의 글만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이 나중에는 중요한 정보가 된다. 생활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에게도 무시당한다. 자신도 무시하는 삶을 누가 존중해주겠나?

 

블로그에 큰 의미를 두는 이른바 '파워 블로거'들이라면 이는 더욱 중요할 것이다. 한번 정해진 퍼머넌트 링크를 잘 지키는 데는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다. 아니 게으를수록 더 잘 지킬 수 있다. 다른 것은 바꿔도 주소는 바꾸지 말아야 한다. 너무 부지런해서 탈이다.

 

블로그 주인장 혼자의 힘으로 주소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글루스가, 티스토리가, 포탈의 블로그가 문 닫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이른바 '설치형' 블로그를 써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주소를 지키고, 만일에 대비해서 글들을 따로 저장해두는 노력쯤은 할 수 있다.

 

당신이 존중받는 길 가운데 하나는 당신이 자기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의 글을 소중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2008/01/16 00:32 2008/01/16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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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