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김상철, 개헌 논의 유감
- minik
- 2005
-
- 민언련 유감 - 카우치 성기...
- minik
- 2005
-
- 안수찬, 헌법과 인권
- minik
- 2005
-
- 투기자본감시센터 방문
- minik
- 2005
-
- 이주헌, '정보통신 2등국가'...
- minik
- 2005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뭐,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선을 그을 것 까지야. 헌법이 취하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한다. 계급/계층적 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적극 동감한다. 희진 쌤의 논의는 바로 그런 작업 중 하나였다.
밝혀둘 것은, 아쉽게도, 헌법 다시보기 모임은 '시민행동 내부의 전문가 그룹'은 아니라는 점이다. 몇몇 운동가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시민행동 상근자들이 스탭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연구자들의 모임보다는 지속성이 있을 것이지만, 헌법 다시보기 모임에서 나온 여러 성과나 의견들이 시민행동의 성과나 의견들이라고 보는 건 적절치 않다.
아마, 이걸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박명림 쌤 논문의 주장과 헌법 다시보기 전체의 흐름은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그 부분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는, 혹은 구분해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쓴 점, 아쉽다. 15일 토론회의 제안 정도를 '순진하게' 제안할 거라면 헌법 다시보기 모임이 그 모임이 이렇게 지속되고 있지도 않을 거다.
김상철, 개헌논의 유감 (문화연대 문화읽기 7.21)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로부터 ‘개헌론’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권력구조의 문제에 착목하여 내각제 등의 대안 권력 체제 논의에 집중하는 정치권과 헌법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한 민주적 ‘헌정체제’ 수립을 모색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흐름은 차별적이다. 그러나 ‘어떤’ 헌법인가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한 ‘텍스트’로서의 헌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지난 15일 프레스센터에서 창비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 토론회는 시민사회단체 내의 ‘헌법개혁’ 논의가 본 궤도에 올라서려 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토론회가 단순히 ‘헌법’에만 집중을 하는 토론회라기보다는 ‘87년 체제’(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조희연의 것으로 기억한다)의 부분으로서 헌법체제 혹은 헌정체계를 다루었다.
그럼에도 시민사회 내에서 개헌논의를 이토록 적극적인 의제로 다루었던 적은 없었기에 그 의미는 높다. 특히 창비와 공동으로 이런 주제의 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은 시민사회의‘주류’가 어느 정도 개헌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가시적인 징후로 읽을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체 2부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의 1부는 ‘헌법 논의의 지형을 확대하자’는 주제로 홍윤기, 정희진, 박명림이 각각 발제하였다. 홍윤기는 87년 개헌이 가지는 의미를 ‘권력공학에 압도당한 시민혁명’이라는 말로 풀이한다. 실제로 홍윤기가 지적하듯이 87년 개헌은 그야말로 제도 정치의 야합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85년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광범위한 민중투쟁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실제 87년 당시 야당이 민중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전까지 공공연하게 제헌의회 소집이 주요 구호였던 것을 상기하면 87년 헌법이 당시의 열망과 질적으로 얼마나 차별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에 홍윤기는 87년 헌법에 대해 “헌정체제 성립의 원동력 부분인 국가시민권과 헌법작성 주체인 정치권이 확연하게 분치되는 형세”로 헌법이 개정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런 한계를 바탕으로 연성형 시민국가 전략에 걸맞는 헌법체제를 제안한다. 그는 국민을 주체로 삼는 헌법은 강성형 국민국가의 표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내용을 포괄하는 시민 주체의 연성 국가의 이미지를 헌법에 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헌법에 정치, 경제, 사법 영역에의 시민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주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희진은 기존 헌법의 조문들을 여성 혹은 ‘비국민’의 시작에서 검토하면서 “현재 한국헌법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서구가 근대시민사회로 진입할 당시의 개념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박명림은 민주적 실천을 절차와 과정의 수준과 능력 또는 책임과 결과의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87년 체제 이후 현재까지 전자에 집중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집합적 삶의 형태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로서 실질적인 민주적 요소에 집중한다. 박명림은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왜 ‘모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이 항상 중간평가 약속, 3당 합당, 내각제 개헌 약속, 재신임 약속, 탄핵 파동과 같은 ‘(초)헌법적’ 사태에 예외 없이 직면하였느냐”고 물으면서 이는 단순히 대통령들의 무능이나 정략의 결과가 아니라 ‘헌법체제’의 문제점에 기인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정당한 지적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치의 사법화’를 지적하면서 최근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판결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논의가 급격하게 ‘어떤’ 헌법인가의 문제로 집중되면서 헌법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논의가 모아진다. 그러면서 민주적 원칙을 바탕으로 헌법체제를 견인하고자 하는 기획이 ‘개헌 일정’으로 수렴된다. 박명림이 제안하는 방식은 1차적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민주헌법제정 시민사회연대’를 구성하고 국회 내에 헌법개정협의회를 둔다. 이를 통해 헌법제정의 논의를 국민화하며 최종적 채택 권한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 주며 마지막으로는 다시 국민투표를 통해 추인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박명림의 로드맵은 2007년 하반기가 종료시점으로 상정되어 있다.
