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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27
    아이들은 자연이다
    미뜨라
  2. 2007/03/05
    다시 찾은 상하이2-물가가 비싸
    미뜨라
  3. 2007/03/04
    다시 찾은 상하이1-여행 준비
    미뜨라

아이들은 자연이다

 

  누구나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리운 사람을 만날 때 대부분 눈물마저 흘리지 않는가. 

  김광화도 내가 무척이나 궁금하여 보고 싶었던 친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79년 봄 성남에서다. 노동자와 함께 배우고 공부하는 야학에서 그와 같은 강학으로 만났다. 하지만 채 여섯 달도 넘기지 못하고 우리는 함께 성남경찰서 취조실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보름 뒤에 구속취소로 풀려난 뒤 나는 지방으로 내려갔고, 이어 징집과 투병 등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그 역시 군대에 끌려갔고, 우리 또래였던 한 학강은 다음 해 이화여대 앞에서 분신하였다. 나는 병원에서 광주 학살 소식을 접했고, 역시 암울한 병실에서 김종태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후 십년이 채 되지 않아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온 나라를 흔들었다. 톨스토이가 말한 인생의 학교, 감옥과 병원, 그리고 군대를 겪은 뒤에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90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지방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방에서 생활하면서 공동체, 우리 문화, 환경,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세상의 변화, 교육노동운동 등이 내 화두였고 주된 활동 내용이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몸은 더욱 건강해졌고 다시 서울에 올라가 잠시 생활하게 되었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시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옛정이기도 하지만, 70년대 혁명을 얘기했던 ‘동지’들이 보고 싶었다. 하나, 둘 찾아보았고 술을 마시며 못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세월은 많이 변했다. 당시에도 많은 논쟁을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니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 드디어 김광화를 찾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주에 살고 있었다. 10여년 전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질 때 살고 싶은 후보지였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그가 있다고 했다.  나도 변했겠지만, 그도 변해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가 우리 집으로 책을 하나 보내왔다. ‘귀농 부부 장영란․ 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 <아이들 자연이다>

  이 책을 우리 아들 찬이가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주말을 맞아 집에 가니 ‘아빠, 내 얘기가 이 책에 나와요.’ 한다. 그 구절을 옮겨본다. 


  “그리고 일요일이 왔다. 그런데 이 날, 정말 내게는 뜻밖의 전화가 왔다. 서울 살 때 알고 지내던, 이십 년도 더 지난 옛 친구였다. 친구는 우리 집을 오고 싶다 했다. 편할 때 오라고 했더니 당장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 친구에게는 상상이 또래 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는 서울에서 살지만 신기하게도 게임을 전혀 안 한다고 한다. 그 덕인지 이날 상상이는 게임에 대한 중독증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손님은 참 뜻밖이고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우리 아이 생명을 북돋아주는 고마운 손님이 아닌가”


  내가 왜 그날 갑자기 무주로 내려갔는가? 김광화 부부 못지 않게 나도 아내와 내 아이 교육을 두고 많이 싸운다. 학원에 보내지는 않지만, 아내는 집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싫어하는 수학 문제를 맨날 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찬이가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억지로 시켜서는 안된다는 본다. 두 사람의 입장이 너무 팽팽하여 도무지 해결될 빌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광화라면 나보다 훨씬 쉽고 설득력 있게 답을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온 식구가 함께 무주로 달려간 것이다. 그뒤 아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서 친구를 만난 보람이 있는 셈이다.

  김광화는 딸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난 친구를 잘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거든, 내성적인데다 빡빡 깎은 머리에 흉터가 있어 낯을 많이 가렸지. 고등학교 때는 하숙을 같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유일했지.

  그런데 대학은 많이 달랐어.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많이 있었지. 여학생들도 알게 되고, 근데 그때는 친구라기보다 동지를 사귄 셈이지, 학생운동이란 동지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사실 70년대에 ‘동지’라는 말을 거의 부르지 못했다. 정말 불온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광화와 만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서로 학교가 달랐고 생활 근거지도 같이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그렇게 찾고 싶었던가?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 밤의 대화를 기억한다. 밤새 토론하며 새벽에 이르러 그와 또 한 선배와 어떤 일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게 20년이 지나 30년이 다 되어서 광화가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지금 농사를 짓고 홈스쿨링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교육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아내는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밤늦게 들어온다.

