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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평택 범국민대회 - 평택지킴이 소식 16호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생명과 평화의 땅을 지키는 평택지킴이 소식_16호   [ 2005. 10. 20 ]

 

 


강제토지수용 중단! 미군기지확장계획 전면 폐기!! 

평택시청앞 1인 시위가 6일째 진행중입니다.

1인시위 6일째 - 김용한, 채한석, 석권호, 윤현수, 이은우, 최광수님 등 평택 노동시민사회단체분들께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기지확장저지를 위한 평택시청 앞 1인시위를 벌이고 계십니다.

평택시민들의 60%가 미군기지확장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법적일정대로 기지확장사업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평택시민들은 대추리, 도두리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심정도 알리고, 기지확장의 부당함도 알리기 위하여 평택대책위에서 1인시위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1인시위 담당 : 평택대책위)

 

 

 

대추분교를 지키는 싸움은 이제부터 

- 두레풍물보존회 송영민 단장 -

어 제 힘든 결정을 했습니다... 

보상을 받고 나가느냐, 보상없이 계속 싸울 것이냐....

공 사비로 들어간 돈 7,500만원을 만들어 보겠다는 국방부... 

돈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그러는 가운데.... 

내가 벌어 보지도 못한 돈....만져 보지도 못한 돈... 

그 돈만 있으면 사무실 하나 얻고 살림집 하나 장만 하는데 문제가 없다....

하 지만 투쟁의 본거지인 대추분교....거기를 살고 지키고 있는 나.... 

내가 거기서 돈 받고 빠져 나오면... 

뻔한것 아닌가....국방부는 바로 밀어 버릴것이고 

여지것 힘들게 싸우시는 어르신들 더 힘들게 할 것인데... 

어찌 나 살자고 돈 받고 나오겠는가....

소 송에서 지면 손해배상 청구를 한다고 한다...2천, 3천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의 액수를 청구한다고 한다....협박 아닌 협박이다...

내 일은 내일하자....아무도 앞날은 모른다 그러나 그 앞날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희망으로 살련다... 

보 존회 단원, 전수생, 교사풍물패 새미 등등 죄송합니다... 

나 하나로 인해 피해를 너무 많이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이 것의 나의 운명이라면...... 

내년에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합니다....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 이 길을 걷겠습니다...... 

대추분교 대추리 땅을 지키는 날까지......

* 송영민단장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을 퍼왔습니다.


벼랑끝에서도 희망을 품는 마을  

제강제철거 위가 앞에서 담벽에 희망을 그리는 대추리 [ 인터넷참소리 기사]

넓 은 들판에 가을바람과 익은 벼들이 넘실대는 노란색 파도를 만들어내더니 어느새 한 필지씩 추수되고 듬성듬성 생긴 빈 들녘에 바람만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마을 길목에는 벼 베는 농기계가 묵직한 기계음을 내며 침묵을 깨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곳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ㆍ도두리 마을도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가을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는 어쩌면 이 땅에서 흙을 만지는 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정 부의 미군기지확장부지 협의매수가 6월 14일부터 31까지 진행된 결과 349만평 가운데 229만평이 완료됐다. 또 정부는 협의매수하지 못한 나머지 120여만 평에 대해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 상태이다. 매수하지 못한 토지를 합법적으로 강제수용 할 수 있도록 하는 수순이다. 이대로 간다면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며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추리ㆍ도두리 마을은 올 겨울 강제철거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 런데 오히려 마을은 강제철거 위기에도 불구하고 새 단장되고 있다. 골목길을 종횡무진 하던 동네 아이들이 벽에 붙어 있고, 타지에서 온 손님들도 벽에 붙어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동네 벽에 그림이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벽화그리기가 있던 지난 17일에는 대추리 마을 아이들과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의 샘물 공부방의 아이들이 모여 대추분교 앞 담 벽을 도화지 삼아 붓을 들었다.

마 음껏 낙서하라니 아이들은 마냥 신나하며 원하는 색을 집어 든다. 이곳 아이들의 진지한 손놀림 속에 움직이는 붓은 그간 자신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고충을 그려내고 있다. 초등학교 2-4학년이나 됐을 마을 아이들이 그림 속에 ‘미군기지 아저씨, 우리아빠 화났어요’, ‘우리땅을 지키자’ 등 여느 또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또 샘물 공부방 아이들 또한 철거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 마을 사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담당 선생님은 “동네가 재개발을 이유로 철거되면서 아이들이 인근의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고, 공부방도 이번 한주를 마지막으로 폐쇄하게 됐다”며 “마지막 소풍을 의논하는 가운데 아픔을 경험한 아이들이 이곳 마을의 평화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방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곳 샘물 공부방뿐만 아닌 먼저 한 쪽 벽에 그림을 장식한 인천의 ‘기찻길 옆 작은학교’ 공부방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었다.   ............[인 터넷 참소리_ 관련기사]


 

 

 

 

+강제토지수용 규탄! 미군기지확장계획 폐기! 1인시위 

      (매주 월요일 - 금요일 12시30분부터 2시30분 / 평택시청정문 앞)

 

+ 10월 23일: 주한미군 영구주둔음모 분쇄! 강제토지수용저지 결의대회 

     : 참가하시는 분들은 평택미군기지확장의 부당성을 알리는 피켓을 꼭 준비해주십시요.        (오 후4시 / 평택역)

 

+ 10월 24일 : 33인 대추분교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 결심  

       (오 후 2시 /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 10월 25일 :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정태춘, 박은옥 거리콘서트 집중실천의 날

       (오후 7시30분 / 광화문 교보문고 앞)  

 

+ 10월 29일 :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평택역앞 무기한 농성 시작

      (오후 4시 / 평택역앞)

 

 

 

평택 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전화 031-657-8111 /홈페이지 : http://antigizi.or.kr 

이메일 : ufo-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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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섭과 조카

