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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10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미뜨라
  2. 2007/06/13
    냉장고 없이 여름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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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9/02
    라오스와 한국 도로 표지판
    미뜨라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여성노동자


  어느 직장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백여 명이 넘는 가입 대상자 중에 겨우 세 사람만으로 조합이 명맥을 유지한다. 사용자의 탄압에 바로 맞설 용기가 없는 대다수는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 물론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술자리에서는 조합원들의 기개와 헌신성, 그리고 신성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거품을 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가끔 후원회비와 투쟁기금을 몰래 건네주는 이도 있다.

  이 직장에는 여성이 지극히 적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전에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여성도 많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는 결혼을 이유로 여성 직원을 함부로 내쫒지는 못했다. 비록 노동조합에 여성 조합원이 한 명도 없지만 그랬다. 결혼과 함께 해고 위기에 빠졌던 여성이 노동조합에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노동조합에서는 상급단체에 보고하여 함께 여성 노동자의 해고를 막기 위해 나섰고, 당시 포항여성회와 여성부 등에도 다리를 놓아주어서 결국 해고를 막았다. 그 여성은 노동조합에 감사했다.

  이 직장엔 남성이 90% 이상 차지하다보니, 한동안 여성 화장실조차 없었다. 소수자인 여성은 관리자에게 감히 여성 화장실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조차 못했다. 윗사람들 눈밖에 나서 좋을 게 없다는 여성들의 의견이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이 나서서 여성 전용 화장실을 만들어주었다. 여성들은 노동조합에 감사했다.

  몇 년이 지나도 노동조합원은 한 명밖에 늘지 않았다. 그만큼 사용자 측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과 각종 음해가 심했다. 결국 상급단체 일을 하던 한 조합원을 말도 안되는 사유를 들어 해고하였다. 사용자는 조합원을 해고하기 위해 비조합원들을 동원하였다. 비조합원들은 ‘사사건건 원칙대로’ 하기를 주장하는 한 조합원 때문에 최고 관리자가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직원 사이 위화감을 조성하므로 노동조합원을 중징계하라는 연서명을 했다. 이 서명에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았던 여성 노동자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결국 소수자인 여성들은 자신들보다 더 열세인 노동조합에 대해 함께 칼을 잡고 내친 일에 나선 것이다.

  제 4회 포항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알게 될 거야>는 비정규직 여성 교육노동자(계약직 교사)가 중학교 여학생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게임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나마 자기보다 더 힘없는 여학생을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억압하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은 교사보다 낮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밀리고, 여성은 남성에 억눌리는 게 현실이다. 영화는 가상의 극으로 구성되었지만, 위에서 말한 이야기는 2007년 현재 포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실화다. 영화보다 현실은 더 슬프고 극적이다.


  포항을 벗어나보자. ‘이 랜드 그룹은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즈음하여 80만원 월급으로 10년 넘게 부려먹은 비정규직 노동자 등 1천여 명(주로 여성 노동자)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였다. 특히 비정규직 발효 시점을 역산하여 남은 기간에 따라 계약을(심지어 일주일 혹은 하루 계약까지 했다) 맺고 이를 해고의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하는 악덕 기업주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룹 회장은 교회에 헌금으로 130억 원을 갖다 바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랜드 상황을 아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교육노동자 ㅅ 의 글 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여성주의(페미니즘)는 이런 생존의 위기에 처한 노동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랜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 ’남편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이 함께 풀어갈 때,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연대하여 함께 동참할 때, 학부모, 교사, 학생들이 주체가 될 때 해결되는 법이다.


  이주 여성

  

 ‘베트남 여성,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은 농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래카드다. 이 플래카드는 지난 6월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에 공개되어 한국의 수많은 국제 결혼 부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결혼 중개업자가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동안 막상 국가나 시민단체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충남 당진군의 사례는 이런 불유쾌한 기사에서 모처럼 희망을 찾게 해준다.

  <이주여성이 만드는 여성영화제작 워크숍>은  당진군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자들을 모아서 미디어 교육을 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감독, 연출, 촬영, 출연해서 만들게 된 작품이다. 상업적 제작 시스템을 거부하고 아주 적은 예산으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독립영화(인디 다큐)를 만든 것이다.

