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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선을 그을 것 까지야. 헌법이 취하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한다. 계급/계층적 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적극 동감한다. 희진 쌤의 논의는 바로 그런 작업 중 하나였다.
밝혀둘 것은, 아쉽게도, 헌법 다시보기 모임은 '시민행동 내부의 전문가 그룹'은 아니라는 점이다. 몇몇 운동가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시민행동 상근자들이 스탭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연구자들의 모임보다는 지속성이 있을 것이지만, 헌법 다시보기 모임에서 나온 여러 성과나 의견들이 시민행동의 성과나 의견들이라고 보는 건 적절치 않다.
아마, 이걸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박명림 쌤 논문의 주장과 헌법 다시보기 전체의 흐름은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그 부분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는, 혹은 구분해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쓴 점, 아쉽다. 15일 토론회의 제안 정도를 '순진하게' 제안할 거라면 헌법 다시보기 모임이 그 모임이 이렇게 지속되고 있지도 않을 거다.
김상철, 개헌논의 유감 (문화연대 문화읽기 7.21)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로부터 ‘개헌론’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권력구조의 문제에 착목하여 내각제 등의 대안 권력 체제 논의에 집중하는 정치권과 헌법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한 민주적 ‘헌정체제’ 수립을 모색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흐름은 차별적이다. 그러나 ‘어떤’ 헌법인가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한 ‘텍스트’로서의 헌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지난 15일 프레스센터에서 창비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 토론회는 시민사회단체 내의 ‘헌법개혁’ 논의가 본 궤도에 올라서려 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토론회가 단순히 ‘헌법’에만 집중을 하는 토론회라기보다는 ‘87년 체제’(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조희연의 것으로 기억한다)의 부분으로서 헌법체제 혹은 헌정체계를 다루었다.
그럼에도 시민사회 내에서 개헌논의를 이토록 적극적인 의제로 다루었던 적은 없었기에 그 의미는 높다. 특히 창비와 공동으로 이런 주제의 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은 시민사회의‘주류’가 어느 정도 개헌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가시적인 징후로 읽을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체 2부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의 1부는 ‘헌법 논의의 지형을 확대하자’는 주제로 홍윤기, 정희진, 박명림이 각각 발제하였다. 홍윤기는 87년 개헌이 가지는 의미를 ‘권력공학에 압도당한 시민혁명’이라는 말로 풀이한다. 실제로 홍윤기가 지적하듯이 87년 개헌은 그야말로 제도 정치의 야합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85년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광범위한 민중투쟁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실제 87년 당시 야당이 민중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전까지 공공연하게 제헌의회 소집이 주요 구호였던 것을 상기하면 87년 헌법이 당시의 열망과 질적으로 얼마나 차별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에 홍윤기는 87년 헌법에 대해 “헌정체제 성립의 원동력 부분인 국가시민권과 헌법작성 주체인 정치권이 확연하게 분치되는 형세”로 헌법이 개정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런 한계를 바탕으로 연성형 시민국가 전략에 걸맞는 헌법체제를 제안한다. 그는 국민을 주체로 삼는 헌법은 강성형 국민국가의 표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내용을 포괄하는 시민 주체의 연성 국가의 이미지를 헌법에 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헌법에 정치, 경제, 사법 영역에의 시민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주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희진은 기존 헌법의 조문들을 여성 혹은 ‘비국민’의 시작에서 검토하면서 “현재 한국헌법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서구가 근대시민사회로 진입할 당시의 개념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박명림은 민주적 실천을 절차와 과정의 수준과 능력 또는 책임과 결과의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87년 체제 이후 현재까지 전자에 집중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집합적 삶의 형태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로서 실질적인 민주적 요소에 집중한다. 박명림은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왜 ‘모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이 항상 중간평가 약속, 3당 합당, 내각제 개헌 약속, 재신임 약속, 탄핵 파동과 같은 ‘(초)헌법적’ 사태에 예외 없이 직면하였느냐”고 물으면서 이는 단순히 대통령들의 무능이나 정략의 결과가 아니라 ‘헌법체제’의 문제점에 기인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정당한 지적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치의 사법화’를 지적하면서 최근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판결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논의가 급격하게 ‘어떤’ 헌법인가의 문제로 집중되면서 헌법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논의가 모아진다. 그러면서 민주적 원칙을 바탕으로 헌법체제를 견인하고자 하는 기획이 ‘개헌 일정’으로 수렴된다. 박명림이 제안하는 방식은 1차적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민주헌법제정 시민사회연대’를 구성하고 국회 내에 헌법개정협의회를 둔다. 이를 통해 헌법제정의 논의를 국민화하며 최종적 채택 권한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 주며 마지막으로는 다시 국민투표를 통해 추인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박명림의 로드맵은 2007년 하반기가 종료시점으로 상정되어 있다.
