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009/12/14 14:12

 Primo Michele Levi, 이현경 옮김, 2007,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 ( )는 인용된 책의 쪽수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 아우슈비츠 강제노역수용소Arbeitslager에 붙여진 문구


서경식(이 책의 작품해설)에 의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자신을 제외한 만인에 대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장이며,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정책이 실행되는 곳이다. 수인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3개월이다. 아우슈비츠 희생자 110만~150만명, 아우슈비츠 이외의 수용소 등에서 희생된 자를 합친 총수는 600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다양한 국적의 정치범과 전쟁포로, 집시, 동성애자, 그 외 나치가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낙인을 찍은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구제된 수인은 약 7,000명뿐이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이면서 증언자로서 ‘거의 법적인 차원의 증언을 펼친다. 스스로 ‘심판관 보다는 증언자 역할이 좋다’(285)고 고백한다. 이 책은 과거의 잔혹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증언이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위기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다. ‘증언 문학의 고전’(331)이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단테 『신곡(174)


레비는 1987년 4월 11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6)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6~7)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전통은 엄격한 의식을 규정해놓기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정념과 분노가 이제는 사그라졌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정의로운 행위가 사회에 대한 슬픈 의무의 표현인 까닭에 사형집행인도 사형수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수는 모든 외적 근심을 피할 수 있고 고독을, 또 원한다면 모든 정신적 위안까지도 보장받는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주변에서 증오나 부조한 독단이 아닌 필연성과 정의를 느끼고, 형벌과 함께 용서받음을 느끼도록 세심하게 배려된다.(14~15)


새벽이 배신자처럼 우리를 덮쳤다. 새로운 태양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적들과 결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 우리의 내부에서 요동치던 갖가지 감정들, 자포자기, 쓸모없는 반항심, 종교적 체념, 두려움, 절망감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어할 수 없는 집단적 광기 속으로 흘러들었다. 명상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끝났다. 이성적은 활동은 모두 격정적인 혼란 속에서 흩어져버렸고, 그 순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집들에 대한 따뜻한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득이며 칼에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아픔을 안겨주었다.(16~17)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변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 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고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 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 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우리는 평범한 인류의 표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8~19)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Morgen früh', 내일 아침이다. (204)


폭탄이 시작한 작업을 인간의 작업이 완성한 꼴이었다. 해골같이 마르고 쇠약한 환자들이 누더기를 걸친 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꽁꽁 언 땅 위로 벌레들이 습격을 한 것 같았다. 그들은 먹을 것과 불 땔 것을 찾아 막사들을 모두 뒤졌다. [……] 자신들의 내장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사방을 더럽혀 놓았고 전 수용소를 통틀어 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인 눈을 오염시켰다.(242)


수용소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 “네 빵을 먹어라.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네 옆 사람의 빵도 먹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지 마라.(244)


움직이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심지어 바람마저도 정지한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불 속에 누워 근육과 신경과 의지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로 나를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모든 것이 끝나기를 혹은 끝나지 않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249)


1945년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 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패배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263)


우리 머리 위 수천 미터 상공의 회색 그름들 사이에서 비행기들이 공중전으로 복잡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263~264)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일 내가 실제로 우리의 박해자들 중 한 명을, 아는 얼굴을, 그 오래전 거짓말을 다시 마주쳤다면 아마도 증오와 폭력의 유혹에 굴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럴 때만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적을 용서하라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268~270)


독재국가에서는 [……] 진실은 위에서 명령한 한 가지 밖에 없다. 신무의 내용이 모두 똑같다. 모두 똑같은 진실만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 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271~272)


확실히 공포체제의 세부 사항들을 엄격하게 비밀에 부치는 방법은, 그 고통이 미지의 것이었기에 더욱 효과를 발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곳에서 이미 밝힌 대로, 자기 손으로 직접 포로들을 수용소로 보냈던 대다수의 게슈타포들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다.(274)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시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리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하고 생각한다.(276)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279)


우리는 수용소 없는 사회주의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실현된 일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없는 나치즘은 상상도 할 수 없다.(289)


부적절하게도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즉 그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품는 적대감의 한 예이다. 이는 원래 동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물들은 같은 종이라도 다른 그룹에 속해 있는 동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은 가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닭장에 있던 암탉이 다른 닭장에 들어가면 그 닭은 며칠 동안 다른 닭들에게 주둥이로 쪼이며 거부당한다. 쥐와 꿀벌들의 세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회적 동물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물적이 불관용을 모두 용인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법률이 그것을 제한하는 데 이용된다.