  이들의 짧은 작품을 보면서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꿈(파랑새)을 찾아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여성들이 겪었던 외로움과 문화적 갈등, 소통의 부재를 절감한다. 심지어 십년 이상 한국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 한국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이주 여성들 대부분은 농촌 지역에서 집에만 갇혀 있는 일이 일상이다. 우리는 동남아시아 인과 맺는 국제 결혼에 대해서 비판만 하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하지는 않았을까?

  비록 서울여성영화제에서 기획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후원하여 짧은 기간에 만든 인디저널리스트 교육이지만, 그 결과의 반향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교육 기간 내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한 이주 여성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웃고 울며 행복하였다. 게다가 낯선 컴퓨터를 배우고 영화까지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생애 최고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동한 한국을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을 이주여성들에게 작으나마 보람과 긍지를 가지게 한 기획이라고 보인다. 환상을 쫒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타개해 나갈 적극적 의지를 길어주는 무기가 되었다.


포항, 그리고 여성


  포항에는 이주 여성이 없을까? 성매매와 관련된 한터 여성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없을까? 밤늦도록 자율학습에 시달리고,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이른 아침 통근열차에 짐을 싣고 번개 시장에 농산물을 팔러 나오는 농촌 할머니들의 삶의 애환은? 사랑을 찾아 밤거리, 나이트 클럽을 찾는 중년 여성들의 외로움과 하소연을 들어줄 이는 없을까?

   이번 포항여성영화제의 주제가 <그녀․ 우리․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제에 참여하면서, 다음 영화제에서는 좀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지역 여성 얘기보다 <포항 여성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였다. ‘포항 여성’의 얘기를 통해 포항이 바뀌고, 포항이 바뀌므로 세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성희롱 예방 교육용으로 만든 <화기애애>는 중고등학생들이나 노동조합, 직장, 단체에서 상영하고 토론을 겸한 교육을 하면 좋을 것이다. <생리해서 좋은 날>도 여성은 물론 여성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남성들이 보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게 하는 영화다. <애니메이션 모음>은 여성주의 시각에서 만든 독특한 애니메이션으로 포항에서 접하기 어려운 영상을 소개한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잘돼 가? 무엇이든>과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도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을 재미있는 극으로 만들어서 볼만 했다.

  네 번째로 맞는 포항여성영화제가 해가 거듭할수록 내용과 진행 면에서 진보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포항여성회 활동이 그만큼 지역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주여성센터 활동이 활발해지고 한미 FTA 반대 운동, 지역의 노동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등 진보적 여성운동에 앞장서고 있으므로 포항 시민들이 가진 기대는 더 클 것이다. 첫날 개막식에 참여한 여러 단체들의 관심은 그것을 반영한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포항여성영화제를 위해 노력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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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없이 여름나기

냉장고 없이 여름나기


  교무실에 선풍기가 들어왔다. 교실엔 이미 지난 주부터 선풍기가 돌기 시작했다. 섭씨 삼십 도를 넘나드는 때 이른 더위 탓이리라. 하지만, 나에게는 다시 선풍기와 에어컨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걸 의미한다.

  새삼스레 가족과 혼자 떨어져 자취 생활이 어느새 두 해 여름에 접어든다. 지금 우리 방에는 선풍기는 물론 냉장고도 없다. 우리 방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건 라디오와 휴대폰 분이다. 화장실과 부엌으로 난 문을 빼놓곤 그 흔한 창 하나 없이 단절된 어두운 공간이다. 

  작년에는 쓰다 버리는 냉장고를 구하기 위해 게시판에 광고도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끝내 나와 인연이 맞는 냉장고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식중독 한 번 걸리지 않고 무사히 여름을 보냈다.

  얼마 전에 우리 동네 중고 물품 가게에 들어 냉장고 값을 물어보니 최소 팔 만원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돈도 돈이지만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떨떠무레하게 대답하는 주인(직원?)의 말에 더 이상 물어볼 마음도 없이 나와 버렸다. 

  그래~ 올해도 냉장고 없이 한번 지내보자. 밥은 이틀 치를 넘기지 않게 짓는다. 어릴 적에는 보리를 미리 삶아 시원한 곳에 매달아 놓고 쌀밥을 지을 때 얹어서 먹었다. 그런데, 여름, 특히 장마철에 가끔 쉰 밥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땐 밥을 다시 끓여서 먹으면 괜찮았다. 김치는 일 주일 정도 지나도 먹을 만하다. 다른 밑반찬은 사흘을 넘기지 말고 먹어야한다. 또, 반찬은 매끼마다 먹을 만큼 덜어서 먹으면 상하지 않고, 국도 마찬가지다.