  다시 2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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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상하이2-물가가 비싸

 2. 물가 비싼 상하이


2월 20일(화)

  아시아나 항공은 엔진에 이상이 생겨 정비를 해야 한단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출발하였다. 한 시간 기다린 승객에겐 보답으로 음료를 먼저 서비스한다. 하긴 테레사님은 상하이 공항에서 열여섯 시간이나 대기했는데,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상하이는 생각보다 가깝다. 겨우 한 시간 반 정도 비행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푸둥[浦東] 공항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손님도 적다. 수속도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예전에 상하이에 왔을 땐 홍차오[虹橋] 공항에 내렸다. 당시 공항에 내렸을 때 많은 조선족 사람들이 민박 숙소 호객을 위해 몰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대신, 여러 여행사 직원들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다. 현지에서 민박을 정하려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중학교 1학년 사회책에는 중국의 개방 정책 단원에서 상하이와 푸둥 지구가 나온다. 가르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중앙교육진흥연구소 교과서에서는 ‘푸동’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표기는 하나로 통일되는 게 좋겠다.

  일단 <100배 즐기기>에 ‘위치가 가장 좋은 민박’이라고 나온 ‘상하이 백패커’ 민박 집을 목표로 가기로 한다. 공항버스 6번은 9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탈 수 있다. 라오시문[老西門] 까지 16 위안이다. 찬이는 키가 커서 초등학생 할인도 되지 않는다.

  오십여 분 만에 라오시문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우리가 내린 곳은 푸싱둥루[復興東路]다. ‘상하이 백팩커’를 찾아서 동쪽으로 가다가 삼패루로(三牌樓路, 싼빠이로루)와 학원로(學院路)를 거쳐 둥제[東街]에서 중화루[中華路]를 돌아서 빈강명인원(濱江名人苑) 아파트를 찾아갔다. 하지만 경비원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이사 갔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처음 들어간 호텔은 450 위안. 왜 이리 방값이 비싼지 모르겠다.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격이 높다. 깃발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으로 향한다. 그들을 따라 팡방중루[方濱中路]로 들어가 본다. 사람들이 바글 바글하다. 의지대로 갈 수 없어 그냥 사람의 물결에 휩싸여 앞으로 간다. 좀 한적한 삼패루로(三牌樓路)로 여관 간판이 보인다. 상해신호경문여관(上海新好景門旅館)이다. 더블 룸이 218 위안이다. 깎아 달라고 하다. 우리가 중국어를 잘 못하는 걸 보고 어떤 사내가 자기가 아는 한국 사람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서 통역을 해준다. 그 한국 여자 덕분에 200 위안으로 깎아서 들어간다. 침대 시트는 깨끗하지만, 바닥은 도통 청소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짐을 풀고 예원(豫園, 위위안)을 먼저 보기로 했다. 위위안은 1999년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왔을 때는 너무 더워 가지 않았던 곳이다.  

  여관 입구 길바닥에 한 여학생이 뭔가 앞에 써놓고 쪼그려 앉아 있다. 내용을 읽어보니 고전적 수법의 앵벌이를 하고 있다.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가 마약 중독에 빠져 돈을 탕진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으므로 존경하는 각계인사 여러분들의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이런 수법이 아직 통하는지 동전이 몇 개 모여져 있고, 관찰해 보니 지폐를 건네는 이도 있다. 여전히 어리숙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위위안 가는 길에 배가 고파 우선 만두를 사먹다. 예원(위위안)도 식후경이다. 유명한 난썅(南翔, 남상) 만두집은 아니지만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다. 아래층에서 먼저 계산하면 동그란 표를 받는다. 잠시 기다리면 만두 8개 담긴 통을 받아서 2층에 올라가서 먹으면 된다. 작은 만두를 먹다가 입천장을 데다. 숟가락을 받쳐 먹어야 하는데, 젓가락으로 집어 그냥 입에 넣으니 뜨거운 육즙이 터져 입천장을 놀라게 한다.

