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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아쉬운 사람이 거칠게 판 우물

여러분은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아는가?

영어를 들먹여 좀 그렇긴 하지만, 영어로 ‘안다’는 것을 'I see'라고 한다. 즉 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보고, 접하고, 그래서 경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전체 인구의 1/10이 장애인이라고 하지만 비장애인들은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거리와 극장과 시장에서 장애인을 거의 접하지 못한다. 여전히 수많은 장애인들이 시설과 집안에 갇힌 채, 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배제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애에 대해 제대로 알 턱이 없고, 알 기회도 없고, 굳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일상 속에서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비장애중심적 이데올로기는 장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가로막고 있으며, 신문·TV·인터넷 등을 통해 투사되는 장애의 이미지는 대부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데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부는 모든 대상과 가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어 장애의 본질을 개인이 지닌 육체적·정신적 손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주류적 관점을 비판하고, ‘장애’라는 것 역시 사회적 환경과 맥락 속에서 규정되는 것임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장애를 둘러싼 여러 용어들에 각인되어 있는 관력 관계와 정치적 함의들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장애’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인 것임을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이 장애에 대한 억압을 어떻게 심화시켜 왔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일상의 모든 문제에 있어 성 인지적性 認知的 관점이 필요하듯이 장애 인지적 관점이 매우 절실함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시설문제와 자립생활, 농 문화 등 구체적인 권리와 의제를 매개로 다양한 얘기를 풀어냄으로써 장애 문제 및 장애인 운동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가능케 하고자 하였다. 장애인의 구체적인 권리와 삶이 어떠한 현실에 처해 있는지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조건을 설명하고, 장애인 운동 안팎의 쟁점을 드러내며, 향후 어떠한 전망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능한 수준에서 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장애 여성과 장애인의 성 문제 등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비장애 남성인 필자가 감히 다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한계에 부딪쳐 불가피하게 포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삶의 경험이 녹아든 다른 텍스트들을 참조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일반적으로 소수자 그룹 내에서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는 모든 단체들(소위 NGO)이 대사회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으로 취급되고 인정된다. 시민운동 일반에 있어서도 자본과 정치권력에 포섭된 많은 단체들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돕고, 오히려 대중적 저항을 조절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장애인계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여 법인화된 대다수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 대중의 저항을 착취하며 생존하는 소위 ‘운동 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3부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장애인 운동이 아니라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왜 필요하며 그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떤 지향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풀어놓았다. 그리고 장애인 운동을 바라보는 다른 사회 운동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관점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서술하였다.

멕시코 치아파스 한 여성 원주민의 말처럼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래서 장애인 운동과 다른 진보적 사회 운동 간의 진정한 연대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족이 될지 모르겠지만, 모든 면에서 부족한 현장 활동가인 필자가 이러한 책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얼마간의 변명을 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장애인 운동에 몸을 담은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대학생이었던 1996년 말, 평택의 에바다복지회에서 발생한 끔찍한 인권 유린과 시설 비리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 뒤 장애 대중이 처한 열악한 삶의 현실을 절박하고도 유일한 근거로 운동을 해왔지만, 나와 주변의 활동가들은 늘 일정한 공백과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장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주체들이 그러한 고민을 발전시키거나, 사회 구성원들이 장애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과학적 이론과 담론이 장애인 운동 내에서 실질적으로 부재했기 때문이다. 장애인 운동은 대중 운동의 영역에서도 이론적 실천의 영역에서도 주변화 되어 있었고, 실제로 장애인 운동에 개입하고 있는 국내의 진보적 학자나 연구 그룹은 아직까지도 거의 전무한 상황에 있다. 결국 이 책은 아쉬운 사람이 거칠게 파 놓은, 좁고 빈약하며 불투명한 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 그래서 장애 문제를 거의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점과 고민을 던져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거리에서 자신의 삶을 걸고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는 장애 대중과 활동가들에게는 술 한 잔하며 이야기 나눌 때, 좋은 안주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며 이론적 실천을 수행하고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장애 문제에 개입하여 연구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자극제가 되기를 바란다.

이 부족한 글들은 도서출판 메이데이의 적극적인 기획과 제안이 없었다면 하나의 단행본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메이데이의 박성인 대표님과 부족한 원고를 직접 다듬고 함께 토론해 준 김영선 편집장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07년 3월, 사직동 사무실에서
김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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