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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1/28
    땅은 누구의 것인가? - <예루살렘>을 읽고(6)
    미니
  2. 2004/11/26
    저주
    미니
  3. 2004/11/25
    나도 이렇게 늙어야지 ^^(2)
    미니
  4. 2004/11/23
    인류의 잔인함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미니
  5. 2004/11/22
    부시 : 4년 더(1)
    미니
  6. 2004/11/22
    명동에서
    미니
  7. 2004/11/17
    평화라는 말에 대해서...(2)
    미니
  8. 2004/11/08
    아라파트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미니
  9. 2004/11/08
    지도의 정치, 기억의 정치
    미니
  10. 2004/11/08
    묵자를 읽읍시다 ^^(3)
    미니

땅은 누구의 것인가? - <예루살렘>을 읽고

이 책 유대, 기독, 이슬람 세 종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설명한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 관한 역사책입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역주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제가 듣기로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성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과연 다른 곳과 비교해 특별히 성스러운 땅, ‘성지’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만약 ‘성지’에 다른 곳과 다른 ‘영빨’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영빨은 세상 모든 곳에 계시기는 하되 ‘성지’에만 특별히 많이 머무시는 것이 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영빨이 세상 어디에나 공평하게 두루 계시다면 ‘성지’라는 것은 그저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념의 상징일 것입니다. 종교라는 입장에서 볼 때 물론 저의 생각은 후자입니다. 인간들이 성지를 만들면 만들었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성지라는 특별한 땅을 만드시겠습니까? 오직 인간들만이 아무 뜻도 없는 땅과 건물과 물건을 두고 성스럽니 아니니 말할 뿐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스러움을 얻거나 남의 성스러움을 파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살인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너 자신을 아끼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한 지역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그들을 내쫓고 있지 않습니까? 통곡의 벽 종교 제국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중동지역을 점령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고, 아랍 제국들이 영토를 확장해 갈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고, 미국도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을텐데 한낱 땅 쪼가리를 가지고 서로 죽이고 죽임당하는 것은 종교의 근본에서 벗어난 침략과 점령 행위뿐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권력과 돈 뿐입니다. 이슬람은 다른 이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도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정말 그랬는지는 다른 얘기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만큼은 아니어도 전혀 종교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둘째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더 많은 세금을 내라고 했으니 이것은 불공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셋째로 종교의 차이를 이유로 사회진출, 이주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때로는 특정 종교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니 종교를 완전히 강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지 탈환을 내세웠건 하나님의 구원을 내세웠건 제국은 제국일 뿐이며 제국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과 집단은 학살 또는 추방당하거나 차별을 감수하며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만약 20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계속해서 이 지역을 점령했다면 어쩜 지금 우린 팔레스타인 무슬림-이슬람 신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해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끄는 십자군 땅은 누구의 것인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예루살렘은 과연 누구의 땅입니까? 팔레스타인은 무슬림들의 땅일까요? 저의 대답은 예루살렘도 팔레스타인도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그저 땅일 뿐입니다. 땅에다 선을 긋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며 땅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닌 겁니다. 오직 인간이 점령과 착취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땅을 빼앗을 뿐입니다.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며 살 수도 없고, 많은 인간들은 땅을 빌어 곡식을 심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땅에 의지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이름이든 국가의 이름이든 민족의 이름이든 법의 이름이든 마찬가지 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느 집단이 배타적으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유대, 기독, 이슬람 어느 한쪽이라도 예루살렘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종교와 민족을 억압한다면 전쟁과 분쟁은 주체를 달리하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예루살렘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무슬림들만의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만의 것도 아닙니다.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국가간 이주의 자유가 보장 되어야 하듯이 땅은 그저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자유롭게 이용하면 그만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땅을 독점한 채 다른 집단의 이용권을 부정하는 집단과 싸우며 땅이 필요한 이들이 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목차 서문/7 축복받은 예루살렘,저주받은 예루살렘 1부 유태인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의미 1.시온,다윗의 도시/43 2.파괴된 성전/83 3.시온으로의 귀환/131 2부 그리스도교인들의 분쟁과 축복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의 역사 4.예수의 발자취들/181 5.신의 뜻입니다!/219 6.그리스도의 무더은 누구 것인가?/262 3부 이슬람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거룩함 7.이슬람,예루살렘에서 이기다/293 8.전갈로 가득 찬 황금그릇/335 9.오스만의 무관심/366 4부 예루살렘의 미래,분할이냐 통합이냐 10.탄생과 배반-예루살렘을 향한 투쟁,1917~1967/393 보론/439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어떻게 볼 것인가? 부록/465 중동지역 약사/왕계표/참고연표/참고문헌/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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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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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렇게 늙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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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잔인함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인류의 잔인함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부시를 욕하고, 히틀러를 욕하고, 스탈린을 욕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욕하고, 지존파와 유영철을 욕하지만
가만히 지켜 보십시오.
너무나도 슬프게
아주 평범한 한국사람들이
국익의 이름을 빌리든, 먹고 살기의 이름을 빌리든, 어쩔 수 없음의 이름을 빌리든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너무나도 쉽게 수천이든 수만이든 상관없이
이라크인들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아니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면 자신이 스스로 비참해질까봐
죽어가는 이라크인들에 대해 아예 생각하고 쳐다보기를 애써 힘들게 거부하는 모습을...