사회 교섭과 조카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지난 설, 고향으로 가는 길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인천에 사는 조카는 집에 어려운 사정이 생겼는데도 맏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인지, ‘휴가가 하루밖에 없다’는 둥,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둥 핑계를 대면서 안 가려고 하기에, ‘그래도 명절인데 안가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해 하겠냐, 너 안가면 나도 안 갈란다’하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인천에 있는 주안 역에서 만나 차를 타자마자 조카가 묻습니다. “이모, 그게 모야?”“이거? 김 세트. 니네 엄마 줄려구” 저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꾸러미를 궁금해 하는 줄 알고, 한진 동지들이 마련해준 선물을 자랑스럽게 치켜들었습니다.
"아~니. 저번에 내 친구가 테레비 보구 말해 주던데 민노총이 막 싸웠대매? 한쪽에선 뭘 하자 그러구, 한쪽에선 하지말자구 신나두 뿌리구 그랬대매. 그게 모냐구" ‘망할 년. 하구 많은 말 다 놔두고 오랜만에 만나서 가장 아픈데부터 찌르다니...’저는 마음이 있는 대로 꼬여서는,“야, 너는 민노총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라구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냐?”하고 괜한 트집을 잡습니다. "암튼. 그게 모냐구? 모때매 그랬는데?" "사회 교섭" "엉? 그게 몬데?"

사회 교섭이 뭔지도 모르는 제 조카는 비정규직 노동잡니다. 그러니까 “니가 용역이야?”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했다가,“야, 그런 건 파견이지”그러면 또 그런 줄 아는, 한마디로 지가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아이입니다.
커다란 마트에서 일하는데, 얘는 그 마트 직원이 아닙니다. 라면파트에서 온종일 라면에 치여 살면서도 얘는 그 라면회사 직원도 아닙니다. 그 마트 작업복을 입고 거기서 일하고 밥 먹고 똥 싸면서 하루 열 시간이 넘게 일 하는데, 사실은 사장이 누군지, 자기가 일하는 파견업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마트는 얘한테 일 시킬 거 다 시키고, 물건 정리하는 것이 조금만 늦어도 땍땍거리고, 늦게 밥 먹으러 가서 1분만 늦게 와도 주임이 시계를 보면서 지키고 서 있으면서도, 얘가 조그만 요구라도 할라치면 ‘니네 회사 가서 알아보라’고 말하는, 편리하기가 짝이 없는 구조입니다.

조카는 월급명세표도 없는 월급 8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돈이 줄어서 나오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있는 휴식시간에 주임한테‘명세표를 좀 볼 수 없냐’고 물었더니, ‘니네 사장한테 받으라’는 쫑코를 주더랍니다. 다음부터 이 아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묻지도 않는답니다. 그리고 제 딴에는 그래도 고참이라고 같이 일하는 아이들이 뭘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주임이 그 말을 한 다음부터는 지들끼리 그런답니다. “야, 저 언니 우리 회사 직원 아니래”그 다음부터 이 아이의 꿈은 정규직도 아니고, 주 40시간도 아니고 다만 그 회사 계약직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거랍니다. 월급이 줄어든 것은 법이 바뀌어서 월차도 없어지고 생리수당도 없어져서 그렇다는 걸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서 들었답니다.

이 아이는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한답니다. 추석 때도 일하느라 추석 다음 날 잠깐 집에 다녀왔고, 이번 설에는 9일을 쉬는 회사가 있다고 언론에선 떠들어댑디다만, 그나마 1년이 넘은 짬밥 덕택에 고작 설날 하루가 휴가였습니다. 주5일제를 누리는 세상에서, 이 아이는 토요일 일요일이 더 바쁩니다. 지 동생이 장가를 가서 얘한테도 첫 조카가 생겼는데, 어깨가 아파서 조카 한번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설날에도 밥만 먹고는 온종일 퍼 자다가 내일 출근 땜에 부스스 하게 부은 채로 밤에 갔습니다. 조카를 안지도 못하는 어깨로 박스를 들어 나르는 일을 하러... 이 아이 사는 걸 보면 시계가 70년대 평화시장 어디쯤으로 되돌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온종일 박스를 들어 나르고 물건을 정리하는 게 일이라, 손가락이 퉁퉁 붓고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도 못하면서 산재 신청도 못하는 제 조카는 병신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노조도 못 만드는 제 조카는 쪼다입니다. 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다니던 직장이 망하자, 서른 살이 넘은 여자를 받아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 하면서 말 한마디 변변히 못하고 사는 제 조카는 바보입니다.

그래도 이 아이, 저한테는 참 애틋한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났을 때, 지금도 그렇지만 집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 엄마인 제 큰 언니가 벌어먹고 살았는데, 쌍둥이 둘을 매달고는 길바닥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으니까 둘 중 큰 아이인 이 애는 저희 집에서 컸습니다. 제 엄마가 아픈 날이 많았는데, 아예 일어나시지도 못하는 날은 이 아이를 제가 업고 학교에 가야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는 아기를 매는 띠도 없을 때라 기저귀로 이 아이를 업고나면 왜 그렇게 흘러내리는지, 엉덩이에 치렁치렁 매달고 학교에 가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다른 애들 다 등교한 학교에 맨 나중에 가서는 정문 옆 철봉에 업고 간 기저귀로 이 아이 묶어놓고 교실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저는 창문 밖 철봉만 내다 봤지요.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애들 눈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수업시간에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쫒아 가보면, 그래도 지네 식구 왔다고 엉덩이를 짓까불며 입안에 모래를 가득 담고 벌쭉 벌쭉 웃던 그런 아이입니다. 똥을 도대체 몇 번이나 쌌던지 온몸에 똥으로 매대기를 쳐놓고도 울지 않던 그런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 중학교에 다닐 때, 수배중인 이모 잡는다고 짭새가 이 아이 다니는 학교까지 와서 이것저것 묻고 따라다닐 때도, 우리 이모는 나쁜 짓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사실을 20여년이 지난 작년에야 얘기를 했던 그런 아이입니다. 자장면 한 그릇 못 사준 이모한테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명절에는 노자 하라고 용돈도 주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저 때문에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98년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제가 온몸으로 반대를 안 해서 이 아이가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민주노총이 들어간 노사정위에서 파견법이 합의될 때 제가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내지를 못해서, 이 아이가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개털인 파견노동자가 됐습니다. 그땐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그 합의가 이런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줄은... ‘우리 조합원들은 노조가 있고, 그래서 단결된 힘으로 단체협상에서 막아내면 되지 않을까’하는 이기심이 솔직히 있었던 거지요.