15일 토론회는 그동안 헌법관련 토론회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이론 중심적이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매뉴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질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발제자들도 밝히고 있듯이 ‘함께하는 시민행동’내부에 전문가 그룹이 지속적으로 이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문제의식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너무나 순진한 발상에 머물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갈등을 전제하지 않는 개헌 논의와 로드맵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헌법에 대한 논의는 헌법수호의 논리와 헌법개혁의 논리로 첨예화되고 있으며 그 경계는 계층 혹은 계급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계급적(계층적) 논의로 확장되고 논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헌법 수호의 논리를 살펴보자. 정희진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과거 민주화 운동의 법적 정당성은 대개 헌법에서 찾아졌다. 다시 말해 ‘사문화’ 헌법의 내용들이 민주화 운동의 ‘법적’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90년대 초반 토지공개념에 근거한 여러 법률들을 개인의 재산권차원에서 위헌화했던 것도, 작년 대통령 공약으로 제출되었고 여야 합의로 통과되었던 수도이전 특별법을 위헌화했던 것도 바로 헌법이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헌법의 해석자인 헌법재판소였다). 다시 말해 헌법은 절대로 공명정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정적 권력이 연성화되고 실질적인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해석이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전경련 산하의 ‘자유기업센터’에서 지난 98년 내놓은 <한국 민주정치와 삼권분립>이라는 책은 자본 측의 ‘헌법활용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의 부제인 ‘사법심사권 확충을 중심으로’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헌법재판소의 사법심사권을 중심으로 소위 문민화된 정부가 추진해왔던 ‘한줌의’ 개혁정책에 대응하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성격은 헌법재판소의 구체적인 판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 테면 지난 2004년 판결된 ‘이라크전쟁 파병과 통치행위’에 대한 결정문에서는 “일반 시민에겐 파병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할 적격이 없다”는 논리가 보이며, 지난 3월 퇴임한 김영일 재판관은 퇴임사에서 헌법재판에 대한 시민참여 요구에 대해 “법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적용할 헌법조항의 의미와 헌법 정신 등을 해석해 내는 작업이야말로 진정 오랜 세월 법의 해석작업에 임하여 왔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림없이 오로지 국민의 기본권과 헌법, 헌법 정신을 찾아내어 선포하는 법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거기에 법을 전공하지도 아니한 어떤 상식인이 법률가를 대체하여 그와 같은 일을 올바로 해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반박하는 내용을 보자.
