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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권리, 알릴 권리, 알리지 않을 권리

정보인권, 그 다양한 영역들

정보인권이라는 표현이 NEIS 논쟁과 함께 등장하면서, 흔히 정보인권이라고 하면 감시와 검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정보인권에는 매우 다양한 문제들이 포함된다. 사실 정보인권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이다. 국제적으로 정보인권과 비슷하게 사용되는 용어로는 커뮤니케이션 권리(communication rights)가 있다. 말 그대로 의사소통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로 표현의 자유와 정보 및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접근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정보인권은 이렇게 다양한 인권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정보화 시대에는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하는 것이 개인의 정치적•경제적 능력을 결정하기 때문에 정보가 독점되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협받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글리벡 문제다. 글리벡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약품이지만, 이 약품의 제조법을 노바티스라는 다국적 제약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보니 약값이 지나치게 비싸 많은 환자들에게 그림의 떡이 돼 버렸다.

정보 격차 문제도 매우 중요해진다. 농촌이나 산골, 도서벽지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다. 설치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인구가 적어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보에 접근하는 문턱의 높낮이는 더욱 큰 차이로 벌어진다. 이 외에도 미디어나 정보통신 영역에서 독점기업의 문제, 국가간•지역간•계층간의 정보격차 문제, 국가나 기업의 정보공개 문제, 저작권 문제나 오픈소스 문제 등 다양한 정보인권 이슈가 발생한다. 다만 커뮤니케이션 권리 개념으로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과 같은 프라이버시권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지난 1996년 6월 일군의 NGO들이 모여 제정한 커뮤니케이션 권리 강령의 경우, 커뮤니케이션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사회의 민주화에 공헌하게 할 것”과 “커뮤니케이션 구조와 제도, 과정을 민주화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보인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다양한 표현으로 정보화 시대의 인권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시민단체인 진보네트워크센터의 경우 일찍이 “알 권리, 알릴 권리, 알리지 않을 권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002년에는 ‘정보기본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를 표현의 자유, 정보접근권, 정보공유의 권리, 반감시권, 자기정보통제권이라는 다섯 가지 권리로 세분하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초기에 정보화 시대의 시민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를 ‘공적 정보의 공개와 사적 정보의 보호’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으나 이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고 판단, 최근에는 ‘의사소통의 권리와 프라이버시 권리’로 확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자기정보결정권이 취약한 이유

사실 자기정보결정권, 혹은 자기정보통제권은 다른 정보 인권들에 비해 더욱 중요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 여타의 다른 권리들은 정보화 사회가 확대되면서 함께 발전한다. 하지만 자기정보결정권은 정보화 사회가 발전할수록 점점 더 취약해진다. 다양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해서 개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파악하고 향후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최근에는 개개인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고 있다. 현재 개발중인 RFID(전자바코드)라는 기술이 확장되면 모든 물건의 움직이는 위치도 추적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할 수 있는 빅 브라더(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혹은 그러한 사회체계를 일컫는 말)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감시나 자기정보결정권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구체적 이슈가 발생할 때 외면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CCTV 설치를 둘러싼 논란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떳떳하다면 촬영 당한다고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되묻는다. 성범죄나 수능시험 부정과 같은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늘 “개인의 작은 권리보다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면서 유전자정보 데이터베이스도 구축되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감청도 허용된다. 물론 개별 사안만 놓고 보면 그런 주장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입되는 감시 기술은 그 사안에만 쓰이지 않는다. 유전자정보 데이터베이스는 직장이나 보험 가입 때 수많은 사람들을 잠재적 질병 보유자라는 이유로 차별하게 만들 수 있다. 아무리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들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감청이나 CCTV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행동이 위축되게 마련이다. 국가기관의 검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감시하는 일이다.