나의 이익에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면서
다른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둔감하고 느리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부도덕성을 맹렬히 비난하다가도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는 그들과 너무도 쉽게 손을 잡는 모습을...

평화니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입만 열면 외치던 그 잘난 운동단체들이
국가권력과의 친분을 위해 아주 쉽게 가슴 저린 배신을 던지는 모습을...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모습들이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이미 아주 깊숙히 내면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잔인함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어느새 입으로는 평화를 이야기 하지만
마음은 이익과 권력을 향해 똘똘뭉쳐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이 날 것이라는 교훈도 잊은채...


인류의 잔인함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며
히틀러는 독일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입니다.

인면수심,
얼굴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짐승 같다고 했나요?
이라크 침략과 한국군 파병은 가난한 아이들의 간을 파먹고는
배부르다고 웃음짓는 악귀의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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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 4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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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20일 토요일 낮, 미니가 명동으로 나갔습니다.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 만민공동회]가 있어서요.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도 듣고, 또 얘기한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서 박수도 치고 그랬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지나가시면서 제 마음에 크게 남는 말 한마디 남겨 주시고 가시대요.
“이라크 놈들은 다 죽어야 돼!”
그 분은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태어나서 이라크 사람들한테 무슨 원한 맺힌 일 있었을까요?

만민공동회가 끝나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정말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손을 잡은 사람들, 신발을 파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
그렇게 그렇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떠밀리듯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뜩 이런 생각 들었습니다.
‘만약에 이곳에 폭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손을 잡은 사람들은 손을 놓을 테고, 신발 파는 사람들은 신발을 팔지 못할 테고, 웃던 사람들은 웃지 못할 테지. 그리고 핸드폰으로 전화하던 사람들에겐 119에 전화를 걸 시간이라도 있을까...’





관련 글 :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
관련사이트 : 전범민중재판 http://go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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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말에 대해서...

 

요즘은 평화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활동하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도 '평화'라는 말이 들어 가구요
그리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뭐 굳이 '평화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분이 '평화주의자야'랴고 하면
저는 '아니요'라고 하지요 ^^ )
지금 제게 '평화는 이것이야'라는 답도 없지만

 

다만 가끔 이런 저런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0. 평화의 의미


제게 평화는 평등과 조화입니다.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등이 평등한 것이며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등이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1. 평화와 사회적 실천

 

간디는 비폭력을 주장했지만 천민과 노동자의 해방 운동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또한 여성을 자신의 성욕을 시험하는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 했습니다.
평화는 나와 내 마음 또는 내 주위가 그저 아무 일 없이 조용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아주 정치적인 행동이며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루자에서 어린 애들이 어른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제야의 친구는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이런 것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팔-이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장에 서로가 총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이 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것은 당장에 총을 내려 놓는 것 뿐만 아니라 다시 총을 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미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이윤 세계화에 대항해 활동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주의'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과 자연이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2.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

 

제가 추구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만 편안하면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되든 별 상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사회 제도만 바뀌면 모든 개인이 평화로와 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제 개인으로 봐서도 일단 평화로와야 됩니다.