반유대주의는 전형적인 불관용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거부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접촉하는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의 차이점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차이(흑인과 백인, 금발과 갈색 머리)일 수도 있지만 복잡한 문화로 인해 우리는 언어나 방언, 혹은 악센트 같이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 중 외적으로 완전히 표현되고, 옷을 입는 방식이나 행동방식 같은 삶의 방식과 공적․사적인 습관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라는 것이 있다. 유대 민족의 고통스러운 역사로 인해 유대인들은 거의 어느 곳에서나 이런 차이들 중의 하나를 드러내게 되었다.(292~293)

반유대주의의 본질에는 거부라는 비이성적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교가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굳어져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인, 아니 신학적인 옷을 입게 되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디아스포라의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이, 역시 사방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도처에서 형벌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영원히 증명해야만 하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며, 유대인들은 박해는 받아도 살해되어서는 안 된다. (294)

히틀러는 멋진 약속을 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을 경제적 파탄으로 내몬 계급에게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묻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돌려야 했으나, 히틀러는 그 적대감을 유대인들에게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33년부터 시작해서 몇 년 동안 히틀러는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독일인의 분노와, 루터, 피히테, 헤겔, 바그너, 고비노, 체임벌린, 니체 같은 선각자들이 북돋워놓았던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해 당을 하나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가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독일이 지배권을 갖는 것이었다. 문화적 사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력으로 말이다. 그가 보기에 독일적이 않은 모든 것은 열등할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었다. 독일의 첫 번째 적은 유대인들이었는데 히틀러가 독선적인 분노를 품고 밝힌 수많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다른’ 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히틀러 자신은 우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는 지성과 의식을 불신하고 본능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주저 없이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독일계 유대인의 상당수가 경제, 재정, 예술, 학문, 문학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는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 부었다. 이런 거부의 씨앗이 비옥한 토양에 떨어지면서 믿을 수 업을 정도로 활기차게, 새로운 형태로 뿌리를 뻗어갔다. 파시스트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와 히틀러가 던진 말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 되살아난 그 반유대주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야만적이었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생물학적 이론이 덧붙여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힘이 없는 인종은 강한 인종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상식에 의해 수세기 전에 모습을 감추었던 어리석은 민중 신앙이 되살아났고, 쉴새없는 선전 활동이 시작되었다.(296~297)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조만간 인간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독일계 유대인 시인 하이네 (298)


자살하기 몇 시간 전 구술한 정치적 유언장에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인종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전 세계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전 세계 유대인과 끝까지 싸우라고 독일 정부와 국민에게 명한다”(300)


이런 집단적인 광기, 이런 일탈은 대개 개별적으로는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성격, 독일 국민과 그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개인적인 망상, 증오심, 폭력 교사가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에게 걷잡을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히틀러에게 두 배로 되돌아와 그 스스로 니체가 예언했던 영웅, 독일의 구원자인 초인이 되었다는 미치광이 같은 확신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다.

[……] 일반적으로 히틀러가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에게 쏟아냈다고 말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결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의 폭력적인 적대심은 자신의 혈관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탄생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런 설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고 무죄일 수 없다!)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죄의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300~301)

