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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가벼운 책이 좋아

가벼운 책이 좋아

책은 미모·신국판 단행본? 종이는 가벼워지고 크기는 작아지고 문고본이 자란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두꺼운 책을 힘껏 들었다가 삐끗한다. 양장본에 한참이나 두꺼운데 가벼워서다. 아담한 사이즈의 책들이 지하철에 앉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다. 부랴부랴 내리는 여성 한 명이 책을 집어넣는 곳은 핸드백. 쏙 삼켜진다. 책이 가벼워지고 있다. 비유가 아닌 실제 ‘물리’적인 변화다. 책들은 현재 ‘가벼운 혁명 중’이다.

 

까칠까칠한 이라이트의 등장


△ ‘단행본 판형’ 신국판형의 비율이 2004년 30.92%에서 2007년 22.96%로 낮아졌다. 교보문고 ‘독자에게 사랑받는 책’ 행사 매대에 놓인 거의 모든 책들의 크기가 작다.

 

 

 

혁명의 첫 번째 주역은 종이다. 2003년 9월 ‘미색모조’(미모)가 장악한 시장에 변화가 왔다. 한국노스케스코크가 자체 개발한 이라이트지를 선보인 것이다. 매끈한 미모에 비해 이라이트는 거친 재생지의 느낌을 준다. 이라이트를 본 독자의 첫인상은 까칠했다. 2004년 4월 출판사 황금가지가 처음 〈오늘의 SF걸작선〉에 이라이트를 썼을 때의 일이다. 책을 펴낸 뒤 “종이가 왜 이러냐. 이윤을 많이 남기려고 싼 종이를 쓴 것 아니냐”는 항의성 문의 전화가 많았다. 현재 ‘밀리언셀러 클럽’ 전 종에 이라이트를 사용하는데 오해를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안내 문구를 삽입한다. “이 책에 쓰인 본문 종이 이라이트는 국내 기술로 개발된 최신 종이로, 기존의 모조지나 서적지보다 더욱 가볍고 안전하며 눈의 피로를 덜게끔 한 단계 품질을 높인 고급지입니다.” 오해와 달리 이라이트지는 미모와 비슷한 가격대다.

‘첫인상’은 까칠했으나 이라이트의 성장은 가팔랐다. 2003년 9월에서 12월까지 400t을 생산했는데(1년 생산량으로 환산하면 1200t) 2007년 예상 생산량은 1만t이다. 현재 계성제지에서도 비슷한 종류인 ‘하이벌키지’를 생산하고 있다. 이라이트지는 재생지는 아니다. 하지만 ‘덜 환경파괴적’이다. 미모는 화학펄프, 이라이트는 기계펄프에서 만들어지는데, 화학펄프는 원목을 가공한 것이고 기계펄프는 나무의 부스러기들을 활용해 만든다. 한국케스코스의 김종표 과장은 “일부러 소나무를 베어내지는 않는다. 버리는 소나무가 쓰인다”고 말한다. 한국케스코스는 재생펄프를 사용한 그린라이트지를 개발했다. 이라이트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해리 포터’ 완결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도>(문학수첩)가 이 종이로 찍는 첫 번째 작품이 될 예정이다.

한 문학 출판사의 편집자는 “문학성 높은 책은 여전히 미모가 친숙하다. 양장본의 경우에도 미모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고자 하는 경우는 이라이트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가 최근 편집한 문학 출판물 10권 중 4권에 이라이트가 사용됐다. 장르소설로 가면 이라이트의 힘은 가볍지 않다. 장르소설을 주로 출판하는 황금가지는 거의 모든 책을 이라이트로 제작한다. 편집자 장성주씨는 “밀리언셀러클럽 콘셉트가 전세계 판매가 많은 읽기 쉬운 책이라,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편하고, 접근하기 쉬운 편의성을 높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황금가지의 모회사 민음사도 2004년 7월부터 ‘세계명작전집’을 이라이트로 제작하고 있다.


△ ‘작은 탐닉 시리즈’(위)는 손바닥에 아담하게 들어온다.

