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선이고 죽음은 악이다'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디아스포라(diaspora) 서경식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 따르면,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며, 이런 정신적 독립성은 삶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사유를 통해 (새로운 주체성이) 획득된다는 것이다.

 

삶의 긍정은 '죽음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한 니체의 사유와 함께, 그리고 '개인의 독립성'은 소수자(minority), 특이성(singularity), ~되기(become) 등의 개념들과 결합해서 생각해 봄직하다.

 

아래에 몇 개의 문장을 발췌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재생산'도 백성들이 전부 다 죽고 없어지면 안 되죠. 인간이 일을 하게 하려면 일단 살아야 하니까 부유층이나 권력자는 인간인 살고자 하는 욕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줍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주권, 결정권은 안 주지요. 자살 같은 건, 자기 멋대로 죽는 건 신의 뜻을 거르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괴롭고 삶에 보람이 없더라도 그냥 살라는 거지요

 

'I was born'이라고 할 때, 누군가의 의도로 우리가 태어났다, 자기 스스로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럴 때 저는 돼지 같은 가축을 생각합니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로 태어나지요. 무엇 때문일까? 먹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돼지에게 삶의 보람이 뭐가 있을까요? 그저 인간이 돼지를 먹기 위해서 번식하게 하는 거예요. 그럼 돼지가 자살하면 안 되지요. 돼지가 사는 보람이 없다고 해서 자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돼지가 동성애을 하면 안된다는 거지요. 이거 웃기는 애기가 아니라 진짜예요. 그럼 우리 하고 돼지가 다른가? 우리는 돼지가 아닌가? 지금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예요

 

인간 대부분을 백성으로, 노동자로, 노예로 재생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돼지를 사육하는 것하고 다름이 없지 않나요?

 

'인간은 살아야만 한다. 자살하면 안 된다.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그런 사고가 어떻게 보면, 인간을 영영 착취할려고 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역활을 할 수도 있고 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국가권력은 자살을 금기시하고 죽음에 대한 사상을 금기시해요

 

인간이 태어나서 살고 죽어가는 그런 과정 자체를 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통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단,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정신으로 볼 수 없는 한 우리는 국가나 권력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런 거지요.

 

내가 여기 있는 어떤 사람에게 애정이나 책임감, 연대감, 이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고 이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느낄 때, 진짜 이것이 자기 것인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떤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누구를 모방한 것인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우리가 독립되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독립성이야말로 공공성의 바탕이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으면 안되는지,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행위야 말로 인간다운 주권을, 주체성을 자기 자신이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 서경식, 2009,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철수와 영희, pp. 136~16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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