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만감: 일기장  2007/03/17 17:11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80   


사람이 왜 신을 찾게 됩니까? 레닌의 고전적인 설명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탐색하지 못한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원시공동체 해체기의 인간의 집단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맞겟지만 이미 완숙한 계급사회 안에서의 한 개인의 다양한 내면적인 움직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종교발생론이 아닌 듯합니다. 붓다가 병들고 가난하고 노년이 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이 수행의 계기가 됬고, 예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악마"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목소리겠지요?) 속삭임에 유혹을 받았다가 결국 세속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모순이든 계급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이든 우리가 당장 현실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할 때에 인간에게 종교심, 즉 자기 내면 안에서의 "신성한 것", 모순 해결의 능력을 갖는 "영원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 같으면 제가 부딪쳤던 모순이 "폭력"이라는 사회의 현상이었는데, 그 시기는 아주 일렀습니다. 지금 기억 같으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위대한 조국 전쟁" 관련의 영화가 또 방송됐습니다. 소련이 철저하게 군사화된 사회이었는데, 텔레비전의 일정표 중에서 상당부분은 소독 전쟁 ("위대한 조국 전쟁") 때의 소련군을 찬양하는 "국책 영화"들이 차지했지요. 대체 전쟁 영화란 다 폭력적이지만, 그 때에 제가 본 영화는 개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감독에게 무슨 사디즘 취향이 있어서인지 그 영화의 여러 "클라이막스" 중의 하나는, "영웅적인 소련 군인"이 독일 여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 여군을 "장렬히 처단"시키는, 꽤나 긴 장면이었지요. 죽어가는 "적"과 그 옆에서 "아, 참, 내가 수고했구먼!'과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군의 용사"를 카메라가 약 5분간 클로즈업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게 있어서는, 그 장면의 효과는 감독이 의도한 바와 정반대이었어요. 제 어머니와 같은 중년의 여성을 근육질의 남성이 칼로 찔러 죽이기에, 저는 "불쌍하게 죽은" 그 여성에 대한 동정과 함께 제 어너미도 누군가가 이렇게 죽여 제가 고아가 될 것 같은 절망과 공포만을 느꼈을 뿐이지요. 그러다 영화를 보다가 씩씩해야 할 남아 초등학생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 후로는 "국책 영화" 시청을 가급적 피했는데, 학교에서 교련을 시키고 전쟁게임까지 시키는 것이 하도 부담이 되기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무기라는 나쁜 노리감을 갖다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좋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한 번 이렇게 "국책 영화"의 폭력성에 놀란 뒤에는, 제가 이 세상에 폭력을 금하는 윤리체계가 있는가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어요. 소련의 공식 윤리체계는 "적군의 살해" 정도를 당연지사이자 "남자다운 일"로 봤기에 제가 기독교에 눈을 돌렸는데, "애국애족"을 외치는 것은 주류 기독교 집단, 즉 희랍정교회도 마찬가지이었어요. 그러다가 병역거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주류 교파 - 소련말기에는 그게 주로 침례교파이었어요 - 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쪽의 아주 엄격한 "집단적 규범"에 압박감을 느껴서 결국 원시 불교의 경전을 읽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됐어요. 저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에서의 분노와 그 분노의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을 찾았어요.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결국 제게 종교적 심성을 심어준 것은 "폭력", 그것도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인식한 이 문제의 복합성은, "폭력"의 사회적인 연원에 있었던 것이지요.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 지배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계급적 지배 질서가 있기에 결국 칼침 놓는 일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저와 같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교 같은 종교의 경전들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지만,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적인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했던가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삼계도와 같은 특수 불교 종파, 그리고 일부 특수 개인 빼고는, 불교는 일부 성직자의 평화로운 "내면의 구도" 가능성을 지배계급의 폭력자로부터 보장 받기 위해 폭력자와의 대결/투쟁은 물론 폭력자에 대한 솔직하고 바른 말까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요.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제 초발심에 그대로 맞지만 제도로서의 불교에 대해 늘 느끼는 것은 심한 배신감일 뿐입니다. 종교적 심성의 초발점은 "모순"과의 만남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만남의 과정에서는 종교적 심성은 생기지만, (계급 사회의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이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으로서는 주로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여 절에 가지 말자!"라고 외치면 제 자신도 마음의 일면에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 부처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방에서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다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셈친다 하더라도 <법구경>을 갖다가 설법하시는 분들이 총들고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면 - 즉 병영화된 사회와 불교 교의의 기본적 충돌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 이건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초발심도 배반하고 짓밟는 "가사 입은 도둑"의 집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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