다시 말해, 헌법 개정의 논의는 현재 헌법이 취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의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계급적(계층적) 차별이라는 요소를 밝혀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인의 사적 권리를 우선하고 법 해석의 독점을 정당화는 현재의 헌법재판소의 흐름이 과연 민주주의적인 것인지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대체될 수 없다. 누가 언급했듯이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상철
원문 보기 : http://culturalaction.org/weekly/maynews/read2.php?table=organ&item=2&no=2111
7월 15일 심포에 대한 안수찬 기자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인 것 같다. 심포의 문제의식에 한껏 끌리면서도 헌법의 압도적 위상, 혹은 안수찬 기자 본인 표현으로는 '관습헌법'으로 인한 주저함이 남아있는, 나나 우리 헌법 다시보기 대다수 구성원들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결국 발리바르까지 끌어들이고 나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사실 발리바르가 인권의 정치에 대한 얘기를 한 것도, 유럽 헌법과 연관된 얘기라 한다. 유럽이 만들어지고는 있으나, 혁명, 즉 구성(혹은 제헌) 과정은 없는 (혹은 시민사회와 무관한) 유럽 만들기에 대한 발리바르의 문제의식이 "인권의 정치"라는 문제설정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법·제도와 광장의 이분법이 약간 걸리지만, 아직까지 그 이분법을 명백히 넘어서지 못한 이 쪽의 책임이 더 크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정말 아쉬운 것은, '인권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안수찬 기자의 글 어디에서도 정작 정희진 쌤의 논문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헌법과 인권 (안수찬 위원)
|
안수찬/ 인권연대 운영위원 | ||||||||
|
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지면을 즐겨 읽는, 적지 않은 수의 법률가 또는 법학자들에게는 죄송하게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법이란 그저 거만한 권위와 고리타분한 구습의 결정체라고 나는 믿었다. 법에 갇히는 순간, 법의 권위에 굴복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장엄함과 현실의 생동감은 그 빛을 잃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이런 정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개혁진보 진영에서 이어져 내려온 ‘관습 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법에 목매달아서는 안 된다는 그 불문율 말이다. (대신 ‘권력’에 목매달았던 셈인데, 생각해 보면 권력이나 법이나 뭐 다를 게 있다고, 그 둘 사이에 넓고 깊은 해자를 파고 법 제도 일반을 ‘사갈시’했는지 모르겠다)
법을 폐지하자는 데모는 해봤어도, 실제로 어떤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활동은 그래서 여전히 낯설다. 그것은 길게 잡아야 시민단체들이 제 자리를 잡은 지난 10년 안쪽에 시작된 일이다. 그나마도 여전히 운동의 중심은 ‘법’이 아니라 ‘광장’에 있다는 게 이들 시민단체의 믿음이자 나의 믿음이다.
여기서 시시콜콜 그날의 발제와 토론 내용을 옮길 생각은 없다. 궁금하신 분은 <한겨레>에 쓴 제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만 그 기사에 온전히 담지 못한 한 ‘장면’을 전하고 싶다.
오전 발제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현행 헌법의 민주적 개혁을 강하게 주창했다. 6월 항쟁의 성과물이지만, 실제로는 그 함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민주주의의 진전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현행 헌법을 정치협약이 아닌 시민의 헌법으로 개혁하자는 게 그 요지였다.
그런데 오후 토론에 나선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진전은 (계급계층에 기반한) 정당정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헌법의 권위에 기대는 헌정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헌정주의는 원래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데, 진보개혁 진영이 이제 그 ‘헌정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했다.
현행 헌법 전문(前文)에는 ‘인권’의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 ’ 정도가 개인이 갖고 있는 원천적 권리에 대한 규정이라 ‘해석’할 만하다. 다만 그 내용의 상당수는 ‘국가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성격을 먼저 규정하고 그에 따른 국민의 지위를 정하는 ‘발상’이 깔려 있다.
헌법 제2장에는 모두 29개조에 걸쳐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적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차별금지’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 침해 금지’ ‘통신비밀 보장’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재산권 보장’ ‘교육권’ ‘노동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환경권’ 등이 여기에 모두 명문화돼 있다. 다만 그것은 난삽하고 복잡한 나열에 불과해 보인다. 인권의 여러 양상과 국면을 어떻게 계통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2장 전체를 차지한 여러 권리와 자유는 ‘생동하는 권리장전’이자 ‘민주주의의 고향’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그저 ‘화석화된 문자’로 읽힌다.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헌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런 인권 조항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박명림 교수와 최장집 교수의 논리를 이 문제에 대입하자면 이렇다.