보편적 다수의 권리에서 다양한 소수의 권리로

지금까지 얘기한 정보인권은 사실 일반 시민들의 권리, 즉 보편적 다수자의 권리다. 그런데 인권 일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보화 사회의 진전에 따라 정보인권에서도 소수자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장애인들의 경우 정보접근권이 주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정보접근권이란 단순히 컴퓨터와 인터넷 접속 회선을 보유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의 유형에 따라 정보접근권의 문제도 서로 다르다. 손이 없거나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대체할 기기가 필요하다.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점자 키보드와 점자를 인쇄할 수 있는 프린터가 필요하다. 또한 시각 장애인들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시각 장애인 전용 프로그램에서는 웹 상의 글자들을 읽어 주는 방식으로 웹 페이지를 읽게 된다. 상당수 웹사이트들이 하위 메뉴를 이미지 파일로 만들거나 심지어 웹사이트 전체를 플래시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제3세계와 관련한 정보인권도 문제다. 서구의 많은 지식들이 사실은 제3세계의 토착 지식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들을 특허라는 이름으로 독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수천 년에 걸쳐 자신들이 발전시켜 온 지식을 어느 날 갑자기 외국 기업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약품이나 농산물 종자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갈취 당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성이 없거나 근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토착 문화나 지식, 언어들이 무수하게 많다. 이런 까닭에 2003년 스위스에서 열린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는 ‘언어적•문화적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았다.

정보화 사회가 진전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소수자 문제, 다양성의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정보인권 역시 이러한 시대 변화에 걸맞게 보편적 다수의 권리에서 다양한 소수의 권리로 점점 더 풍부하게 발전해야 할 것이다.

 

월간 인권 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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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시민자치정책센터 지음,『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 자치운동의 현재와 미래』(갈무리, 2002)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자라려면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하고, 그 뿌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시민자치운동’이다. 뿌리에서 뿜어올리는 영양분 없이는 아름다운 꽃도, 푸르른 잎새도, 빼어난 줄기도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진중권은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 자치운동의 현재와 미래』(갈무리, 2002)의 표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정말 자치운동은 뿌리일 뿐일까? 아름다운 꽃이랑 푸르른 잎새랑 빼어난 줄기는 다른 데 있을까?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난 이 소개글이 이 책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자치운동은 작은 풀꽃이다. 뿌리뿐 아니라, 잎도 줄기도 꽃도 다 갖춘 작은 풀꽃이다. 해바라기나 코스모스처럼 사람들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키큰 꽃들이 아니라, 땅바닥에 붙어사는 짐승들, 곤충들에게 정작 소중한 작은 풀꽃이다.


이 책이 안타까워하는 현실은 “지역 사람들끼리 모여도 지역 현안 얘기할 때는 하품하다가 대선 주자들의 동향과 같은 전국적 이슈, 9·11 테러 같은 세계적인 정세에 관해서 토론할라치면 밤을 새며 불꽃튀는 논쟁을 전개”하는 현실이다. “한편으로 그 관념성 탓에,” “다른 한편으로 중앙파적 사고 탓에” 실천적인 실용주의 정신이 질식하고, 탈중앙적 활동이 천시받는 우리 운동의 현실이다. 이 책은 단언하기를 “관념성과 중앙파적 사고, 정확하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급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시민이니, 진보적 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대립적 개념들도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90년대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운동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도 바꾸기로 전환된 것이다. 옷을 바꿔입긴 했지만 80년대 변혁론의 관점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이미 2년 전에 쓰여진 책인지라, 이 책이 소개한 사례들은 이미 많이 전파되었으며, 더욱 희망적인 사례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마포 성미산 사람들이 그렇고, 뉴타운 광풍에 맞서고 있는 풍동 지구도 그렇다. 전국을 뒤흔든 삼보일배도, 부안 방폐장 반대 투쟁도 지리산 사람들과 공동체와 부안 주민운동에 빚지고 또 빚갚고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런 유의미한 사례들은 만들어지고 전파되지만, 그 사례들로부터 이 책이 끄집어내려던 이야기들은 얼마나 전파되고 있을까? “낮 시간을 지역사회 밖에서 보내야 하는 남성들은 반일시민(半日市民)이고, 지역에서 생활하는 전업주부인 여성이 전일시민(全日市民)”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사회적인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는 반면, 관여하는 개인의 일상이 아주 혁명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치운동의 가치는 얼마나 전파되고 있을까?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사례가 아니라, 이 책이 말하고자 했던 가치들, 그리고 그 가치들을 품고 키워가는 사람들이 모인  시민자치정책센터(http://www.grassroot.or.kr)라는 단체를 우리 지구당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민주노동당 관악갑지구당 소식지 창간준비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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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데서 고생하는 정보통신망법...--;;