 

 

이라이트의 선호에는 적은 원고량으로도 책을 만드는 경향도 한몫한다. 한 편집자는 “10년 전에는 단행본에 1천 매가 기본이었다. 요즘에는 500매로도 충분히 책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한 출판사의 제작부장은 “페이지가 안 나오는 책의 경우 이라이트를 선택한다. 200페이지의 책은 미모로 하면 두께가 볼품 없다. 100페이지 조금 넘는 것도 미모로 하면 꽤 있어 보인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라이트지가 미모보다 1.34배 부피감이 있다. 200페이지 책에 이라이트를 쓰면 미모 268페이지짜리 책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소녀적 감성의 ‘팬시’ 상품들

 

10년 전이라면 가벼운 종이에 대한 거부감은 훨씬 컸을 것이다. 제지사와 함께 ‘M매트’라는 ‘한국형 아트지’를 만들기도 한 이레출판사의 고석 사장은 ‘무거운 종이 시장’이 꽤나 완고했다고 말한다. “외국에 나가서 책을 살펴보면 두꺼운 책도 무겁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는 고급지, 무거운 종이 시장만 존재했다. 10년 전 제지사를 방문했을 때 기술진들이 한국 사람들이 워낙 무거운 것을 좋아해 종이에 돌가루를 섞는다고 하더라. 가벼운 종이를 쓰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제 외국 책을 접한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가벼운 책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제지회사에서 섞는다는 돌가루는 석회(탄산칼슘)인데 되비침을 방지하기 위해서 넣는다. 한국노스케스코크의 김종표 과장은 고급지 시장은 일본 출판시장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한국 출판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곳이 일본이다. 일본은 고급 백상지를 선호한다. 고 사장은 가벼운 책들이 나오는 것이 반갑다. 천편일률적인 시장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제작 방법을 다양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 있다.”

책의 크기도 가벼워지고 있다. 알라딘에 등록된 문학 서적을 대상으로 크기 변화를 추적해보았다.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소설에서 신국판의 비율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다(표 참조).


 

‘단행본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신국판은 가로 153mm, 세로 210mm 크기 판형이다. 신국판이 줄어든다는 것은 새로운 판형을 찾아 고민을 하는 출판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흔적이다.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예전에는 신국에서 위를 자르고 아래를 자르는 식으로 변화시키다가 최근에는 획기적인 판형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누가 보고 누가 좋아하는가라는 판단을 하고 적당한 물성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작은 판형 양장’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서 맨 처음 시도됐다. 1999년이다. 아담한 크기의 <키친>은 센세이션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후 여성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 야마모토 후미오, 가와카미 히로미 등 일본 여성 작가의 작품은 이 공식을 따랐다. 2006년 2월 <플라이 대디 플라이> 등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이 일러스트레이션을 표지로 하여 새 단장을 하고 나왔다. 아담한 크기의 양장에 ‘일러스트 표지’라는 공식이 추가된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여성 소설 작가의 책들도 이 경향을 따르고 있다. 최근 문학과지성사는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국판·양장·일러스트레이션 표지로 펴냈다.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이런 경향이 전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소설에서 여성 독자들의 영향이 강하다. 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만화적, 소녀적 감성을 담은 ‘팬시’한 제품들이 만들어졌다. 비주얼한 책들도 최근에는 작은 책이 많아졌다. 여행에세이, 사진집 같은 경우도 예전에는 사진을 시원하게 썼던 반면 최근에는 아담한 판형으로 바뀌었다.”


△ 살림지식총서는 만 3년을 조금 넘겨 300권을 발간했다. 책세상문고와 함께 문고본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인문학의 보루, ‘개똥철학’ 시장

 

전형적인 신국판 책 ‘인문서’도 작아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문고본 시장이다. 유일한 ‘문고본’ 책세상우리문고에 살림지식총서가 추가돼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살림지식총서는 2003년 6월에 나와 만 3년 만인 올 9월 300권을 넘어섰다. 예전의 문고본이 선진국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가져오는 ‘종속형’이었다면 새로운 문고본들은 한국적 기획과 저자들이 세운 ‘독립형’이다. 2004년부터 나온 서해문집의 ‘서해 역사문고’은 역사 문고본이다. 200페이지 내외에 역사 속 여성, 동학농민전쟁 등을 담았다. 2006년 11월 시작된 김영사의 지식인마을도 국내 저자가 철학자들을 짝지워 철학을 재해석해서 들려준다. 그외에도 ‘인문학’을 주제로 ‘작은 책 시리즈’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이후의 ‘No-Nonsense 시리즈’, 웅진지식하우스의 ‘고정관념Q 시리즈’, 프로네시스의 ‘지식전람회’ 등이 있다.