제 조카는 전노투도 아니고 좌파도 아닙니다. 이모 때문에 노조라면 공포심부터 느끼는 찌질이입니다.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입니다. 또다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전에, 98년 합의에 대한 참회가 우선 아닐까요? 정말로 민주노총이 천만 노동자의 대표라고 한다면,'우리 조합원'보다 비정규직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일요일도 없고 재고 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조카 앞에서, 저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우리 조합원’들은 주 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단련비도 없고 효도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제 조카의 천만 원도 안 되는 연봉 앞에서,‘우리조합원들은 열심히 싸워서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민주노총이란 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면서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빠진 이모가 조카를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세상. 그 비정규직들에게 ‘우리조합원’들이 동지애는커녕 관리자로 군림하는 세상. 이주 노동자들에게 ‘우리조합원들’이 계급적 연대는커녕 백인으로 우쭐거리는 세상.

사회교섭이, 갈등 당사자인 노사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문제를 풀자는 거라고 제 딴에는 열심히 설명을 하고 나니,조카가 묻습디다.
"대화가 돼? 대화루 해두 되는데 근데 이모, 그 아저씬 왜 크레인까지 올라가서 죽었어?"


펌 : 천주교 부산교구 노동사목 소식지 바자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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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쿠르드 소녀 렝긴을 살려줘요

** 이 글은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보내온 글입니다.


한달 전쯤 한 친구가 인근 도시에 사정이 딱한 아이가 하나 있는데 도와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한번 아이를 찾아보겠노라고 약속을 한 후 차일피일 미루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아이를 찾아갔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사는 곳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4살이고, 렝긴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였습니다. 아이는 8살적부터 당뇨를 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쿠르드 무장독립운동세력(PKK)을 지원했다는 죄목으로 36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13년째 복역중입니다.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은 1차 대전후 로잔 협약으로 국제적으로 약속되었던 내용이고, 터키 공화국의 설립자인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서도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PKK는 이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를 하다가 탄압을 받고 산으로 들어가 무장 투쟁을 시작한 단체로, 흔히 알고있듯이 테러단체는 아닙니다.

로잔 협약을 주도했던 유럽의 국가들에 의해서 PKK는 작년에 EU의 테러단체 목록에 추가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로이터와 BBC는 뉴스 보도에서 PKK를 테러단체로 간주하지 않겠노라고 발표해 논란이 일기도 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쿠르드족 공동체도 가정의 수입을 거의 전적으로 가장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수감된 이후 이 가족은 일정한 수입이 없이 전적으로 이웃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이의 치료비를 충당하고 있었지만 거의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습니다.

아이가 병을 앓기 시작하자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었습니다. (대부분 정치범의 가족과 친척에게는 의료보험 카드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쿠르드족의 대부분은 정치범의 가족이거나 친척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의료보험 카드를 갖고있는 쿠르드족은 약 30%남짓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를 치료하던 의사와 함께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가버너(터키의 지방정치 형태는 독특합니다.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지방정부와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긴 하였지만, 동시에 중앙 정부에서 행정관을 파견합니다. 그래서 한 도시에 두명의 시장이 존재하는 기이한 형태의 지방 정부가 구성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권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갖습니다. 의료보험증을 발급받는데 필요한 간단한 서류들도 이 행정관의 서명이 없이는 발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정치적인 이유로 발급이 거부됩니다.)를 찾아가서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서류의 발급을 요청하자 가버너 왈 "아이는 정치범의 자식이니 자라면 나중에 터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죽도록 내버려 둬라"라고 하면서 서류의 발급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8살 때의 일입니다.

그 후 아이의 가족은 다시는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싼 치료비를 고스란히 주위의 도움만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아이는 주위의 도움으로 마련한 당뇨병 치료약을 집에서 스스로 주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의 부작용으로 아이의 신장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신장을 보호하는 치료를 받아야하는데 이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장이 상당히 망가진 듯 아이의 얼굴은 상당히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전화를 해와서 아이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제발 당신들이 구걸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만은 교육을 시켜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포함 5남매 중, 교육 시기를 놓쳐버린 큰딸을 뺀 다른 자녀들은 모두 학교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 가을 학기에 이 중 두명이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총 3명이 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습니다. 막내아이는 지금 중학생인데 내년에 고등학생이 된다고 합니다.

중학교까지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큰 돈이 들어가지 않지만 고등학교부터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에서 조차도 3명을 한꺼번에 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아이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유입니다. 일단 이 새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두 아이가 당장 급하게 필요한 교복과 교과서 등은 주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마련해 줄 수 있었지만, 렝긴이 지속적인 치료를 받도록 지원하고 아이들이 계속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13살난 막내아이는 제가 찾아갔을 때 "한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라고 말해서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40일 되던날에 아버지가 수감되어 13년째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터키 디아르바크르에서 아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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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처한 쿠르드 전통문화유산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메소포타미아(두 강의 사이라는 뜻)는 터키 쿠르드족의 중심지인 디야르바크르에서 시작해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끝난다. 티그리스 강은 쿠르드족 거주 지역을 둘로 나누면서 이라크로 흘러들고, 유프라테스 강은 마치 감싸안듯이 쿠르드족 거주 지역을 에워싸며 흘러서 이라크로 들어가 바스라에서 다시 만난다.

이 ‘두 강 사이’ 지역의 약 절반은 현재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쿠르드족은 8천여 년에서 약 일만여년에 이르는 시간을 이 지역에서 부족 공동체를 이룬체 농업과 상업 목축업등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흔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이라크의 남부 메소포타미아 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지역도 메소포타미아의 일부로 남부 메소포타미아보다 앞서서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다. 또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란, 시리아, 아나톨리아,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서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는데 결정적인 배후 역할을 하기도 했다.


globalsecurity.org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 쿠르드족의 주요 거주지가 지도의 밝은색으로 표시되어있다.