  또, 새로운 방법이 생각나서 올해는 실천하는 게 있다. 아침에 도시락과 함께 일용할 반찬을 직장으로 가져가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퇴근할 때 다시 가져가서 저녁과 아침을 먹고 다시 가지고 오면 된다.

  찌개와 간단한 요리를 위해 필요한 마늘과 고추, 파도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으면 쉽게 상한다. 특히 시중에 파는 깐 마늘도 사흘 정도만 밖에 두면 당장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 이런 양념도 마찬가지로 직장 휴게실 냉장고에 잠시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서 요리를 하면 된다.

  유월이 지나면 텃밭에서 고추, 파, 상추, 쑥갓, 근대, 열무, 배추, 깻잎 등을 매일 바로 수확할 수 있어 양념이 상할 염려는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올 가을에는 우리 밭에 양파와 마늘을 한번 심어봐야겠다. 

  냉장고 없이 살면 좋은 점을 생각해본다. 일단 전기세가 적게 나간다. 물론 내가 냉장고를 쓰지 않는다고 공동 생활하는 다가구 주택에서 전기세를 적게 내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고 전기세를 적게 내야 하는는 건 사실이다. 다음으로 방이 조용해서 좋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않아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셋째, 음식을 적게 섭취하게 된다. 냉장고 없이 일식 삼찬 이상 해먹기 어렵다. 기껏해야 두 가지 반찬이면 족하다. 따라서 소식을 하게 되고 건강에도 좋다. 마지막으로 계획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밥을 할 때 이틀 이상 넘기지 않게 쌀을 안치려면 항상 하루, 이틀 뒤를 생각하면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현재는 항상 긴장되고 최선을 다하며 살게 마련이다.

  냉장고가 있어야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을 버리면 얼마든지 냉장고 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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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연이다

 

  누구나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리운 사람을 만날 때 대부분 눈물마저 흘리지 않는가. 

  김광화도 내가 무척이나 궁금하여 보고 싶었던 친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79년 봄 성남에서다. 노동자와 함께 배우고 공부하는 야학에서 그와 같은 강학으로 만났다. 하지만 채 여섯 달도 넘기지 못하고 우리는 함께 성남경찰서 취조실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보름 뒤에 구속취소로 풀려난 뒤 나는 지방으로 내려갔고, 이어 징집과 투병 등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그 역시 군대에 끌려갔고, 우리 또래였던 한 학강은 다음 해 이화여대 앞에서 분신하였다. 나는 병원에서 광주 학살 소식을 접했고, 역시 암울한 병실에서 김종태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후 십년이 채 되지 않아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온 나라를 흔들었다. 톨스토이가 말한 인생의 학교, 감옥과 병원, 그리고 군대를 겪은 뒤에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90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지방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방에서 생활하면서 공동체, 우리 문화, 환경,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세상의 변화, 교육노동운동 등이 내 화두였고 주된 활동 내용이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몸은 더욱 건강해졌고 다시 서울에 올라가 잠시 생활하게 되었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시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옛정이기도 하지만, 70년대 혁명을 얘기했던 ‘동지’들이 보고 싶었다. 하나, 둘 찾아보았고 술을 마시며 못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세월은 많이 변했다. 당시에도 많은 논쟁을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니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 드디어 김광화를 찾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주에 살고 있었다. 10여년 전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질 때 살고 싶은 후보지였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그가 있다고 했다.  나도 변했겠지만, 그도 변해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가 우리 집으로 책을 하나 보내왔다. ‘귀농 부부 장영란․ 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 <아이들 자연이다>

  이 책을 우리 아들 찬이가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주말을 맞아 집에 가니 ‘아빠, 내 얘기가 이 책에 나와요.’ 한다. 그 구절을 옮겨본다. 