대통령 비방글을 올린 현직 경찰관이 서울지검 컴퓨터 수사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죄목은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상의 명예훼손죄. 최고형이 징역 7년, 자격정지 10년 또는 벌금 5천만원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죄목이다. 야간 근무중에 술먹고 취한 김에 정권에 대한 불만을 "대통령이 고정간첩"이니, "미국에 의해 참수될 날이 멀지 않았다"느니 하는 막나가는 표현을 사용하여 표출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고정간첩이라니, 물론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의 활동에 대해 지나친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구속까지 하는 것은 취중에 "김일성 만세" 외쳤다 끌려가던 막거리 보안법 시절과 뭐가 다른가? 이미 파면까지 당한 마당에. 참고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도 징역 7년이다.

 

구속의 과도함과는 별도로 이 사건이 재미있고도 어이없는 것은 우리 공직사회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경찰들이 야근 중에 술먹고 근무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규정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별 문제 아니라고 덮어두는 분위기가 지배적일 것이다. 그러니, 정작 근무 중에 술 먹은 건 놔두고, 명예훼손으로 구속한 것이다. 술 먹은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사실 자기들도 맨날 먹는 게 낮술이니까) 감히 경찰이 대통령 욕을 하다니 싶었던 게다. 구속된 경찰도 마찬가지다. 술 먹고 쓴 글임을 자백했을때, 그 심리는 뻔하다. 대통령 비방한 건 중죄라는 생각이 든 반면, 술 먹은 건 별로 큰 죄라고 생각 안했던 거다. 그래서, 술 먹고 한 짓이라고 변명해보고 싶었던 게다. 잡아가둔 쪽이나 잡혀간 쪽이나 의식 수준이 똑같다. 근무기강은 오간데 없지만, 권위주의는 유지된다. 덕분에 정보통신망법이 엉뚱한 데서 고생하게 되었다.

 

참고로 상황은 다르지만 뜻하는 바는 비슷한 이야기 하나..

 

경찰이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 차량을 수색해서 문제가 되었다. 공무원 노조 파업 관련 수배자를 숨겨주었을 거라는 이유에서이다. 파업 와해를 위해 이미 블랙리스트에 위치추적 등 온갖 불법적 수단들이 동원되고 있다고 폭로된 바 있다. 이 경우도 분명 영장이나 본인 동의 없는 불법 수색이었을 것이다. 문제가 되어 마땅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건이 보도되는 방식이다. "경찰, 현역 국회의원 차량 수색 파문" .. 국회의원 차량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 수색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설령 범죄용의자의 차량이라도 현행범이 아니고서는 영장없이 수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심검문, 불법 수색이 워낙 만연한 사회다보니, 현역 국회의원 차량 정도 되어야 겨우 파문이 인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웹사이트 <정보인권 레이더> 게재 (200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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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감시의 민주화?

미국의 정보화 이론가인 하워드 라인골드는 지난 해 발표한 저서 「참여 군중 Smart Mobs」에서 일본의 휴대폰 문화를 관찰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 제 시간에 나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나온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늦게 나오는 것에 크게 불만이 없다. 아직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문자메시지로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제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오거나 아니면, 배터리가 닳아서 휴대폰을 받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잘못'이다."