이 곳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몇천년된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최근 필자는 디야르바크르주의 한 시골지역에서 약 7천년전 유물이 발견됐다는 한 밀밭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밀밭으로 남아 있었고 어떤 보호조처도 없었다. 심지어 동네 꼬마들이 쐐기문자가 적힌 기와조각을 주워 필자에게 줄 정도로 문화재 유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얼마 전에는 디야르바크르 주의 한 소도시인 에르가니에서 약 9천500여년 전 마을 유적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마을은 추가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겠지만 문명인이 살았던 인류 최초의 마을로 여겨지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많은 생활 용품들이 함께 발굴되어 그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25개의 서로 다른 주거 형태의 집들이 발견되어 그들의 개성과 필요에 따라 다른 형태의 집을 짓고 고도의 문화 생활을 해 왔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쿠르드족이 살았음이 분명한 유적지에서 수메르 문명의 문화로 알려진 쐐기 문자가 발견되어 쿠르드족과 수메르 문명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수메르 문명의 결정체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쿠르드족을 언급한 구절이 있다.

그리고 과거 이 지역의 쿠르드족은 놀랄만한 포용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타 민족이나 부족이 이 지역에 진출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기에 쿠르드족거주 지역에서는 한때 앗시리안, 아랍인, 에르메니안, 유대인 그외 여러 민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왔다. 심지어는 지금은 쿠르드족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있는 터키족이 일천년 전에 이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도 쿠르드족은 친절하게 그들이 살 땅을 내 줬었다.

인류 고대 종교의 살아있는 박물관

타 민족에 대한 포용성처럼 타 종교에 대한 포용성 역시 놀라워서, 기독교 초기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이 지역으로 피신한 기독교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는가 하면,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쿠르드족이 많았고(성경에서는 이들을 메대인이라고 표시하여 사비안교의 다른 이름인 만데안과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들도 종종 발견된다.

이슬람이 발생했을 때 아랍족 이외의 부족으로는 최초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부족 역시 쿠르드족이다. 그 결과 쿠르드족이 중심도시 디야르바크르에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가 존재하고 있으며, 1700여년 전에 세워진 교회(기독교의 초대 교회가 세워진 것과 동시대)에서 아직도 신자들이 예배를 보고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마을에는 아직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조로아스터교 율법에 따라 4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많은 쿠르드족은 조로아스터교가 쿠르드족의 전통 종교라고 믿는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일부지역에는 사비안교(만데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사비안이 정확한 호칭이다)를 믿는 신자들이 사는 공동체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사비안교는 아담을 신의 사자로 믿는 인류 최초의 유일신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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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인 거주지역

생활 속에 녹아든 문화재들

아직도 깊은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쿠르드족은 수천년간 이어온 전통적 생활 양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문화재를 대하는는 쿠르드족의 태도는 독특하다. 문화재를 삶과 유리시켜 보호하고 관리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을 이어온 삶이 일부로 보고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수천년 된 주택에서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2천년이 넘은 동굴 주거지는 현재 가축 우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들 동굴 주거지에 아직도 살고있는 사람들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그들의 수천년된 주택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이를 보수하고 수리한다. 한국이나 서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심각한 문화재 파괴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현재 살고있는 집을 수리하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이런 끊임없는 보수가 있었기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들 집이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수천년에 이르는 석성도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 없이 복원한다.

이들에게는 이지역에서 나오는 돌의 특성을 가장 잘 알고있는 이지역의 석공이 최고의 전문가인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보수된 부분에는 “00 시의 00대 시장 000가 0000년도에 이 성을 보수하다”라는 명판이 나붙을 지도 모른다. 지난 수천년간 성의 보수나 증 개축이 이뤄질 때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이들의 문화는 현대와 단절된 박제화된 문화가 아니라 아직도 삶과 함께하는 문화이고 앞으로도 수천년간 이어져나갈 문화인 것이다.

위기 처한 쿠르드 문화

민족국가를 건설한 경험이 없는 쿠르드족은 지금도 강력한 부족 공동체를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쿠르드족은 전통문화의 맥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그러나 터키의 쿠르드족 전통문화 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지금은 단절될 위기에 처해있다.

터키 정부의 지속적인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쿠르드족의 전통적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가 오고있고, 터키군의 지속적인 산악지역 시골마을 파괴는(약 3~5천개에 이르는 시골 마을들이 파괴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활하던 마을 주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들 난민들의 대부분은 인근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채 살아간다. 이들이 시골에 살아가면서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그 문화는 도시에서는 유지해 나갈 수 없기에 지금은 맥이 끊어져가고 있으며, 이들의 도시지역 유입은 급속한 인구증가로 인해 도시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재의 파괴를 재촉하고 있다.