  “그리고 일요일이 왔다. 그런데 이 날, 정말 내게는 뜻밖의 전화가 왔다. 서울 살 때 알고 지내던, 이십 년도 더 지난 옛 친구였다. 친구는 우리 집을 오고 싶다 했다. 편할 때 오라고 했더니 당장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 친구에게는 상상이 또래 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는 서울에서 살지만 신기하게도 게임을 전혀 안 한다고 한다. 그 덕인지 이날 상상이는 게임에 대한 중독증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손님은 참 뜻밖이고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우리 아이 생명을 북돋아주는 고마운 손님이 아닌가”


  내가 왜 그날 갑자기 무주로 내려갔는가? 김광화 부부 못지 않게 나도 아내와 내 아이 교육을 두고 많이 싸운다. 학원에 보내지는 않지만, 아내는 집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싫어하는 수학 문제를 맨날 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찬이가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억지로 시켜서는 안된다는 본다. 두 사람의 입장이 너무 팽팽하여 도무지 해결될 빌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광화라면 나보다 훨씬 쉽고 설득력 있게 답을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온 식구가 함께 무주로 달려간 것이다. 그뒤 아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서 친구를 만난 보람이 있는 셈이다.

  김광화는 딸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난 친구를 잘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거든, 내성적인데다 빡빡 깎은 머리에 흉터가 있어 낯을 많이 가렸지. 고등학교 때는 하숙을 같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유일했지.

  그런데 대학은 많이 달랐어.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많이 있었지. 여학생들도 알게 되고, 근데 그때는 친구라기보다 동지를 사귄 셈이지, 학생운동이란 동지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사실 70년대에 ‘동지’라는 말을 거의 부르지 못했다. 정말 불온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광화와 만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서로 학교가 달랐고 생활 근거지도 같이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그렇게 찾고 싶었던가?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 밤의 대화를 기억한다. 밤새 토론하며 새벽에 이르러 그와 또 한 선배와 어떤 일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게 20년이 지나 30년이 다 되어서 광화가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지금 농사를 짓고 홈스쿨링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교육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아내는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밤늦게 들어온다.

  다시 2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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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치적 입장이 이렇다고?

Your political compass

Economic Left/Right: -6.63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5.64

Authoritarian
Left





















Right
Liberta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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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엠리업 가든빌리지와 반찬나라

2006년 여름 한 달 간의 앙코르 여행 기록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 가족 여행

기간 : 7월 20일(목)-8월 18일(금) 29박 30일

장소 : 인천-태국(방콕-깐짜나부리-나컨빠톰-쑤코타이-씨 쌋차날라이-싸완클록-우돈타니-반치앙-나컨파놈)-라오스(타캑-싸완나켓-빡쎄-짬빠싹-씨판돈)-캄보디아(스뚱뜨렝-꼼뽕짬-씨엠리업-바탐봉-씨쏘폰)-방콕-인천


8월 12일(토) 스무 넷째 날

  모처럼 늦잠을 잤다. 매일 하던 아침 산책도 걸렀다. 원래 오늘 바탐봉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하루 더 있기로 했다. 아무래도 미스타 콩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는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찬이는 어제 수영을 너무 오래한 탓으로 등이 따갑다고 하여 오늘은 수영장이 필요 없겠다고 한다. 그래서 체크아웃 하고 가격이 싼 다른 게스트하우스로 옮기기로 했다. 호텔 앞에 죽치고 있는 뚝뚝 기사에게 <롱 라이브 게스트하우스>를 아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 그 때, 우리가 씨엠리업에 도착한 날 버스 터미널에서 프리덤 호텔까지 태워준 안경 낀 뚝뚝 기사가 다가와서 자기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물론 그곳까지 가는 뚝뚝은 무료라고 한다. 소개료를 챙기려는 것이다. 그가 데려다 준 곳은 올드 마켓에서 비포장 길을 좀 더 가서 가든 빌리지 게스트하우스(#434 Stung Thmei, Siem Reap)다. 방을 보여달라고 하니 선풍기 방으로 안내한다. 큰 침대와 작은 침대가 함께 놓여 있는 209호는 창문이 두 곳에 있어 환기가 잘 된다. 이 방을 5달러에 묵기로 했다. 함께 보여준 10달러 에어컨 방은 오히려 창이 하나뿐이라 환기가 안 되어 퀴퀴한 냄새가 난다. 물론 싸구려 방이라 수건 두 장 주는 것 외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작은 탁자 하나가 있고, 옷을 걸 곳은 있어 최소한의 생존에는 지장이 없다. 이럴 때는 우리가 준비한 실내화, 비누, 이불 등을 준비해서 사용하면 된다. 아래층에 있는 컴퓨터 두 대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지만, 웬만해선 빌 때를 찾기 어렵다. 3층에 있는 옥상은 썬셋바(Sunset Bar)로 사용된다. 바람이 불어 무척 시원하다. 가든 빌리지는 1달러에서 13달러까지 방을 구할 수 있다. 공동 욕실을 사용하는 도미토리에는 혼자 1달러에도 잘 수 있다.    