나치즘의 증오 속에는 이유가 없다. 그 증오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다.(302)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믿었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탄했으며 신처럼 경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자신들의 한 말의 신뢰성이나 정의로움을 앞세우지 않고 장황한 말로, 연극배우 같은 방법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끈기있는 훈련과 습득을 통해 암시적으로 말을 했으며 사람을 홀리는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안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303)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엔 너무 단순한 공식임이 틀림없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되어 살금살금, 다른 이름을 달고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혹은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나 모든 방어장치들을 파괴해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헤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저항할 힘을 찾아야 한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폭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303~304)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미래를 묘사한다 해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대중의 행동을 예측해보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기란 너무나 힘든,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뒤로 아주 다양한 다른 것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끝없이 펼쳐진다.(305)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서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307)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일기 “게토를 관리하는 일은 인도적 과업이 아니라 외과적 과업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잘라내는, 그것도 근본적으로 잘라내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 전체가 유대인이라는 질병을 앓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 곧 인위적 절멸이었다. (324)


[서경식의 작품 해설]

그가 항상 그의 저작을 통해 아우슈비츠에서 파괴괸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 자신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인간’에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근거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현대 오디세우스였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한 것이다. 그는 그 방대한 이야기의 말미에 ‘자살’이라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과 같은 미완의 물음을 우리에게 던졌다. 근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최후의 경종을 울리려고 했던 것일까(339)


무엇하나 진정으로 끝난 것이 없다. 지금도 사회의 곳곳에,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길한 징후가 존재한다. 단지 사람들이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 아닐까? 그런 징후들은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언제고 다시 잔혹한 폭력으로 분출될지 모를 일인데도…….

과거의 고난이나 먼 장소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건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은 상상이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를 의식해야 한다. 그러한 공포를 잃어버리는 순간, 냉소주의가 개선가를 울릴 것이다. 우리들 ‘인간’을 태우고 표류하는 배가 난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리모 레비가 우리들에게 남긴 경고이다.(340)



※ 레비가 강제 수용되었다가 살아난 아우슈비츠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오시비엥침’이라는 슐레지엔 인근 폴란드 지역에 독일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323~330쪽에서 발췌)

○ 개요

- 철도 교통의 요충지

- 1940년 4월 수용소 설립 명령,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 총 20동의 건물

- 1940년 6월 14일 게슈타포(나치스의 비밀경찰)에 의해 아우슈비츠의 첫 번째 수감자 호송 (폴란드 정치범 728명)

- 1941~1942년 :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단층에서 2층으로 개축, 8동 증축(총 28동)

- 평균 1만 3,000~1만 6,00명 수감(1942년 한때 2만 8,000명 수감)


○ 시설

①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오시비엥침) : 수용소 본부와 행정부서, 일반 물품과 군수품 생산(공장)

②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브제진까 마을, 비르케나우 수용소) : 대량 학살과 시체처리를 위한 거대한 장치를 갖추고 있음(5개의 가스실과 시체소각실) 여기에서 학살된 사람의 수는 150만명 추정

③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모노비츠 마을, 부나 수용소) : 수용인들이 모두 ‘부나’라는 합성고무를 만드는 합성고무 공장


○ 살해과정

화물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이들 중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돤된(혹은 그저 단순히 줄을 잘못 선) 이들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동해 옷을 모두 벗어두고 귀중품을 보관소에 맡긴 후 샤워실이라는 간판의 붙은 가스실 앞으로 내몰린다. 몇몇 절멸수용소에서는 먼저 여자들의 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사체에서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머리카락으로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작했다. 낯선 독일어로 외치는 고함과 채찍에 몰려 사람들은 샤워실이 가득 찰 때까지 들어간다. 샤워실 문이 잠기고 천장의 샤워 꼭지들에서 물 대신 치클론 B 가스가 새나온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맨 아래쪽에 깔리고 가장 힘 센 사람들이 꼭대기에 올라 차곡차곡 쌓인 채로 모두 사망할 때까지는 15~20분 정도가 걸린다.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면 역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수인들이었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시체처리조)들이 들어와 피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들을 끌어낸다. 금니와 머리카락을 뽑고 수레에 실어(나중에는 켄베이어벨트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각로로 운반한다. 사체가 너무 많을 때는 그냥 밖에 쌓아두기도 한다. 화장시킨 사체의 재는 가까운 곳의 하천에 버리거나 비료로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과정은 아무리 처리대상 인원이 많을 때도 세 시간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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