유비쿼터스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 가능할 정도로 정보통신 그물망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세상이 눈앞에 다가온다.


20세기 중반, 정보화 사회가 예견되면서 거대한 감시 사회에 대한 공포 또한 예견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감시를 막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도 곧바로 시작되었다. '자기정보통제권,' 즉 자신의 정보를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계약, 즉 개인에게 자기 정보의 사용에 대한 '동의'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프라이버시 이슈가 등장할 때 간간이 언론을 통해 듣게 되는 1980년 'OECD 가이드라인'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그리고 최근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더욱 커져가는 기업 권력의 힘 앞에서, 개인의 동의가 얼마나 무력한지가 명백해졌다. 때문에, 최근에는 감시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권을 의미하는 역감시권이 제안되었다. 시민사회의 집단적 권력으로 자기정보통제권을 보장할 대항 권력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감독기구를 명문화한 1995년 EU 지침이 그 예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프라이버시가 단순히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해결책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산형 네트워킹을 지향하는 유비쿼터스가 특정한 감시 권력을 확대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역사적으로 감시는 오히려 민주화되고 감시를 행하는 권력은 분산되어 왔다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오히려, 유비쿼터스 시대의 문제는 감시의 대상이었던 시민사회가 스스로 감시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상상을 해 보자. 머지않아 화상 휴대폰이 상용화되면, 누구나 그걸 들고 다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그 휴대폰에는 화상이 전송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부착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고 화상은 전송되지 않았다고 하자.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화면을 꺼 놓은 거야? 어디 못 갈 곳에라도 간 것 아냐?" 화상 전송장치를 끄는 것은 결국 뭔가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본질은 시민사회가 온라인 상태를 강요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중세 시대의 교회처럼,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직장처럼, 유비쿼터스 시대에 온라인은, 가지 않으면 주위 사람으로부터 떳떳할 수 없는 곳이 되어갈 것이다. 때문에, 온라인 상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개인의 선택'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거대 권력이 아닌 시대 정신 자체가 문제인 만큼, 시민 통제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시의 눈길에 몸을 맡기고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는 것, 이것이 유비쿼터스 시대에 프라이버시가 겪을 위기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선택권'도, '시민통제'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직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떤 법제도적 장치, 기술적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행히 시민 사회는 해방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을 발전시켜 왔다. 지금까지 국가 권력에만 요구해왔던 그 원칙을 서로에게 적용할 시점이 온 것이다. 자기 검열이 내면화되는 만큼,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면화해야 한다.

 

중앙대 대학원신문 제190호(2003년 10월 8일)

실제로는 분량이 넘쳐 조금 잘린 채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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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사고, 사고 로이로제 그리고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활동가로 살아가다 보면, "사고 노이로제"에 걸리게 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대형 사고가 나면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사고가 두려워서? 그게 아닙니다. 대형 사고에 항상 뒤따르는 예의 "안전의 논리"가 두려운 겁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또 어떤 시스템들이 도입되어 사람들에게 감시의 눈을 들이대고 인간 존엄성에 공격을 가할 것인지가 두려운 겁니다.

 

잘 알려지지 않고 지나갔지만,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안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 달 초 서울지하철공사가 종합화상정보시스템이란 걸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체 객차에 CC-TV를 설치하겠다는 겁니다. 한 번 따져보죠. CC-TV가 있었으면 대구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Privacy International) 대표 사이먼 데이비스(Simon Davies)는 CC-TV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CC-TV의 범죄 예방 효과는 극히 불확실하다. 술이나 마약에 취해 비이성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는 CC-TV가 있어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때, CC-TV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추적하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면, CC-TV가 설치된 장소를 피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결국 CC-TV로 막을 수 있는 범죄는 소매치기나 좀도둑같은 소수의 기회주의적 범죄들 뿐이다."