15일 토론회는 그동안 헌법관련 토론회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이론 중심적이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매뉴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질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발제자들도 밝히고 있듯이 ‘함께하는 시민행동’내부에 전문가 그룹이 지속적으로 이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문제의식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너무나 순진한 발상에 머물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갈등을 전제하지 않는 개헌 논의와 로드맵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헌법에 대한 논의는 헌법수호의 논리와 헌법개혁의 논리로 첨예화되고 있으며 그 경계는 계층 혹은 계급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계급적(계층적) 논의로 확장되고 논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헌법 수호의 논리를 살펴보자. 정희진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과거 민주화 운동의 법적 정당성은 대개 헌법에서 찾아졌다. 다시 말해 ‘사문화’ 헌법의 내용들이 민주화 운동의 ‘법적’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90년대 초반 토지공개념에 근거한 여러 법률들을 개인의 재산권차원에서 위헌화했던 것도, 작년 대통령 공약으로 제출되었고 여야 합의로 통과되었던 수도이전 특별법을 위헌화했던 것도 바로 헌법이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헌법의 해석자인 헌법재판소였다). 다시 말해 헌법은 절대로 공명정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정적 권력이 연성화되고 실질적인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해석이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전경련 산하의 ‘자유기업센터’에서 지난 98년 내놓은 <한국 민주정치와 삼권분립>이라는 책은 자본 측의 ‘헌법활용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의 부제인 ‘사법심사권 확충을 중심으로’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헌법재판소의 사법심사권을 중심으로 소위 문민화된 정부가 추진해왔던 ‘한줌의’ 개혁정책에 대응하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성격은 헌법재판소의 구체적인 판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 테면 지난 2004년 판결된 ‘이라크전쟁 파병과 통치행위’에 대한 결정문에서는 “일반 시민에겐 파병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할 적격이 없다”는 논리가 보이며, 지난 3월 퇴임한 김영일 재판관은 퇴임사에서 헌법재판에 대한 시민참여 요구에 대해 “법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적용할 헌법조항의 의미와 헌법 정신 등을 해석해 내는 작업이야말로 진정 오랜 세월 법의 해석작업에 임하여 왔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림없이 오로지 국민의 기본권과 헌법, 헌법 정신을 찾아내어 선포하는 법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거기에 법을 전공하지도 아니한 어떤 상식인이 법률가를 대체하여 그와 같은 일을 올바로 해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반박하는 내용을 보자.
다시 말해, 헌법 개정의 논의는 현재 헌법이 취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의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계급적(계층적) 차별이라는 요소를 밝혀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인의 사적 권리를 우선하고 법 해석의 독점을 정당화는 현재의 헌법재판소의 흐름이 과연 민주주의적인 것인지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대체될 수 없다. 누가 언급했듯이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상철
원문 보기 : http://culturalaction.org/weekly/maynews/read2.php?table=organ&item=2&no=2111
7월 15일 심포에 대한 안수찬 기자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인 것 같다. 심포의 문제의식에 한껏 끌리면서도 헌법의 압도적 위상, 혹은 안수찬 기자 본인 표현으로는 '관습헌법'으로 인한 주저함이 남아있는, 나나 우리 헌법 다시보기 대다수 구성원들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결국 발리바르까지 끌어들이고 나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사실 발리바르가 인권의 정치에 대한 얘기를 한 것도, 유럽 헌법과 연관된 얘기라 한다. 유럽이 만들어지고는 있으나, 혁명, 즉 구성(혹은 제헌) 과정은 없는 (혹은 시민사회와 무관한) 유럽 만들기에 대한 발리바르의 문제의식이 "인권의 정치"라는 문제설정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법·제도와 광장의 이분법이 약간 걸리지만, 아직까지 그 이분법을 명백히 넘어서지 못한 이 쪽의 책임이 더 크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정말 아쉬운 것은, '인권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안수찬 기자의 글 어디에서도 정작 정희진 쌤의 논문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헌법과 인권 (안수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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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인권연대 운영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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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지면을 즐겨 읽는, 적지 않은 수의 법률가 또는 법학자들에게는 죄송하게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법이란 그저 거만한 권위와 고리타분한 구습의 결정체라고 나는 믿었다. 법에 갇히는 순간, 법의 권위에 굴복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장엄함과 현실의 생동감은 그 빛을 잃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이런 정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개혁진보 진영에서 이어져 내려온 ‘관습 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법에 목매달아서는 안 된다는 그 불문율 말이다. (대신 ‘권력’에 목매달았던 셈인데, 생각해 보면 권력이나 법이나 뭐 다를 게 있다고, 그 둘 사이에 넓고 깊은 해자를 파고 법 제도 일반을 ‘사갈시’했는지 모르겠다)