박 교수는 사실상 ‘사문화’돼 있을 뿐 아니라, 인권 개념의 적극적 확장을 막는 현행 헌법을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의제로 설정해, 사문화된 조항은 되살리고, 부족한 조항은 더 강화해 진정한 인권헌법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셈이다.
이념의 시대는 갔고, 광장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면, 모든 운동과 역사의 출발점은 결국 자유롭고 그래서 무한히 존귀한 개인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 그리고 그 총합으로서의 헌정 제도를 고민한다면, 그 출발 역시 ‘인간’ 각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인권은 지금 한국 사회의 ‘말과 글’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를 바로 잡는 데서,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작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띠엔 발리바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는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계급의 정치에 발목 잡힌 좌파의 도그마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내가 보기에 인권의 정치는 대단히 급진적인 구호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헌법을 말한다 할 때, 가장 할 말이 많아야할 사람들도 바로 인권운동가들이어야 옳을 것 같다. 정치학자들은 지금 ‘헌법을 민주주의의 품으로’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헌법을 인권의 품으로’라는 슬로건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민주주의는 그 곳으로 가는 길에 붙여진 이정표다.
|
유비쿼터스에 대한 나의 고민과 거의 같은 고민. 이주헌 원장,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현정포럼을 만든 날카로움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정보통신 2등국가도 좋다" 그 슬로건도 좋다. ^^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 다름 아니라 요놈의 컴퓨터 때문이다. 아침에 눈 뜨자 마자 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눈 떠 있는 내 곁엔 인터넷 창도 떠 있다. 이메일은 물론 뉴스와 각종 정보취득에 난 철두철미하게 인터넷에 의존하고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서프라이즈까지 서핑하다 보면 시간 낭비도 심하다. 참 잘못된 습관이다. 요놈 때문에 독서량이 대폭 줄었다. 고작 최신 발간된 전문서적을 틈나는 대로 훑어볼 뿐, 연구보고서까지도 PDF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읽는다. 책이라곤 다들 읽었다는 흔해빠진 '다빈치 코드'를 수 개월째 손에 쥐고 있다가 출장 중에야 겨우 읽었다. 무엇보다도 해외에선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내 직업이 IT라지만, 이토록 난 심할 정도로 조그마한 정보가 필요하다 싶을 때면 당장 키보드부터 만진다. 네이버의 지식DB를 찾는 경우도 자주 있다. 영화예매, 기차표 구매, 은행업무에, 심지어는 벌금까지 인터넷으로 처리한다. 심하게 IT에 종속된 삶이다.
이런 경우를 보고 인터넷 중독이라 하나. 앞으로는 휴대인터넷 WIBRO가 달리는 차에서도 인터넷 이용을 하게 해 준다니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모르겠다. 이것이 내가 추구해 왔던 IT선진국의 모습이었던가. 하하.
내 생활을 지배하는 또 하나는 휴대폰이다. 요놈의 자그마한 단말기는 24시간 나를 지킨다. 침대 옆까지도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이 전화를 통해 난 바깥과 교감하고 산다. 편리하긴 하다. 내 인생을 만드는 가까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이 번호로 날 자주 찾아주어 고맙다. 사무실로 전화하는 분들과는 달리, 심리적으로 정겨움을 느끼는 친구가, 제자가, 그 외 친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반갑다. 아내와 애들은 회의 중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예 SMS 문자로 대신한다. 애들과 주고 받는 문자를 통해 바쁜 와중에 그래도 난 아빠 됨을 확인하곤 한다. 가끔씩은 MP3음악파일도 다운로드 받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친구 찾기'도 한다. 가족의 소재가 궁금할 때이다. '디카' 사진도 곧잘 찍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족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한다. 결국 난 휴대폰을 몸에 지니지 않고는 왠지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전락되었다. 심히 휴대폰에 종속된 것이다. 다행히 발신자 번호(CID) 서비스가 제공되어서 망정이지, 그래서 급히 받지 않아도 좋을 만한 전화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어 망정이지, 요즘 판치는 060 스팸 전화까지 몽땅 날 귀찮게 할 뻔 했다. 이제 곧 화상전화가 가능한 휴대폰이 본격 보급된다니, 이 역시 내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는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진정 내가 바랬던 IT강국의 진면목이었던가.