 

그런 의문이 가능할 겁니다. 대구 참사 같은 대형 사고 앞에서 CC-TV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이야기하는 건 너무 배부른 소리가 아니냐고요. 어쨌든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다소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서 프라이버시 활동가는 종종 극단적 개인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권력을 거부하고 분권과 자치·연대의 정신을 존중하는 무정부주의자로 취급받는 것은 프라이버시 활동가에게는 사실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이타적인 당신을 위해 사이먼 데이비스가 지적하는 CC-TV의 다른 문제점 하나를 들어보죠. "흔히들 CC-TV는 기계이므로 편견없이 공정한 감시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CC-TV 카메라의 초점은 '특이한 사람'들에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특이한 사람'들의 범죄만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는 사회적 편견을 더욱 강화시키고, 실질적인 차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지하철 참사의 용의자가 정신지체 장애인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보도가 나온 후 지금까지도 정신지체 장애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이 계속됩니다. 그가 실제로는 중풍 환자였으며, 정신지체 장애인의 범죄율이 일반인의 범죄율에 비해 턱없이 낮은 0.2%에 불과하다는 사실들이 보도되었음에도 말입니다.

 

참사 이후 각 전철역에는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승객들 중 부랑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어김없이 검문을 합니다. 불심 검문이란 결코 강제될 수 없는 국가 폭력이며 개인에게는 더없는 인격 침해라는 사실은 이 순간 가볍게 무시됩니다.

인터넷 대란이 발생하자 정보통신부는 로그 기록을 조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겠다고 나섰습니다. 로그 기록이 가장 엄격하게 보호되어야 할 통신비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이 순간 아무래도 좋습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아랍계 인종에 대한 무차별 검거와 인종 차별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같은 미국 시민이 아니라 잠재적인 적일 뿐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한 셈입니다. 프라이버시 활동가들의 "사고 노이로제"는 이같은 "안보 노이로제"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보"라도 보장되었나요? 그래서 인터넷은 쌩쌩 잘 돌아가나요? 그래서 지하철은 안전해졌나요? 그래서 미국은 평화로워졌나요? 허점투성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놓고 1년에 72번이나 패치를 받을 것을 강요하는 MS의 후안무치함은 그대로인데도. 승객의 목숨을 화물이나 다름없이 취급하는 이윤의 논리도, 한 개인이 끔찍한 범죄를 계획하게 만든 절망적인 경제적 불평등 구조도 그대로인데도.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에는 아랑곳없이 이라크 침략을 강행하는 미국의 안보논리에 세계 시민들의 분노가 날로 높아만 가는데도.

 

그러니, 결국 문제는 몇몇 낙오자나 문제아의 존재가 아니라, 위험 사회를 향해 날로 치닫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해답은 누군가를 적대시하는 안전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존중하는 시민들 사이의 연대의식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프라이버시 활동가들의 "사고 노이로제"의 진실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는데 정보통신부가 인터넷 실명제의 법제화를 추진하겠다는 뉴스를 전해들었습니다. 인터넷의 각종 유언비어나 명예 훼손을 방치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명예 훼손. 물론 중요한 프라이버시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 왜 나의 프라이버시 권리가 위협받아야 하는지요? 그것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 소수자의 인권과 사회문화적 다양성의 기초가 되는 기본권인 익명의 권리가 말입니다. 잘못한 일이 없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요?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잘못한 일이 없다면 왜 유언비어나 명예훼손 따위를 두려워합니까? 나에게 바르게 살라고 강요하지 말고 당신이 한 점 부끄럼없이 살면 될 것 아닙니까? 법을 제정할 힘을 가진 당신이!!

 

그래서 많은 경우 프라이버시 문제는 뜯어보면 권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서준식 선생님이 얼마 전 펴낸 책 머리말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논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합니다.

 

주간 문화사회 제31호(2003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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