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양심'엔 한계가 있다

2005/03/04 23:38
‘제국의 양심’ 엔 한계가 있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가끔 쓰이거나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양심적 지식인’이란 말이 있다. 권위주의 정권 밑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나 야수들의 싸움터인 세계에서 지식·양심을 겸비하는 누군가가 암흑 속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역사적 한계점이 망각되고 양심적 지식인이 초역사적인 성현이나 선지자쯤으로 과장되게 이해되기도 한다. 과연 특정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돼 있고 특정 계급을 배경으로 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양심과 지식이 풍부하다 해서 그 ‘국민’ 사회와 계급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장준하의 ‘반공주의’한계처럼


△ 1890년대의 후반의 우치무라 간조.

예컨대 한국 양심의 대표자라 할 장준하(張俊河·1918~75)를 생각해보자. 그의 독립운동이나 반독재 투쟁, 그리고 1970년대 초반 평화통일 논리의 정립은 꿋꿋한 양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사상계> 창간 시절 미국쪽과의 유착이나 5·16 정변 직후 반란범 집단에 대한 지지 표명과 같은 장준하의 이면들을 과연 상황의 논리와 판단 오류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서북 유산층 출신의 기독교 우파로서 장준하가 갖게 된 ‘조국 개발’ 지상주의와 미국의 이상화, 반공주의와 같은 한계는 그가 오랜 시련 속에 노력했음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암흑기 한국 양심의 상징인 장준하에게도 만만치 않았던 계급적 한계가 있었음을 보면 1970년대 제도 야권의 반독재 투쟁을 지도했던 한 종교 지도자의 최근의 극우적 발언들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게끔 돼 있는 제도 종교의 한계를 그 조직 안에서 극복하기란 거의 초인적 과제일 것이다.

제도권 속의 양심·지식의 한계는 국내의 문제만도 아니다. 필자는 최근 미 제국의 악행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헤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의 인터뷰를 읽고 의문을 가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이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이라면서, 미국이 유엔 제재로 약해진 이라크를 점령해 식민화해버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리라 예상했다고 회고했다.

베트남전쟁 때 인민전쟁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관찰한 바 있는 촘스키가 어떻게 미 제국이 같은 낭패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저항세력의 공격이 아무리 지속돼도 미군은 석유 매장량이 많은 이라크를 떠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독립전쟁 무용론’은 무엇보다 의문스러웠다. 이라크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미 미국으로 하여금 하루 약 2억달러의 전비를 쓰게 함으로써 쌍둥이 적자를 심화하고 달러의 급락과 제국의 도산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만들었는데 이라크의 안중근·허위·신돌석 들의 희생이 그렇게까지 소용없는 일이란 말인가?


△ 우치무라 간조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기희생적인 의전으로 합리화한 1894년 8월11일 영문기사.

미국 자료를 가장 많이 보고 알게 모르게 미국의 분석가들의 관점을 참고하게 되는 촘스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고 약자의 저항능력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게 된 게 아닌가? 미국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바깥의 약자들의 저항이 촉매가 되어 거대한 미 제국도 몰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양심’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친근한 사례로 동아시아 무교회(無敎會)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가 있다. 1921~27년간 한국 무교회주의의 선구자 김교신(金敎臣·1901~45)을 지도하고, 장준하와 함께 한국의 양심이라 부를 함석헌(咸錫憲·1901~89)에게 세례를 준 우치무라가 한국과 직접적 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치무라 양심의 발로가 한국의 오늘날 현실과 맥을 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돌을 맞다

그의 최초의 의거(義擧)는 일본 역사책에 ‘불경(不敬) 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1891년 1월9일의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에서의 작으면서도 큰 일이었다.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가르쳤던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가 성상처럼 학교에서 봉안·봉독되어 교원들이 깊은 절로 황민(皇民)으로서의 경배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일개의 젊은 선생인 우치무라는 머리를 약간 숙여 ‘칙어’에 인사할 뿐 경배를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천황은 같은 인간이니 신격화할 수 없다라는, 내세의 자유로 현세의 속박을 뛰어넘는 논리였다. 곧장 매스컴이 ‘비국민의 행각’이라고 침소봉대한 이 사건의 결과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의 집에 욕을 퍼붓고 돌을 던지는 ‘애국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 등 전 사회적 이지메를 겪은 것은 물론, 이 ‘만고의 역적을 낳은’ 기독교 교단 전체도 공격을 받아 난처해졌다.

오늘의 입장에서 정신병동을 방불케 하는 당시 일본 주류의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섬뜩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러면 박정희 왕국에서 ‘교육칙어’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의 암기를 거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국가적 이지메를 각오해야 했을까? 오늘날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은 국민의례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독재가 끝난 이 시절에도 내세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자율적인 ‘나’를 지키기는 거의 우치무라 시대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다.

우치무라의 두 번째 의거는 러일전쟁(1904) 때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해 일본과 러시아 두 ‘강도 국가’를 동시에 준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그 뒤 그는 정부로부터는 물론 ‘애국주의’ 노선을 걸었던 다수의 기독교인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완전히 비주류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국가가 진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과 다름이 없다.


△ 장준하(왼쪽)과 촘스키. 그들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존경할 만하지만 계급적 한계 또한 뚜렷하다.

그러면 기독교 계통의 조선인 도일 유학생들이 1920년대에 그렇게도 존경했던 우치무라는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신념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전개해왔을까? 그의 천부적 정의감이나 용기, 신앙심은 아주 감동적이지만, 사무라이 가문의 유명한 한학자 아들이자 당시 명문이었던 삿포로 농학교 출신, 정부 공무원과 중앙 일간지 편집실 직원 이력의 소유자,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고급 개화인’인 우치무라는 ‘국민’ 집단으로부터의 탈주를 끝까지 일관되게 시도하지도 않았다.

‘국민적’ 본적을 중심에 두고 살다

1890년대의 우치무라는 청일전쟁 발발 당시에 ‘조선 독립과 문명을 위한 이 전역의 정당성’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영어로 써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 정책을 선전하고, 스페인에 대한 미국의 승리와 필리핀의 점령(1898)을 ‘문명과 정의의 승리’로 오해할 정도로 (종교인의 자율적 영역을 주장하면서도) 국민주의와 문명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에도 그에게는 조선에서의 일제의 여러 횡포보다는 미국의 일본인 이민 금지 정책이 훨씬 더 중요하고 마음 아픈 사항이었다.

그는 태생적인 독립심이나 정의감으로 천황의 신격화나 조선에서의 폭력적인 식민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지만, 서구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과 아시아에서 ‘개화의 영도자’가 된 일본의 특별한 역할,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같은 허망한 근대주의적 편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의 말로는 그가 “평생 두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섬겼다”고 하지만 이를 다르게 보자면 그는 서구의 기독교와 일본이라는 자신의 ‘국민적’ 본적을 늘 중심에 두고 살았던 ‘선량한’ 부르주아적 근대인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님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할 줄 몰랐던 그로서는, 감성으로 그렇게도 혐오하던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의의 부르주아 지식인의 양심과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인 제자들에게까지 광신적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도·박애의 이상을 심어준 그의 양심은 고귀하지만,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테두리를 넘어 혁명·변혁으로 가는 길을 끝내 몰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양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물론 이와 같은 양심들을 존경해야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과장되게 이해해 우상으로 받드는 등의 과오를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nomad22/trackback/47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