이런 것 말고 터키 정부에 의한 고의적 쿠르드족 문화 파괴도 있다.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터키 공화국 창설의 아버지로 존경받으며 터키의 모든 지폐를 도배하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은 수천년된 쿠르드족의 고문서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쿠르드족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는 거의 어김없이 수백년에서 수천년된 산성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성에는 거의 어김없이 터키 군이 주둔하고 있다. 산꼭대기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이유에서지만, 만약 이곳이 터키족의 유적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쿠르드족 언어말살 정책도 대표적인 문화파괴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터키족의 문화 파괴에 대한 집요함은 코미디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었던 마르딘이라는 쿠르드족 도시는 터키 정부의 집요한 요구에 의해서 그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디야르바크르의 도시를 감싸고 있는 5Km에 달하는 성벽도 지방정부의 노력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기 직전에 터키 정부의 방해로 무산됐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문화유산 들이 터키에서는 국제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채 터키 정부가 원할때는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고, 파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자국의 문화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받는 것을 거부하는 터키 정부의 행태는 바미안 석불을 파괴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외에도 터키족의 쿠르드 문화 파괴 사례는 여기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오래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이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쿠르디스탄= 아쉬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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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족 정부의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서도 터키족에 의한 쿠르드족 탄압이 있었지만, 이는 간헐적이었고 민족 말살 정책의 성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제국에서 무하메드의 가르침에 벗어난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터키족의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정책이 본격화 된 것은 터키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터키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터키 공화국 설립 후 터키 정부의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정책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진행되어 왔다.
먼저 무스타파 케말은 쿠르드족의 고문서와 서적들을 소각시켜 버렸다. 특히 그는 쿠르드족의 역사를 말살함과 동시에 터키의 역사도 새로 집필하여, 터키 공화국의 역사를 오스만 제국과 단절시켜 버렸다. 그에 의해서 새로 쓰여진 역사책에 의하면 터키 민족은 인류 모든 문명의 시조가 된다. 수메리안, 에유비안, 바빌리안 등등 인류의 주요 고대 문명은 터키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문명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하루는 케말이 ‘제키’라는 역사학자를 찾아가서 이런 내용으로 터키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을 요구한다. 제키 역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였지만, 케말의 요구사항이 너무나 황당하여 머뭇거리자 케말은 “에쉑크 제키(우리말로 옮기면 ‘개새끼 제키’ 정도의 의미)야, 너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너는 내가 시킨 일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터키의 역사는 새로 쓰여졌고, 지금 이 역사책을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또한 군인이었던 케말은 언어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문맹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그간 아랍어로 표기해오던 터키어를 유럽의 로마자를 빌려와서 유럽어에 없는 발언 몇가지를 새로 추가한 터키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하지만, 아직도 터키인의 상당수는 문맹이다. 특히 농촌지역의 문맹률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한글처럼 완전히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무스타파 케말의 이 두가지 야심찬 작업의 결과 터키의 역사는 오스만제국의 역사와 완전히 단절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두가지 작업은 쿠르드족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스만제국의 역사 속에서는 쿠르드족이 터키족 이주 전에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분명히 다른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새로운 역사책에서는 쿠르드족의 존재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터키족은 쿠르드족을 독립된 민족이 아닌 ‘산악 터키인’이라고 부르며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또한 터키족 학자들을 동원하여 쿠르드족의 어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산악지역에서 살고있는 가난하고 비천한 터키인들이 눈내린 겨울 산을 걸어갈 때 나는 소리에서 “쿠르드”란 단어가 유래했다는 것이 터키의 한 학자가 공식 학술논문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 터키족 정부는 이제는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나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쿠르드족의 언어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또한 쿠르드어로 된 모든 지명은 터키어로 바뀌고 심지어 게릴라의 이름과 같다는 몇몇 이름은 사용 금지되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터키족의 많은 학자들은 쿠르드어가 아주 조잡한 원시 언어라고 가르친다.(대단히 발달한 고등언어 터키어 단어의 60%남짓이 외래어이고, 쿠르드어가 그중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터키에도 양심적인 지식인은 아직 남아있어서, 유명한 한 터키인 작가가 그의 글에서 ‘터키인의 60%는 멍청하다’고 비난을 했다가 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일이 있었다.(무슨 죄목인지는 알수 없었다. 아마도 국가기밀 누설죄?, 어쨌든 이로서 터키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게 확실해 졌다.) 그는 판사 앞에서 그의 실수를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는다. “60%가 아니라 80%라고...”(일천 여 년 전에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한 터키족이 이 지역에서 8~9천년 전에 발생한 문명의 주인이라고 가르치는 역사를 주입받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번은 쿠르드족의 중심도시인 디야르바크르(쿠르드이름은 아메드)에서 코미디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선거로 선출된 시장이 시청 주차장 벽을 장식하기 위해 10대 초반의 아이들을 불러 벽에 평화를 염원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시장(터키의 지자체는 선거로 선출된 시장과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총독 이렇게 두명의 시장이 존재하는 독특한 시스템이란 것은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이 이 아이들을 상대로 고소를 한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법적 미성년자인지라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그린 평화를 염원하는 글과 그림마저도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하여 처벌을 하고자했던 터키족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코미디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시장은 비록 아이들을 처벌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디야르바크르 주민들에게 평화를 위한 모든 행위는 정치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켜주는 정치적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디야르바크르에는 약 오래된 성채가 존재한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 성채는 25개의 정복자들의 흔적과 6개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석성 축성양식의 열린 박물관이라고 불리면서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성벽이다. 내성은 약 6~8천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면 외성은 2~3천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케말이 문서를 모두 소각하는 바람에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얼마 전 이곳의 쿠르드족 지방 정부가 이 성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코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일이 있었다. 유네스코에서 실사를 나왔고, 이 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터키 정부가 이를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다. 자국의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것 마저도 단지 그것이 쿠르드족의 문화재란 이유로 터키 정부는 이를 방해한 것이다. 또한 8천 여년 된 내성에는 터키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쿠르드족의 문화재 중 많은 수가 산 위에 존재하다보니 수천 년 된 많은 수의 산성들에 터키군이 주둔을 하고 있다. 이로인한 문화재 파괴는 터키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쿠르드족의 것이므로.)

최근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면서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일부 완화되었다. 몇 년 전부터는 쿠르드어 교육이 허용되었고, 문화행사 개최도 허용되었다. 또한 지방 자치제가 도입되면서 68개 도시에서 쿠르드족이 시장으로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터키 정부의 엄청난 물량공세와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성과이기에 분명 값진 성과이긴 하지만, 외압에 의해 일부 법과 제도가 완화된 것일 뿐 터키 정부의 의식의 변화는 아니기에,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은 완화되었다기 보다는 더욱 지능화되고 교묘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례로, 언어 교육은 허용되었지만, 공교육 기관이나 인가 받지 않은 시설이나 개인은 쿠르드어를 가르칠 수 없도록 법은 만들어 어쩔 수 없이 쿠르드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설 학원으로 등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들 학원들은 일정액 이상을 받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고, 이 금액은 가난한 쿠르드족이 감당하기엔 벅찬 금액이다.

또한 이렇게 개설된 사설 쿠르드어 학원마저도 온갖 시비에 휘말려 있다. 간판 색깔에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깃발에 들어간 노랑, 빨강, 초록 색깔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소송에 소송에 계류되어 있다.(물론 이 간판에는 이 세가지 색깔 이외에도 다른 색깔이 두어가지 더 사용되었다.) 또한 이 학원에서 만든 교재에 쿠르드 이름으로 일부 지명과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인쇄가 끝난 교재의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세상에 쿠르드어 교재에서 쿠르드어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니!)

