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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이광일

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

 

이광일

2009.06.26.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진한 제가 일곡학술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먼저 송구스러움을 느낍니다. 맑스주의의 이론, 실천과 관련하여 저는 여전히 말단에서 여러 활동가들, 선생님들과 동료들의 뒤를 보고 그것을 쫒아가기도 힘든 일개 학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일곡선생님을 기억할 때, 이 상은 저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하나는 일곡선생님이 제가 배움의 초입 시절에 한국경제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중요한 텍스트의 저자이셨고 행동하는 지성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록 학문의 분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런 구분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는 ‘통섭의 시대’임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선생님은 오늘의 저를 구성하는 중요한 자양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은 제가 일곡선생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잇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 징표라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등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던 때 저는 아직 어리고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기에 ‘아!, 돌아가셨구나.’라는 추모의 마음만을 간직하였을 뿐, 직접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사후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지만, 이 상은 늦게나마 제가 일곡선생님과 공식 대면하여 다시 한 번 당신의 뜻을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일곡기념사업회, 맑스코뮤날레, 그리고 일곡학술상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이 책을 온전히 내주신 메이데이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은 맑스주의들의 흐름 위에 있던 이 땅의 좌파들이 한편으로 수구,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배제, 억압과 대결하면서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에 대한 대강의 기록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지금도 그러한 과제의 실현을 위해 땀 흘려 실천하시는 모든 분들의 직간접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 좌파가 민중지향성을 지닌 ‘비판적 자유주의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반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좌파의 언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지난 시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헌신적인 삶의 궤적을 기록해 온 세력이 바로 좌파라는,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좌파에 대해 온갖 데마고기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도 자본과 권력에 눌린 자들의 옆에 항상 ‘좌파’가 함께 숨 쉬고 있는 현실은 이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계와 오류를 포함한 궤적은 대중적으로 온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좌파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 대한 연구의 빈곤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좌파와 대중의 교감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지금의 이 현실입니다. 수구정치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타협체인 ‘87년 체제’의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로의 전환, 즉 비판적 자유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좌파로의 전향을 핵심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97년 체제’로의 변형이후 아쉽게도 좌파는 이에 대응한 효과적인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자유주의경쟁국가는 이 사회엔 신자유주의 이외에 그 어떤 사회조직원리도, 규범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좋든 싫든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단언, 강제합니다. 신자유주의에는 그 어떤 외부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윤실현을 위한 경쟁력 제고의 과정에서 말라버린 대중은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죽거나 나쁘거나”라는 가장 극단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나마 그들의 고통에 찬 단발마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경찰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신자유주의연합’과 ‘반수구연합’ 사이를 진자운동해 왔던 그 동안의 논의와 실천은 급진적으로 재전유되기보다 오히려 이명박정권 등장이후에는 ‘97년 체제’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발상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과거 신자유주의좌파정권의 지배 아래에서의 삶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우파정권 아래에서의 삶보다 더 낫지 않는가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금 ‘추모정국’을 관통하며 공공연하게 운위되고 있는 유력한 ‘정치적 대안’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이러한 언술은 한편으로 ‘97년 체제’의 등장이 노동자, 농민 등 착취, 억압받는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추모정국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추모정국은 최소한 5.18민중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이들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학살된 사건, 즉 용산에서 ‘벌거벗겨진 주권자들’이 불에 타 숨진 150 여일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그러한 언술은 ‘97년 체제’의 등장이후 남북한 사이의 조성된 평화공존에만 눈을 돌리며 그 성과를 자화자찬할 뿐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사회관계들, 그로 인한 모순과 긴장의 증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국가 간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그들은 지난 집권 10년 동안 자신들이 이 땅에 심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반인간적인, 반평화적인 것이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북정책에 대해 수구세력이 ‘퍼주기정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정당한 통치행위였다고 옹호하거나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반박하고자 하였을 뿐 왜 대중이 그러한 언술에 귀를 쫑긋하게 되었는지 민감하게 고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97년 체제’, 즉 신자유주의체제를 필요에 따라 선택, 혹은 폐기 가능한 그 어떤 하나의 정책쯤으로 인식하는 그들은 기껏해야 그것의 폐해를 단지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도로 이해할 뿐입니다. 물론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대중을 지배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것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동일성’, 즉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파괴라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설사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얼마나 반민주주의적인 것인지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그들의 정신분열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신자유주의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대응시키는 논리와 발상이 적지 않은 지금의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전선’과 ‘민주주의전선’이라는 이중의 전선에 대한 논의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러한 담론은 마치 신자유주의 외부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신자유주의 외부에 정치가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들의 인식틀을 공유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가 저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대중적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신자주유주의를 효율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게 한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내세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지난 집권의 역사가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좌파는 그 자신의 정치적 언어와 틀을 조탁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것들을 대중적으로 교호하며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기제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도와 비제도,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관통하는 민주주의의 기제들, 따라서 코뮨적 기제들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다시 한 번 냉정히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엄혹한 상황의 도래에 대해 책임져야 할 세력이 저들이 아니라 바로 좌파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그들과 달리 좌파는 비대칭적이기에 부당한 기존의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온존, 혹은 뒤로 돌리려는 세력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고자 가장 앞에서 싸우는 세력이기에 그렇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책임성은 지금 이 사회에서 ‘좌파’를 상징하는 대중적 정치세력이 역사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간주되어 온 ‘개혁자유주의세력’이라는 점에 의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무슨 그들이 좌파야’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입니다. 수구세력들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틀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정치세력은 수구파시스트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틀의 피해자인 듯 보이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최고의 수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대안세력’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절박한 듯 보이지만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틀이 좌파에 대한 최고의 조롱이자 부정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현존하지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적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민주주의세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좌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사회의 상이한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맑스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노동해방의 주역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배제, 억압, 약탈당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 자연 및 생태 그 자체라는 점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스스로 좌파라고 자임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맑스주의자,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재화로는 그 어떤 진보세력들, 대중들과도 이론적, 실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을 넘어 나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갇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기존의 여러 사회정치세력들이 맑스주의에 투사하고 있는 ‘그 어떤 고정된 모습’을 스스로 깨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할 맑스주의의 힘이자 그 실천정치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 생태, 여성, 소수자, 평화 등이 자기 스스로를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문제의 근인을 타자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답하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계속 지워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하는 맑스주의의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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