법을 폐지하자는 데모는 해봤어도, 실제로 어떤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활동은 그래서 여전히 낯설다. 그것은 길게 잡아야 시민단체들이 제 자리를 잡은 지난 10년 안쪽에 시작된 일이다. 그나마도 여전히 운동의 중심은 ‘법’이 아니라 ‘광장’에 있다는 게 이들 시민단체의 믿음이자 나의 믿음이다.
여기서 시시콜콜 그날의 발제와 토론 내용을 옮길 생각은 없다. 궁금하신 분은 <한겨레>에 쓴 제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만 그 기사에 온전히 담지 못한 한 ‘장면’을 전하고 싶다.
오전 발제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현행 헌법의 민주적 개혁을 강하게 주창했다. 6월 항쟁의 성과물이지만, 실제로는 그 함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민주주의의 진전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현행 헌법을 정치협약이 아닌 시민의 헌법으로 개혁하자는 게 그 요지였다.
그런데 오후 토론에 나선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진전은 (계급계층에 기반한) 정당정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헌법의 권위에 기대는 헌정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헌정주의는 원래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데, 진보개혁 진영이 이제 그 ‘헌정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했다.
현행 헌법 전문(前文)에는 ‘인권’의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 ’ 정도가 개인이 갖고 있는 원천적 권리에 대한 규정이라 ‘해석’할 만하다. 다만 그 내용의 상당수는 ‘국가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성격을 먼저 규정하고 그에 따른 국민의 지위를 정하는 ‘발상’이 깔려 있다.
헌법 제2장에는 모두 29개조에 걸쳐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적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차별금지’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 침해 금지’ ‘통신비밀 보장’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재산권 보장’ ‘교육권’ ‘노동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환경권’ 등이 여기에 모두 명문화돼 있다. 다만 그것은 난삽하고 복잡한 나열에 불과해 보인다. 인권의 여러 양상과 국면을 어떻게 계통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2장 전체를 차지한 여러 권리와 자유는 ‘생동하는 권리장전’이자 ‘민주주의의 고향’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그저 ‘화석화된 문자’로 읽힌다.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헌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런 인권 조항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박명림 교수와 최장집 교수의 논리를 이 문제에 대입하자면 이렇다.
박 교수는 사실상 ‘사문화’돼 있을 뿐 아니라, 인권 개념의 적극적 확장을 막는 현행 헌법을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의제로 설정해, 사문화된 조항은 되살리고, 부족한 조항은 더 강화해 진정한 인권헌법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셈이다.
이념의 시대는 갔고, 광장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면, 모든 운동과 역사의 출발점은 결국 자유롭고 그래서 무한히 존귀한 개인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 그리고 그 총합으로서의 헌정 제도를 고민한다면, 그 출발 역시 ‘인간’ 각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인권은 지금 한국 사회의 ‘말과 글’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를 바로 잡는 데서,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작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띠엔 발리바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는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계급의 정치에 발목 잡힌 좌파의 도그마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내가 보기에 인권의 정치는 대단히 급진적인 구호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헌법을 말한다 할 때, 가장 할 말이 많아야할 사람들도 바로 인권운동가들이어야 옳을 것 같다. 정치학자들은 지금 ‘헌법을 민주주의의 품으로’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헌법을 인권의 품으로’라는 슬로건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민주주의는 그 곳으로 가는 길에 붙여진 이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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