* 가든 빌리지 게스트하우스

http://www.chaioffroadtrip.com/Garden%20Village.htm

전화: +855 12 21 73 73



  점심은 반찬나라에 가서 먹었다. 제육볶음이 10 달러다. 한국에 비해서도 비싼 가격이다. 다만, 공기밥을 세 개나 그냥 준다. 전라남도 화순이 고향인 주인 아줌마가 직접 담근 된장과 김치 등이 맛있다. 막걸리도 빚어서 판다.(4불, 6불). 콩나물도 직접 키운 것이라 신기하다. 집세가 월 550 달러이고 전기세가 집세보다 더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물가가 비쌀 수밖에 없다. 반찬도 한국에서 맛보는 입맛 그대로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고추로 만든 장아찌도 잃어버린 입맛을 되살리게 한다.


  <반찬나라 메뉴>

-식사류

4$ : 콩나물 국밥, 콩나물 돌솥밥, 청국장, 북어국, 김치찌개, 된장찌개, 열무비빔밥, 제육덮밥, 오뎅국, 잔치우동

5$ : 오징어덮밥, 떡볶기, 생선구이

부대찌개는 10$/15$

동태찌개는 15$/20$

-안주류

콩나물 해물찜 15$/20$

10$ : 홍어무침 , 오징어볶음, 골배이무침, 북어찜

낙지볶음 15$/20$

오삼불고기 볶음 15$/20$

해물탕 15$/20$,

8$ : 해물파전, 두부김치

-주류

막걸리 4/6$, 소주 4$, 맥주 3$, 냉커피 1$


  자전거를 타고 올드마켓 주변 환전소를 둘러 보았지만 모두 1달러에 4,100 리엘이다. 오히려 꼼뽕짬보다 환율이 못하다. 서점에 들러 캄보디아 관련 책을 한 보따리 36달러어치 샀다. 할인 해달라고 하니 겨우 2달러를 깎아준다.


  프린스 앙코르 호텔에서 최 선생과 가을토끼 부부를 만났다. 일정을 마치고 8시 40분에 스타 마트에서 만나기로 하고, 여행사에서 바탐봉 가는 배표를 끊고(12달러) 우리는 술집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피자에 맥주를 시켜서 먹었다.


  시간이 되어 스타마트에 도착하니, 우연히 전*미, 이*지 팀과, 참 팀을 모두 만났다. 그리고 사연을 듣고 잠시 후에 미스타 콩이 합석한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였다.


  다시 레드 피아노에 모여 얘기를 나누다. 가을토끼님이 계산을 하였다. 인터넷을 하고 돌아왔다. 게스트 하우스 3층 바(Sunset Bar)에는 서양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서 바탐봉으로 가야 한다.


* 환전


 -외환은행 2006년 7월 19일 환전 클럽 이용

  1달러 964.47 원(고시 환율 975.37원에서 사이버 환전으로 65% 할인율 적용)

 -라오개발은행(타캑) 2006년 8월 1일, 1 달러=10,020 낍

 -빡쎄 란캄 호텔 2006년 8월 5일, 1 달러=10,000 낍

 -1달러 : 4,136 리엘 2006년 8월 8일, 꼼뽕짬 환전소


* 연오랑 세오녀 가족의 다른 여행기는 http://cafe.daum.net/meetangkor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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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와 한국 도로 표지판

라오스 루앙프라방 거리 표지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 나라에서는 항상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곳에서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서울 당산중학교 앞 표지판을 보세요.

 


길을 건널 때 혼자만 건너는 게 아니겠죠?

함께 건너는 표지판도 있군요. 먼저 라오스 판 표지.

 


 

 

 

아버지가 딸 손을 잡고 건네주고 있군요.

 

우리 나라 서울 표지판을 볼까요?

 


엄마가 아들 손을 잡고 건네주고 있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있는 표지판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네요. 아이가 둘 일 경우.

 


참 우리 나라 어머니들 훌륭하십니다. 아이 둘씩 데리고 길을 건너갑니다.

아버지는 무엇하고 있을까요?

 

라오스와 한국

어느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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