 

이 평화로움은 나만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입고, 우아한 말하면서, 세상을 걱정은 혼자 한다는 듯이 하고, 자기에게는 아무 손해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평화''평화'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와 욕망, 목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세상 어느 곳에 두고, 무슨 일을 맡겨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실천적인 평화로움입니다.

 

세상의 평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중국에서 경제개발한다고 공해를 뿜어대니 한국도 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직접 느끼든 아니면 느끼지 못하든
폭격으로 죽어가는 팔루자 어린이들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속에 자국을 남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아무 일 없을때도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불안한 것은

이 세상속의 고통과 상처가 너무 많고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속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혼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을지는 모르나 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고, 다 같이 지구라는 땅위에 살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의 평화나 혼자만의 안락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의 어리석음이 나 혼자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지 싶어 애를 쓰고 있는 거겠지요.

 

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나 혼자만, 우리 가족만
물은 정수기에서 걸러 먹고
공기도 공기정화기에서 걸러 먹고
그러면 생각도 생각정화기에서 걸러 하시면 평화로우시겠습니까?
평생 집안에서만 사시겠습니까?


 

마음의 평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 실천할때
자신도 평화로워지고, 자신이 속해서 살고 있는
이 세상도 평화로워질 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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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파트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1. 병상에 누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아라파트가 병상에 눕자마자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요 논점은 과연 아라파트 이후에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 국가의 운영 방향은 누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핵심이 아니듯이 아라파트 이후의 권력 관계가 팔레스타인의 장래의 핵심 문제는 아닙니다.
아라파트 이후 문제를 권력 중심으로 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팔레스타인 내부의 권력문제로 본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은 누가 권력을 쥐느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미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입니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아라파트가 없던 시절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은 투쟁 했으며 아라파트가 사망하더라도 그들의 해방운동은 계속 될 것입니다.

아라파트 이후를 계기로 우리가 제기하고 행동해야 할 것은 누가 권력을 쥘 것이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어떻게 중지 시킬 것이며 팔레스타인 내부가 어떻게 민주적으로 단결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부시와 샤론

 

두 번째는 아라파트 사후 팔레스타인 내부 권력 투쟁을 계기로 중동지역에 혼란이 가속화 되는 것은 아니냐는 식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문제의 핵심을 비켜 나갔습니다. 중동지역의 평화를 해치고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팔레스타인 아니라 이스라엘과 미국입니다.

만약 아라파트의 사후 중동 정세가 더욱 혼란해진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미국 때문입니다. 특히 부시가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더욱 강력하게 테러를 응징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이에 이스라엘과 샤론은 ‘옳다구나’ 박수를 치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테러’라고 밀어붙이며 공격할 것입니다.

 

아라파트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떠나 어쨌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장에서는 아라파트가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요리하기 쉬운 상대였습니다. 하지만 아라파트가 물러나게 되면 그들이 요리하기 어려운 세력들이 권력 참여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과 미국은 자신들이 요리하기 쉬운 세력을 권좌에 앉히려 하는 것과 함께 요리하기 어려운 세력에 대해서는 권력 가까이에 가지 못하도록 공격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별적인 지원과 선별적인 제거를 위해 무력공격과 공작정치를 강화할 것이며 이것이 중동지역의 평화를 해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2. 두가지 사건과 내부 개혁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과 함께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내부를 어떻게 개혁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부패에 관한 얘기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래 두가지 입니다.