요즘은 주말을 제외하곤 잘 보지는 못하지만 한 때는 TV도 내 시간을 갉아먹는 원흉이었다. 뉴스 프로그램과 축구중계는 물론, 다큐멘터리와 시사토론 프로그램은 일단 눈에 띄어 보기 시작하면 난 중간에 자리를 뜨지 못한다. 특히 구형 TV를 PDP로 바꾼 후에는 그 선명함이 너무 좋아 더욱 시간을 뺏기곤 했다. 바보상자라더니 정말 난 바보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2년 전에는 갑자기 꼭 필요하지도 않은 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 'Home Theater' 스피커들을 설치하고선 DVD영화는 물론 그냥 봐도 좋을 TV프로그램까지 굳이 스크린으로 보곤 한다. 비디오방에 가기가 귀찮은 날이면 프로젝터를 인터넷과 연결시켜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보는 일도 종종 있다. 물론 큰 화면에 소리까지 웅장하니 생동감은 넘치지만, 집에서조차 꼭 대형 스크린이 필요하냐는 것이 '기계치'인 아내의 표정인 것도 같다. 앞으로는 영화나 방송을 시청하다가 즉석에서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필요한 경우 주문까지 할 수 있는 T-상거래 서비스가 개시된단다.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졌다는 소식이나 대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경고문과 함께 대문 밖을 비추이는 화면이 스크린 구석에 나타나는 홈 네트워킹 시대도 도래한단다. TV보면서, 정보 서핑하랴, 주문하랴, 집 안팎 감시하랴, 어휴, 난 더욱 바쁘게 살 것 같으니 정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이것이 진정 내가 꿈꾸어 왔던 정보통신 일등국가의 문명생활이었던가. 정보통신 이등국가가 차라리 좋지 않았던가? 하하.
그래도 현대 컴퓨터와 휴대폰과 디지털TV의 사용에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요놈들이 일단 우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손으로 통제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머지 않아 눈에 띄지도 않은 컴퓨터들이 내 주위를 바글거릴 것이란다. 빌 게이츠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에서 생산된 컴퓨터는 10억 대쯤 되고 2010년까지는 다시 10억대가 넘게 추가로 만들어질 전망이지만, 이 앞으로 생산될 컴퓨터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기능 상으로만 컴퓨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지지 크기의 회의용 PC, 음악과 영화 감상용 TV식 엔터테인먼트 PC는 물론, 휴대폰이나 자동차의 안의 컴퓨터들과 공항과 소매점에서의 보이지 않은 컴퓨터 등이 생활 곳곳에 있을 것이란다. 이 신형 컴퓨터들이 나도 몰래 날 알아보고 내 가방을 뒤지고 내가 입고 있는 내 건강상태까지도 간파하는 시대도 멀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사람들은 컴퓨터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띌 것이란다. 문자와 언어인식 등 인공지능이 보강되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변을 맴도는 상황도 예측된다. 이미 선진국 소비자들은 무의식 중에 매일 150개의 컴퓨터 기능이 내장된 전자기기와 함께 있다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내일의 모습이다. 오늘이 차라리 행복한가, 아니면 정말 내일을 기대해야 하나. 헷갈린다.