‘고정관념Q 시리즈’를 펴낸 김수한 편집주간은 “공부 모임이 활발하고 인문학 강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직장인들에게 자기계발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는 것을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설명한다. 인문학 강좌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작은책 교양강좌, 문지문화원 사이, 갈무리출판사 다중지성의 정원 등 인문학 강연 등이 활발하다. 김 편집주간은 “수강자들도 30, 40대가 많다. 강연의 주제가 20대 여성을 대상으로 짜였다면 이제는 조금씩 옮겨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른바 ‘개똥철학’ 시장이다. 전문적인 거 말고 압축된 지식으로 소화하고, 발빠르게 필요한 것을 찾는 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김영사의 ‘표정있는 역사’ 시리즈는 구체적이고 작은 소재로 글쓰기를 하고 비주얼한 면도 포기하지 않는 ‘한국형 문고본’이다.

 

 

살림지식총서를 편집하고 있는 정회엽씨도 독자층이 다변화된 것에 놀랐다. “주 독자층이 대학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서점 등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30~40대 등에서 고루 사랑받는다. 시대의 변화를 읽기 위한 욕구에는 세대의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그는 “인문서가 잘 안 팔린다. 하지만 인문교양의 수요는 분명히 성장할 것이라고 기획 단계에서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얇고 가볍고 싸고 쉬운 시리즈였다”고 살림지식총서 기획의 변을 밝혔다.

작은 책들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성격은 작은 판형에 컬러풀한 이미지를 담는 것이다. ‘좀 일찍 나온’ 김영사의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한미화씨는 이런 책의 특성이 ‘한국화된 문고본’인 듯하다고 말한다. “문고를 만들 때는 포기할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런 문고본은 포기하는 것 없이 디자인 요소도 많이 넣어서 만든다. 정보를 압축하되 멀티하고 비주얼하게 맞춰준다.”

김영사 ‘표정 있는 역사’ 시리즈는 4도 인쇄에 200페이지 내외인데,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가격’인 1만원 이하에 팔리고 있다. <왕을 낳은 후궁들>까지 현재까지 8권이 나왔다. 원고 분량이 700~800매이고 비주얼이 강하고 아이템 하나로 승부할 수 있는 것을 다루려고 했다. 김영사 편집부는 “오랜 연구 끝에 나오는 역사 단행본은 꼭 필요하지만, 시장에서는 양날의 칼이다. 공은 많이 드는데, 어려워지니까 독자들은 많이 찾지 않는다. 역사 연구자들이 기존의 연구를 모아서 대중들의 구미에 맞게 가공해 빠르게 집필하면서 대중들은 많이 찾는다”고 말한다.

 

구체적이고 작은 소재들

 

역사를 다루지만 소재들은 구체적이고 작아진다. 다른 분야에도 ‘작은 구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작은 탐닉 시리즈’(갤리온)는 새로운 전형이다.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에서 시작해 최근의 <나는 바닥에 탐닉한다>까지 장난감, 아이디어 물건 등 도저히 한 권으로 묶여 나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나는 와인에 탐닉한다>의 경우에는 와인 테이스터의 ‘테이스팅 노트’를 모았다. 300페이지를 넘는 책이 있지만, 대부분 200페이지 내외다. ‘작은 탐닉 시리즈’를 편집하는 pippul의 박선영 편집장은 “마니아는 베스트셀러 아이템도 트렌디한 아이템도 아니었다. 특히 저자들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세계를 파고드는 사람들이다. 손익분기점은 신경쓰지 않고 재밌는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다. 만들어보고 싶었던 책이라는 말을 편집자들에게서 많이 들었다”고 한다.

책이 가벼워지는 것은 ‘책이 다양화되고 있다’의 다른 표현이다. 출판계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신국의 미모, 240페이지 전후. 당신이 책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가볍게 사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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