① 시멘트 사건

 

 


서안지구에 건설중인 고립장벽


2004년 2월 끔찍한(?)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멘트 사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추가로 빼앗고, 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서안지구에 짓고 있는 장벽과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에 사용되는 시멘트를 팔레스타인 회사가 이집트에서 수입해서 이스라엘 회사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시멘트 회사를 당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인 아흐마드 쿠레이아(Ahmad Qureia)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쿠레이아는 이미 소유권을 다른 가족에게 넘긴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② 무사 아라파트 사건

 

 


무사 아라파트의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


2004년 7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자신의 조카인 무사 아라파트(Musa Arafat)를 팔레스타인 보안국장(Palestinian General Security Servie)에 임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수천 명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집회를 열고 무사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부패의 상징이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이 집회에는 아라파트가 중심으로 있는 정치조직 파테(Fateh)의 알 아크사 순교단(Al-Aqsa Martyrs' Brigades)까지 참여 했으며, 이 사건은 인티파다 이후 성장한 팔레스타인 내부의 새로운 해방운동 세력이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투쟁을 벌여온 세대에 대해 어떤 감정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라파트는 파타와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수십 년간 요르단, 레바논, 튀니지 등지를 오가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펼쳤고, 이스라엘과의 협상 진전에 따라 국내로 귀환하여 팔레스타인 현대사에서 최초로 선출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수십 년간 죽을 고비를 넘기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투쟁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투쟁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도 개혁을 요구합니다. 비합리적인 권력의 선출과 독점, 부패, 투명하지 않는 재정 등은 극복해야 될 과제입니다. 이것은 자치정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최대의 정치세력인 파테조차 자신의 지도부를 조직원들 스스로 선출하지 못하고 몇몇 권력자들만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패한 정부가 평화협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혹은 안하는-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 휘둘러온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안에서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정부가 민중들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협상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의 결과가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평화협상이 ‘평화’를 위한 협상이 아니라 ‘점령’을 지속하는 협상이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3. 선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두 동강난 팔레스타인. 두 지구 안은 더 많이 쪼개져 있는 상태

 

 

팔레스타인이 내부로부터 민주화 되기 위해서는 새로 선출될 대통령은 반드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로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며,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전제 조건을 풀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이 선거를 보장해야 합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이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분리 ․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포함한 전역에서 ‘형식적으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은 딱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리하기 쉬운 세력이 승리할 것이 확실시 될 때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선거보다는 현재의 권력 핵심들끼리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될 것이며 이를 위해 공작 정치를 펼칠 것입니다.

두 번째 현 지도부가 선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설사 자신들이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말입니다. 해방운동은 내부가 민주적이고 합리적일 때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내부가 민주적이지 못할 때 해방운동을 부패하고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점점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과 부패 문제로 역량을 약화시키지 말고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향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4. 하나이지 않은 팔레스타인 해방

 

팔레스타인이 해방된다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민중들이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앞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이스라엘과 미국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패한 권력을 쥔 채 놓지 않으려는 권력자, 다른 민중들의 고난과 가난을 외면하는 거대 가문, 이윤을 위해서라면 장벽 건설에 쓰일 시멘트까지 팔아먹는 자본, 보수적인 이슬람 논리를 내세우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남성들 이 모든 것들과 차근히 싸워서 민중 스스로 해방 되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에 지배당한 채 팔레스타인이 독립을 하게 된다면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민족이 해방된 기쁨과 함께 지배자가 유대인에서 아랍인으로 바뀌는 현실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

 

따라서 아라파트의 퇴장을 계기로 우리가 지원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냐 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어떤 노략질을 할지 감시하고 저항해야 하며, 권력의 변화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의 뿌리에 좀 더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사회전반을 어떻게 민주화하고 개혁할 것이냐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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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정치, 기억의 정치

인간해방을 위한 기억  


시선


투기꾼에게는 땅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이고, 농사꾼에게는 농사지을 땅으로 보입니다.
침략당해 사라진 고구려를 두고 중국과 한국이 서로 자신의 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지하도가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차를 빨리 가게 해 주는 좋은 제도일지 모르나 몸 불편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넘기 힘든 벽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하나의 사실을 두고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



조선을 KOREA가 아니라 JAPAN이라고 표시한 이 지도가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세계지도의 일부라고 하면 여러분은 이 지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
만약 지금이 1930년대라면 조선인들은 틀렸다고 할 것이고, 일본인들은 맞는다고 하겠지요.