이렇듯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쿠르드어 교육을 허용했지만,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괴롭히고 있으며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어를 공부하고있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노골적으로 감시와 미행을 붙여서 심리적 압박을 주기도 한다.(쿠르드어를 공부하는 친구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으로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분류되는 것이다.)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한 했을 때, 터키 주재 한국 대사관 관계자가 한국과 터키의 관계 증진을 필요성을 강조 하면서 ‘한국을 형제 국가라고 불러주는 나라가 터키 말고 또 있는가?’라며 했던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지금 쿠르드족이 처한 상황은 100여 년 전의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와 너무나 비슷하다. 또한 현재 터키의 정치 상황은 남한의 독재시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유사하다. 물론 터키족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다.

터키는 한국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재 시대를 혼합해 놓은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상황들에 대해서 자세한 연구 조사를 통해 이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한국에 가까운 나라, 과연 터키는 한국의 형제국가였다.

다음에는 쿠르드족의 문화에 관해 간단하게 소개할 계획이다.


터키의 쿠르디스탄에서 아쉬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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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행진곡에 오스만제국은 없다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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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쿠르드족 하면 제일 먼저 이라크의 쿠르드족을 떠올리지만 사실 쿠르드족의 대부분은 터키에 살고 있고, '쿠르디스탄'이라고 불리우는 쿠르드족 거주지역의 대부분은 터키에 속해있다. 그래서 쿠르드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터키의 쿠르드족을 이해하는 것이고, 터키의 쿠르드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키 쿠르드족의 중심이자, 터키 쿠르드족 독립 투쟁의 중심인 ‘디야르바크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쿠르드족의 수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란과 이라크에 살고있는 쿠르족의 인구는 대충 밝혀져 있지만, 쿠르드족의 대다수가 살고있는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축소하고 인구수에 따라 배분되는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교부금을 줄이기 위해 터키정부는 쿠르드족 인구를 가능한 축소하고자 한다.

일례로, 터키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디야르바크르의 인구는 50여만 남짓으로 나와있지만, 이곳 지방정부가 자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30여 만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 중 디야르바크르의 인구가 2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주민들은 그 근거로 쿠르드족 최대의 축제인 네부루스(새해)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100만 여명에 달하는 것을 든다. 이 100만 명은 터키 정부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사람들이고, 군인 및 교사와 공무원 등의 참석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고 또한 상점 문을 닫을 수 없는 자영업자들은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수를 모두 감안한다면 족히 200만은 될 것이라는 것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간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디야르바크르 인구의 약 20% 남짓은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쉽게 말해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존재하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사람인 셈이다.

또한 시리아에 살고있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이나마도 집계가 아예 없다.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집시와 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높은 쿠르드족의 출산율을 감안할 때 이들의 인구는 언론에 흔히 발표되는 수보다 적어도 30% 이상은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스만제국 건설과 박해

어쨌든 이들 쿠르드족의 대다수는 터키에 살고있고, 터키의 쿠르드족은 이라크의 쿠르드족과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91년의 걸프전과 이번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면서 쿠르드족의 협력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쿠르드족의 맏형 격인 터키의 쿠르드족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터키의 쿠르드족은 자본주의 제국 미국과의 협력을 거부했고 결국 미국은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손을 잡았었다.

그 결과 미국의 협력을 등에 업은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독립 쿠르드국가 건설이라는 쿠르드족 공통의 꿈에는 한발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터키 쿠르드족의 협력 없이는 독립 쿠르드국가 건설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터키의 쿠르드족은 여전히 자본주의 제국 미국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설혹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미국을 등에 업고 국가로서의 독립을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는 전체 쿠르드족의 독립국가가 아닌 쿠르드족의 일부가 건설한 개인 왕국에 불과할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의 배반

터키족과 쿠르드족의 갈등의 역사를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자. 터키족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이동해 온 것은 약 1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당시 쿠르드족은 이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흔히들 쿠르드족을 유랑민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한 지역에서만 수천 년을 살아온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장구한 역사를 갖고있는 붙박이 민족이 쿠르드족인 것이다.

이동과정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터키족이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였던 쿠르드족은 이들을 이슬람 형제로서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이들에게 거주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제공하였다.

쿠르드족의 영역 내에서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은 터키족은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탄불에 터를 잡고 약 600여년전 드디어 오스만이라는 대 제국을 건설한다. 제국 건설 후 다른 이슬람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지역에 대단히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 터키족은 어찌된 일인지 쿠르드족 만큼은 엄청나게 박해를 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쿠르드족의 영토 내에서 시작된 제국이기 때문에 쿠르드족이 제국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가 아니었나 짐작할 뿐, 터키 정부의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쿠르드족의 고문서들이 소각되거나 유실되어 이를 밝혀줄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몇몇 쿠르드족의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의 박해에 항거하여 봉기하지만, 무자비하게 진압을 당하고 이후 더욱 심한 박해가 되돌아오는 과정을 겪게된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편에 섰던 오스만제국은 패전을 겪고, 연합군에 의해서 나라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정 국가 설립을 목표로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후, 자신이 지역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디야르바크르를 찾아와 쿠르드족 지도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며 그 댓가로 쿠르드족 독립국가 수립을 약속한다.