그러나 한편 이와 같은 기술발전은 '글로벌 메가트렌드'일 뿐 아니라 인류의 꿈이 아닐 수 없다. 잘 살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IT만큼 효과적인 도구는 없으리라.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IT는 국민의 먹거리이자 젊은이들의 희망이고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삶이 IT에 종속됨은 생활 습관을 바로 잡아 잘 극복하면 된다. 그래서인지 사실은 정보통신부의 839전략이나 u-코리아 건설계획이 더욱 변화무쌍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면 더욱 반가울 뿐이다. 통신과 방송과 인터넷과 교통과 금융이 완벽하게 연결되어 편리함을 더해 주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리라.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은 컴퓨터 칩들이 어느 곳에나 존재하면서 우리 개개인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던 낱낱이 알아 생활의 도우미가 된단다. 2만불 시대의 주역인 IT는 국가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삶의 편익을 위해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게 만들어 우리나라를 일등 선진국가로 도약시킨다니 얼마나 기대되는가. 아니, 아찔한 전율까지 느낄 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가지만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이러한 모든 논의 중에서 사생활이 얼마나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만큼은 불식시켜야 한다. 정부가 국민에 대한 정보를 과다 보유하고 이를 통해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빅 브러더'의 탄생을 걱정함은 아니다. 전자정부가 제 아무리 확장되고 시스템 기능이 보완되더라도 전자감시사회의 형성만은 우리 국민 모두가 잘 억제해 나가리라고 믿는다. 정부가 시민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문제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정보를 누군가가 오용하고 악용함이다.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신원정보보다는 기업이 확보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한 경제, 건강, 구매관련 정보 등이 훨씬 더 민감하다. 핸드폰 이용정보나 위치정보 등은 더욱 치명적이다. 사생활이 몽땅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예로, 5m 내외의 정확성으로 위치를 알 수 있는 텔레메틱스나 LBS 서비스가 각종 GPS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면 현재 어디로 이동 중이라거나, 어느 식당에서 식사 중이며, 무슨 호텔 몇 호실에 묵으면서 누구와 통화 중인지 등을 알 수 있다. RFID 기술이 본격 보급되면 언제 어디서 무슨 물건을 구매했는지를 알 수 있고, 홈 네트워킹과 연결되면 즐겨 듣는 음악이 무엇이고, 냉장고에 복용하는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수도 있다. 은행 잔고가 얼마인지, 최근 무슨 영화를 시청했으며 누구와 어디로 여행을 다녀 왔는지, 무슨 법규를 위반했는지, 얼마만큼의 부동산을 보유 중인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모두 가능하다는 말이며, 목적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호기심과 잘못된 본능이 어디선가 꾸물거릴 것이라는 예견이다. 연예인들에게만 X파일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사실인즉 나는 정보화의 역작용 --- 예를 들어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나 스팸메일의 범람, 지적소유권의 침해, 그리고 음란정보의 가정침투 등 --- 에 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다. 금융거래에 필수적인 시스템의 보호와 안전 문제 등도 기술적 대응책이 강구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진정 '따뜻한 디지털세상'이 강조해야 할 것은 정보인권을 존중하는 사회제도의 정착일 것이다. 편리함이 다소 줄더라도 외부 시스템들이 나에 관한 정보를 철저하게 오용하지 않을 사회, 익명성이 다소 일시적으로 혼란을 가져 오더라도 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이버 커뮤니티, 생산성 저하효과가 약간 있을지언정 나와 내 가족의 사생활이 절대 침해 받을 수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자, 정보통신 일등국가의 모습이리라.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법과 제도로 미리 안전 장치를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신 정보윤리의식'을 뿌리내리게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정부가 앞장서서 제발 신뢰를 심어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IT복지국가의 기본이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의 감시활동도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부터 새로이 준비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보통신 일등국가'는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주장했던 표어이다. IT로 잘 살고 행복하고 튼튼하고 당당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핵심은 경제강국보다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데 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정보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IT기술문명국가로만 발전한다면 난 차라리 '정보통신 2등국가'로의 회귀를 외치련다. 우리 모두 '따뜻한 디지털세상'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
이주헌(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원장의 블루진 에세이 중
원문 : http://www.kisdi.re.kr/kisdi/fp/yard/essay/EssayView.jsp?idx=282&kind=1
2003년 어느 게시판에 올려둔 거 찾아옵니다. 운동가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이 글 읽으면서 늘 생각합니다.
서준식의 생각 머리말 2003-03-17
너무 당연한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을 쓸 때는 서문을 잘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진중권 등등의 칼럼 모음집을 왠만하면 사지 않는 제가, 이 책을 사게 된 건 오직 서문 때문이었으니까요. 요즘, 딱딱한 책들 읽으면서 눈물 지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 많겠지만, 한 자 한 자 손으로 (아니, 키보드로) 배껴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어서 이 곳에 올립니다. 방장님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