쿠르드와 쿠르디스탄





쿠르드인들은 3, 4천만이나 되는 인구를 가지고도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해 아직도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 살면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거나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계지도 어디에도 쿠르드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특히 터키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의 영향으로 쿠르드어조차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쿠르드인들은 ‘쿠르디스탄’이란 이름의 땅을 자신들이 세울 국가의 영토라고 생각합니다.
쿠르디스탄은 단지 쿠르드인들의 상상일 뿐일까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첫 번째 지도는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만든 지도이고, 두 번째 지도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만든 지도입니다.





같은 땅을 두고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PALESTINE이라고 표시하고 이스라엘 측에서는 ISRAEL이라고 표시합니다.
물론 많은 지도에서는 이땅을 이스라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왜일까요?
이스라엘이 점령했고 지금까지 강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가 이스라엘의 입장을 중심으로 그려진 결과는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 땅이 ‘이스라엘’이라고 인식되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요구가 '이스라엘 땅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될 겁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측에서 만든 지도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은 비록 이스라엘의 식민지가 되어 있지만, 앞으로 팔레스타인이 독립을 하게 되면 ‘팔레스타인이 제 땅을 되찾았구나’라고 되지 않을까요?
조선의 독립이 일본 땅의 일부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쿠르디스탄에서, 티벳에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식민통치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강자와 지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와 기억을 약자와 피지배자들의 지도와 기억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누군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기억을 우리가 잊어버리는 순간 정말 그들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위한 투쟁, 인간해방을 위한 또하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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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를 읽읍시다 ^^

한겨레에 묵자를 추천하는 글이 있길래 옮겨 봅니다.

 

다른 책도 좋을테고 제가 읽었던 " 묵자 - 천하에 남이란 없다 " /기세춘/초당

이 책도 좋지 싶습니다.

이라트 전쟁때 인간방패를 생각했던 사람이 혹시 묵자를 읽었던 건 아닐까요? ^^

 

프레시안에 신영복 선생이 연재 했던 고전 관련 글중에 묵자 관련 글도 좋습니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menu/pressman_other.asp?pressman=신영복&pressman1=&pressman2=

 

 

 

[한겨레 글]

겸애·노동 중시한 사회적 실천가 묵자


묵자: 중국의 ‘작은 예수’ ‘큰 마르크스’

묵자(墨子·기원전 479~381?)는 중국사상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사상가이다. 근대의 양계초(梁啓超)는 그를 가리켜 ‘작은 예수’요 ‘큰 마르크스’라 하였다. 윤리적 측면에서는 예수에 조금 못미치지만, 경제사상과 사회적 실천의 측면에서는 마르크스를 능가한다고 본 것이다. 이제 그 사상의 특색을 몇 가지 열거해 보자.

 

(1) 평등박애론(兼愛).

묵자는 사회의 근본 모순을 ‘차별성’이라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한 가족처럼 차별 없이 두루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 또한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하면 남이 또한 우리를 이롭게 할 것이다(兼相愛 交相利).” 이것이 묵자의 근본 주장이다.

 

(2)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지 못하고, 추워 떠는 사람이 옷을 얻지 못하고, 피곤한 사람이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에, 그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도적’이었다. 도적은 남의 노동 성과를 거저 훔치려 하기 때문이다.

 

(3) 반전평화론(非攻).

개인 차원에서 도적을 미워했다면, 묵자가 사회 차원에서 가장 비판한 것은 ‘침략전쟁’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자가 보기에는, 전쟁은 수많은 민중을 죽음에 몰아넣고 엄청난 사회적 재화를 소모하는 죄악일 뿐이다. “한 사람을 죽였을 때 살인죄가 된다면, 수백명을 전쟁에서 죽인 사람은 그 죄가 살인죄의 수백배에 달한다”고 묵자는 주장한다.

 

(4) 사회적 실천.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실천가였다.

그를 비판하던 맹자도 “묵자는 이마에서 발끝까지 닳아 없어지도록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해 오는 그의 저술 <묵자>의 주요 편명은 사회실천의 구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매우 논리적이며, 그가 다룬 문제들은 극히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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