  다시 예원을 향해 전진. 정말 사람이 많다. 등 장식을 많이 달아놓고 있다. 아무래도 돼지가 많이 보인다. 밤에 불이 들어오면 아주 멋지겠다. 밤에 다시 오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일주일 동안 다시 찾을 시간이 없었다. 성황묘도 입장료를 받는다. 돈 주기가 아까워 밖에서 구경하고, 예원 입구를 찾아 전진한다.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가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사람 구경하면서 군것질 거리도 빠뜨리지 않는다. 화화공자(花花公子)님이 찍어놓은 사진만큼 아름답다. (참고)



* 여행 기간 : 2007년 2월 20일(화)-2007년 2월 27(화) 7박 8일

* 여행 장소 : 인천-중국(상하이-항저우-쑤저우-상하이)-인천

*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만 11세) 가족 

* 환전 : 1 위안=121원


* 연오랑의 다른 여행기는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http://cafe.daum.net/meetangkor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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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상하이1-여행 준비

 

1. 여행 준비


  봄방학 즈음이면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이번 2월에는 국적기와 중국 항공사 사이 경쟁으로 일부 노선 항공료 할인 세일을 한다. 게다가 3월이면 만 12세가 되는 찬이가 마지막 어린이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봄방학이 적기가 아닐 수 없다.


  한 달 간의 동남아시아 여행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중국행 항공편을 살펴보았다. 마침 상하이 왕복 십구만 원대 상품을 골랐다. 세금 포함하여 세 사람 항공료가 칠십만 천원이다. 단 일주일 기간이다. 우리에게 딱 맞는 상품이다.

  인터넷으로 바로 결제를 마쳤다. 출발 하루 전에 전자우편으로 출발안내를 해준다. 아시아나 OZ 363 비행기는 인천 공항(ICN)을 2월 20일 (화) 09:50 출발하여 푸둥 공항(PVG)에 2월 20일 (화)10:40 도착한다. 돌아오는 것은 OZ 362 편으로 푸둥에서 2월 27일 (화) 17:25 출발하여 인천에는 2월 27일 (화) 20:15 도착한다.


  설 연휴가 끝나는 다음날인 2월 20일에 떠나는 비행기니까 준비할 시간은 열흘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하이는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일단, <중국여행동호회> http://cafe.daum.net/chinacommunity 카페에 들어가 게시물들을 틈나는 대로 살펴본다.


  여행 가기 전에 꼭 필요한 관련 서적을 검색해서 세 권을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그런데, 동네 서점들이 왜 망하는지 이해가 된다. 목요일 저녁에 주문한 책이 금요일 오후에 바로 배달된다. <금요일에 떠나는 상하이 여행>은 주말 상하이 여행을 겨냥하여 묶은 아주 간편한 책이다. 여행 준비 한 달 전부터 이 책을 보면서 따라 하면 손쉽게 상하이 주말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포항에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다 읽었다. <상하이 100배 즐기기>와 <상해에서 상하이까지>는 그 이후 틈틈이 읽었다.


  비자는 세오녀가 금요일 오전에 중국 영사부에 가서 신청하였다. 중국 영사부 위치가 바뀌었다. 호적등본과 주민등록 사본을 떼어가야 하는 등 번거롭기 그지없다. 그다음 주 수요일 오전에 찾으러 가면 된다. 단체 비자가 아니라 개인이 신청하면 일인당 35,000원으로 비싼 편이다.


  환전은 외환은행 환전 클럽을 통하여 600 달러를 바꾸었다. 환율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다가 오히려 더 올라갔다. 2007년 2월 14일 고시환율 954.72, 60% 우대를 적용하여 944.86에 566,910 원 들었다. 이전 여행에서 남은 달러를 더하여 사용하면 되고, 엔화와 원화도 추가로 가져간다. <중여동> 환전 게시판을 눈여겨 살펴본다. 드디어 추석날 상경하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올라온 글을 보고 전화를 하였다. 안양에서 접선하여 8,000 위안을 1:121로 968,000 원에 샀다.


  상하이에 처음 간 게 1999년 여름이었다. 당시 직장에서 단체로 간 여행이었고,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만 따로 다녀왔다. 벌써 팔년 전이다. 당시에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하이 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바뀌었을까 궁금하다. 그때 썼던 여행기를 상당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 여행 기간 : 2007년 2월 20일(화)-2007년 2월 27(화) 7박 8일

* 여행 장소 : 인천-중국(상하이-항저우-쑤저우-상하이)-인천

*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만 11세) 가족 

* 환전 : 1 위안=121원


* 연오랑의 다른 여행기는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 http://cafe.daum.net/meetangkor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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