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성평등 교육을 받으며

어제는 지구당에서 성평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육에 참여하셨던 분들도 그러셨겠지만 저 자신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집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회에서, 테레비에서, 직장에서 성평등 교육이란 거 받아 보신 일 있나요?

평등.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짧은 인생,
죽음의 순간에 돌아본 나의 과거가 성을 미끼로, 돈을 미끼로, 권력을 미끼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억압 했던 것으로 가득 찼다면 눈을 감는 순간 삶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평등.
꿈이 같다는 말이 아닐까요?
내가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다른 이들로부터 내가 존중 받고 싶다는...

내가 존중 받으려면 당연히 다른 이들을 존중해야 하겠죠.
내가 굶주리지 않길 원한다면 다른 이들의 굶주림의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고,
내가 폭력이 방치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이들이 폭행 당할 때 나서야 할 것이고,
내가 차별 받지 않고 싶다면 다른 이들이 차별 받지 않도록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자식만 귀하다고 좋은 것 먹이고, 좋은 대학 보내는데만 마음이 팔려 있다면,
행여 그 아이가 거리에서 사고로 피를 흘리고 있다고 해서 누구 하나 거들떠 보겠습니까?
‘내가 알게 뭐야. 내 새끼도 아닌데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노동자로써 자본가들에게 차별 받는 것에 대해서만 투쟁을 하면서 다른 노동자들과 여성들을 차별한다면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이 아무리 권력과 자본에 대항해 싸운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아냥 거릴 것입니다.
‘배부른 것들이 또 저 지랄이야. 저거는 다른 노동자들에 대해서 무관심 하더니…’

내가 여성으로써 평등명절과 남녀평등을 주장할 줄만 알았지 굶주리는 자식을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어야 하는 어미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평등은 반쪽짜리 평등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희는 불평등 하지만 명절을 지낼 수나 있잖아. 우리 아이는 이렇게 먹지 못해 눈빛이 희미해져 가는데…’


두더지 게임 아시죠? 망치를 들고 올라오는 두더지 머리를 때려서 집어 넣는…
지배하는 이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머리를 쳐드는 것들을 하나씩 재빠르게 때려 잡아서 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하지만 그 두더지들이 모두 한꺼번에 머리를 쳐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힘이 세고 손이 빠른 사람도 그 두더지들을 다시 집어 넣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에게 다가오는 차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나설 때 우리 모두는 평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꿈을 향해 함께 일어선 그 힘을 아무도 막지 못할테니깐요.
그래서 우리가 ‘연대’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일 거구요. ^^


 

(자기가 좀 안다고 으시대며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