이에 쿠르드족은 케말과 함께 터키 공화국 설립에 커다란 기여를 한 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역시 케말과 함께 이번에는 연합국 측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케말은 쿠르드족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이후 쿠르드족은 여러 차례의 산발적인 봉기를 통해서 약속 이행을 요구했고, 케말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쿠르드족 지도자들이 터키군에 의해 살해를 당한다. 디야르바크르 시내 한 복판에 딜란 시네마라는 현대식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 극장이 있는 자리는 원래 이때 살해당한 쿠르드족 지도자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덤은 손상하는 것은 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로 이슬람에서는 철저하게 금기시되고 있는 행위이다. 그 무자비했던 사담 후세인마저도 무덤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직도 저항세력이 마지막 항전 장소로 공동묘지를 택하는 모습을 이라크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미국은 이슬람 사회에서 무덤 훼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을 향해 총과 대포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이슬람국가 터키에서 터키 정부가 무덤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극장을 세웠다는 것은 터키 정부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압둘라 오잘란과 PKK

그 후 1970년대 후반 ‘압둘라 오잘란’이라는 정치 지도자가 사회주의 성향을 쿠르드 노동자당을 설립한다. 흔히 우리에게 테러 조직으로 알려진 PKK다. PKK는 쿠르드족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터키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터키 정부는 이를 번번히 묵살한 후 탄압한다. 이에 분개한 PKK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정치 투쟁을 무장 투쟁으로 전환한다.

그러다가 1990년 PKK는 터키 정부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후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한다. 그러자 터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쿠르드족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에 돌입한다. 그 후 약 10여 년 간 약 4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이 터키 정부군과 터키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무장세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 터키 정부에 협력했던 일부 쿠르드족 사람들이 PKK에 의해 처형을 당하자 터키 정부는 이 모든 학살이 PKK의 짓이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터키 정부는 PKK가 공식적으로 부장 봉기를 선언한 1984년부터 2002년까지를 “특별한 전쟁상황”이란 정말 ‘특별한’ 표현으로 이 전쟁이 내전이나 쿠르드 독립전쟁이란 것을 부정하고 있다. 1999년 압둘라 오잘란이 터키 정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오잘란은 모든 쿠르드족 게릴라들에게 터키를 떠나도록 지시한 후, 2004년 5월 1일까지 일시적인 휴전을 선언하며 이 휴전기간 중에 터키 정부가 쿠르드족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후 PKK는 단 한건의 군사행동도 실시하지 않은 채 이라크 등 인근 국가로 은신한다. 하지만 터키는 더욱 본격적으로 게릴라 소탕작전에 나서 심지어는 국제법마저도 위반한 채 이라크의 쿠르드족 영내 깊숙한 곳까지 군대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이는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PKK가 군사작전을 중단한 1999년에 터키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서방 정보기관들이 PKK를 테러단체로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터키 정부는 이에 관해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초반 3,000에서 4,000에 달하는 산간지역의 쿠르드족 마을에서 터키 정부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내 버린다. 이들 마을이 게릴라의 근거지라는 것이 터키 군부가 내세운 이유였지만, 이는 쿠르드 언어와 전통문화를 금지한 것과 연결된 터키 정부의 쿠르드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들 마을에서 쫓겨난 쿠르드족 대부분은 난민 아닌 난민이 되어 터키의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분명 국내 난민임에도 불구하고 난민 대접을 받지 못한채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중 소수는 유럽 등지로 이주하여 난민 지위를 부여받았고, 또 소수는 이라크 등 인근 국가로 이동하여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 중 일부가 지난번 기사에서 이야기했던 이라크의 마흐무르 캠프에 살고 있다.

1990년대 쿠르드족과의 내전과 함께 막대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터키 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한다. 그 과정에서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90년대 중반부터 쿠르드 족에게도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1999년에는 지방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터키에서 최초로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정당 해산을 당했던 쿠르드족도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여 이 선거에 참여하였고, 첫 번째 선거에서는 38개 도시에서 그리고 2004년 치러진 두 번째 선거에서는 68개 도시에서 선거에 승리하여 쿠르드족 시장과 의회를 배출한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쿠르드족에게 완전히 지방정부의 모든 권한을 내줄 수는 없으니, 고민하던 터키 정부는 독특한 행정 체계를 고안해 낸다. 바로 한 지역에 두 개의 정부를 두는 것이다. 한 개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상적인 지방 정부이고, 다른 한 개는 중앙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시장이 총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력은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총독에게 부여되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방 정부는 문화 등 극히 한정된 권한만을 갖는다.

물론 이 시스템은 쿠르드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전체 터키에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시스템은 쿠르드족 지역에서 특히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있으니,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있는 총독은 바로 터키족이기 때문이다.

터키족 지역에서 이 두 정부는 서로 협력 보완을 하는 관계이지만, 쿠르드족 지역에서는 상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선거로 구성된 지방 정부가 추진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웃지 못할 헤프닝이 발생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헤프닝을 소개한다.

터키=아쉬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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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쿠르드족, 또다른 피압박민

시민의신문에서 펍니다.


이라크에 있을 때였다. 필자가 터키의 쿠르드족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터키를 통해서 이라크에 들어가던 중에 만났던 한 친구가, 이라크의 마흐무르라는 곳에 터키 쿠르드족 게릴라의 무장 캠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터키의 쿠르드족이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적이 있기에 평소에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던 차라, 잘됐다 싶어서 바그다드 들어가는 길에 잠시 방문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게릴라의 무장 캠프라는 마흐무르 캠프는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하지 않은가?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을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잠시 후 만난 캠프 관계자에게 게릴라의 무장 캠프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나 평범한 난민캠프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자 웃는다. 그러면서 터키 정부의 ‘프로파간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캠프 이곳 저곳을 안내해 준다.

캠프를 돌아보면서 너무나 평범한(사실 난민 캠프가 평범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여러 난민 캠프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필자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라크 사람들에게는 전쟁 상황이 평범한 상황이듯이.) 난민 캠프라는 필자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꿈꾸며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나가는데 급급한 다른 난민캠프와는 달리 이곳 사람들은 여기서 대안공동체를 가꿔 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가장 먼저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었다. 1만 여명이 생활하는 이곳 캠프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지은 학교들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여러 개가 있었고,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 정도 공급받는다는 물을 아끼고 재활용하여 캠프를 푸르게 가꿔나가고 있었다.

캠프의 가장 중심지에 해당하는 곳에 여성들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곳은 금남의 집은 아니지만 여성들의 휴식에 방해되지 않도록 남성들은 대단히 조심을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회관을 짓기 위한 공사가 자원봉사자들의 손에 의해 뙤약볕 아래서 진행되고 있었다.(사실 학교의 교사들도 모두 급여를 받지 않는 자원자로 이뤄져 있는 등, 이곳에서의 대부분의 활동은 자원에 의해 이뤄진다.)

