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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28
    땅은 누구의 것인가? - <예루살렘>을 읽고(2)
    미니
  2. 2004/11/08
    묵자를 읽읍시다 ^^(3)
    미니

땅은 누구의 것인가? - <예루살렘>을 읽고

이 책 유대, 기독, 이슬람 세 종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설명한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 관한 역사책입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역주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제가 듣기로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성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과연 다른 곳과 비교해 특별히 성스러운 땅, ‘성지’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만약 ‘성지’에 다른 곳과 다른 ‘영빨’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영빨은 세상 모든 곳에 계시기는 하되 ‘성지’에만 특별히 많이 머무시는 것이 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영빨이 세상 어디에나 공평하게 두루 계시다면 ‘성지’라는 것은 그저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념의 상징일 것입니다. 종교라는 입장에서 볼 때 물론 저의 생각은 후자입니다. 인간들이 성지를 만들면 만들었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성지라는 특별한 땅을 만드시겠습니까? 오직 인간들만이 아무 뜻도 없는 땅과 건물과 물건을 두고 성스럽니 아니니 말할 뿐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스러움을 얻거나 남의 성스러움을 파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살인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너 자신을 아끼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한 지역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그들을 내쫓고 있지 않습니까? 통곡의 벽 종교 제국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중동지역을 점령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고, 아랍 제국들이 영토를 확장해 갈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고, 미국도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을텐데 한낱 땅 쪼가리를 가지고 서로 죽이고 죽임당하는 것은 종교의 근본에서 벗어난 침략과 점령 행위뿐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권력과 돈 뿐입니다. 이슬람은 다른 이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도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정말 그랬는지는 다른 얘기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만큼은 아니어도 전혀 종교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둘째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더 많은 세금을 내라고 했으니 이것은 불공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셋째로 종교의 차이를 이유로 사회진출, 이주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때로는 특정 종교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니 종교를 완전히 강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지 탈환을 내세웠건 하나님의 구원을 내세웠건 제국은 제국일 뿐이며 제국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과 집단은 학살 또는 추방당하거나 차별을 감수하며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만약 20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계속해서 이 지역을 점령했다면 어쩜 지금 우린 팔레스타인 무슬림-이슬람 신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해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끄는 십자군 땅은 누구의 것인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예루살렘은 과연 누구의 땅입니까? 팔레스타인은 무슬림들의 땅일까요? 저의 대답은 예루살렘도 팔레스타인도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그저 땅일 뿐입니다. 땅에다 선을 긋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며 땅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닌 겁니다. 오직 인간이 점령과 착취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땅을 빼앗을 뿐입니다.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며 살 수도 없고, 많은 인간들은 땅을 빌어 곡식을 심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땅에 의지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이름이든 국가의 이름이든 민족의 이름이든 법의 이름이든 마찬가지 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느 집단이 배타적으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유대, 기독, 이슬람 어느 한쪽이라도 예루살렘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종교와 민족을 억압한다면 전쟁과 분쟁은 주체를 달리하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예루살렘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무슬림들만의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만의 것도 아닙니다.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국가간 이주의 자유가 보장 되어야 하듯이 땅은 그저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자유롭게 이용하면 그만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땅을 독점한 채 다른 집단의 이용권을 부정하는 집단과 싸우며 땅이 필요한 이들이 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목차 서문/7 축복받은 예루살렘,저주받은 예루살렘 1부 유태인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의미 1.시온,다윗의 도시/43 2.파괴된 성전/83 3.시온으로의 귀환/131 2부 그리스도교인들의 분쟁과 축복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의 역사 4.예수의 발자취들/181 5.신의 뜻입니다!/219 6.그리스도의 무더은 누구 것인가?/262 3부 이슬람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거룩함 7.이슬람,예루살렘에서 이기다/293 8.전갈로 가득 찬 황금그릇/335 9.오스만의 무관심/366 4부 예루살렘의 미래,분할이냐 통합이냐 10.탄생과 배반-예루살렘을 향한 투쟁,1917~1967/393 보론/439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어떻게 볼 것인가? 부록/465 중동지역 약사/왕계표/참고연표/참고문헌/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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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를 읽읍시다 ^^

한겨레에 묵자를 추천하는 글이 있길래 옮겨 봅니다.

 

다른 책도 좋을테고 제가 읽었던 " 묵자 - 천하에 남이란 없다 " /기세춘/초당

이 책도 좋지 싶습니다.

이라트 전쟁때 인간방패를 생각했던 사람이 혹시 묵자를 읽었던 건 아닐까요? ^^

 

프레시안에 신영복 선생이 연재 했던 고전 관련 글중에 묵자 관련 글도 좋습니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menu/pressman_other.asp?pressman=신영복&pressman1=&pressman2=

 

 

 

[한겨레 글]

겸애·노동 중시한 사회적 실천가 묵자


묵자: 중국의 ‘작은 예수’ ‘큰 마르크스’

묵자(墨子·기원전 479~381?)는 중국사상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사상가이다. 근대의 양계초(梁啓超)는 그를 가리켜 ‘작은 예수’요 ‘큰 마르크스’라 하였다. 윤리적 측면에서는 예수에 조금 못미치지만, 경제사상과 사회적 실천의 측면에서는 마르크스를 능가한다고 본 것이다. 이제 그 사상의 특색을 몇 가지 열거해 보자.

 

(1) 평등박애론(兼愛).

묵자는 사회의 근본 모순을 ‘차별성’이라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한 가족처럼 차별 없이 두루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 또한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하면 남이 또한 우리를 이롭게 할 것이다(兼相愛 交相利).” 이것이 묵자의 근본 주장이다.

 

(2)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지 못하고, 추워 떠는 사람이 옷을 얻지 못하고, 피곤한 사람이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에, 그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도적’이었다. 도적은 남의 노동 성과를 거저 훔치려 하기 때문이다.

 

(3) 반전평화론(非攻).

개인 차원에서 도적을 미워했다면, 묵자가 사회 차원에서 가장 비판한 것은 ‘침략전쟁’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자가 보기에는, 전쟁은 수많은 민중을 죽음에 몰아넣고 엄청난 사회적 재화를 소모하는 죄악일 뿐이다. “한 사람을 죽였을 때 살인죄가 된다면, 수백명을 전쟁에서 죽인 사람은 그 죄가 살인죄의 수백배에 달한다”고 묵자는 주장한다.

 

(4) 사회적 실천.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실천가였다.

그를 비판하던 맹자도 “묵자는 이마에서 발끝까지 닳아 없어지도록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해 오는 그의 저술 <묵자>의 주요 편명은 사회실천의 구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매우 논리적이며, 그가 다룬 문제들은 극히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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