또한 필자를 안내해줬던 친구는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깡통에 드는 음료수를 마시기를 거절하는 등 도저히 난민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간 캠프를 세 차례나 옮겨서 지금은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 제일 변방인 이곳까지 밀려왔을 정도로 동족인 쿠르드족에게서조차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한번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난민촌을 둘러본 후 필자에게 소감을 묻자 '난민촌이 아니라 대안공동체를 둘러본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하니 배꼽이 빠져라고 웃는다. 웃음이 많은 사람들이다.

바로 난민촌을 벗어나 차로 20-30분만 가면 현재 무장 저항 세력의 새로운 집결지로 알려진 모술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흔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마을의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한 난민촌 생활이지만, 유엔의 지원을 받고 있기에 먹고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들이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문제로 꼽은 것은 청소년 교육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어떻게 스스로 학교를 세워서 가르치고 있지만, 대학교육을 시킬 교육기관이 없기에 난민촌 밖의 대학에 보낼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마을 전체를 통틀어 컴퓨터가 단 한 대밖에 없고, 그나마 인터넷이 들어오지 않아 아이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전혀 시키지 못해 안타깝다고도 했다.

시간에 늦어 다음에 다시 들러 더 많이 돌아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은 필자가 터키의 쿠르드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비록 같은 쿠르드족이라고는 하지만, 터키의 쿠르드족과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지난 걸프전과 이번 전쟁에서 이라크를 침략하기 전, 쿠르드족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느낀 미국이 터키의 쿠르드족에게 협력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터키의 쿠르드족은 전쟁의 명분을 들어 거절했고 결국 미국은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손을 잡았다.

터키 정부의 엄한 박해 속에서도 터키의 쿠르드족은 이라크의 쿠르드족에게 항상 연대를 표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고 있는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마흐무르 난민촌의 사례에서 보듯이 터키의 쿠르드족에게 별로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라크의 두 쿠르드족 지도자는 아랍권의 다른 정치지도자들처럼 유력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고 있지만, 터키 쿠르드족의 지도자인 압둘라 오잘란은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전체 터키 쿠르드족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터키 정부에 의해 그 지도자들이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당하고 정당 자체도 해산 당해 이름을 네 번이나 바꿔야 했던 터키의 쿠르드족 정당은 터키내의 다른 정당들보다도 훨씬 더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비록 쿠르드족이 이 지역의 몇몇 나라에서 흩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많은 수가 터키에 살고 있고, 또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터키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디야르바크르가 전체 쿠르드족의 중심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터키의 쿠르드족과 디야르바크르를 포함한 인근 지역을 이해하는 것은 전체 쿠르드족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협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거론되는 것이 사이프러스와 함께 쿠르드족 문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 쿠르드족의 문제는 중동지역 뿐 아니라 유럽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제적인 문제이다.

쿠르드족이 독립을 시도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관측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쿠르드족이 구소련 지역을 포함 6~7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고, 수백만 명이 유럽 등 다른 서방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결코 허황된 예측은 아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터키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은 이라크의 쿠르디스탄과 함께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두 강의 사이’라는 의미이고 이 두 강은 터키의 쿠르드 지역에서 나란히 발원하여 2000여 km를 흐른 후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다시 만난다.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라크의 남부 메소포타미아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기적으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오히려 앞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인류 문명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사실 쿠르드족 문제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함께 중동지역의 가장 민감한 문제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문제가 국제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터키 정부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터키의 쿠르드족 문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여행자가 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난 십 수년 간 거의 4만 명에 육박하는 쿠르드족 사람들이 터키 정부군과 터키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탄압 정권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2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가 학살한 팔레스타인 수가 3천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터키 중부 지역에서 한 한국인 여행 안내인이 터키 동부지역에 관한 한 관광객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국제적으로는 평범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단어를 단지 언급했다는 이유로 터키인 여행 안내인에게 구타를 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즉 쿠르드족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 외국인조차도 폭행을 당하는 것이 현재 터키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 또한 터키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당으로 평가받는 터키 공산당조차도 쿠르드족 문제에 있어서는 터키의 다른 보수 우익 정당들과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

필자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터키의 쿠르드족과 인근 지역에 살고있는 쿠르드족에 관해 글을 쓸 예정이다. 터키의 쿠르드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기대하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이들의 생활 그리고 이들이 받는 정치적인 억압 등과 함께 이 지역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해프닝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할 생각이다.

터키=아쉬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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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과 더불어...쿠르디스탄 이야기

  2005년 7월 9일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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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오후 6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버스타고 집에 오니 9시쯤 되더군요. 서울의 교통체증을 보름만에 겪다보니 참 힘들더군요. ㅎㅎㅎ

귀국일정을 너무 빡세게 잡아서 지금까지도 여독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새벽 2시경 디아르바크르 공항으로 출발해서 새벽 4시경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 공항에 새벽 6시경 도착한 뒤 앞으로도 한달 반동안 터키에 남아 또 다른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지선'씨와 만난뒤 아침 8시경에 이스탄불을 출발해서 오후 6시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비행편으로만 16시간동안 시달리는 일정이었는데요.

디아르바크르에서 무려 1시간 30분이나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귀국하지 못할뻔 했습니다. 30여분만 더 연착되었어도 귀국못했을 것이라는...


디아르바크르에서의 경험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만,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동안 터키는 2002월드컵을 통해서 '한국과 형제국가'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이스탄불등을 통해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 그리고 PKK등의 활동을 통해 알려진 민족분쟁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되고 터키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솟을 뿐입니다.

그동안 터키에 대해 속은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터키내에서 쿠르드 민족의 위치는...

 

박정희 독재정권과 일본제국주의 강점기를 합쳐 놓은것과 같았습니다.

지금은 터키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유화정책을 쓰고 있어서 잘못판단하기 쉽지만 더 지능화된 통제시스템이라도 판단됩니다.

쿠루드 민족에게는 쿠르드어라는 고유의 언어가 있습니다만, 몇 년전까지만해도 쿠르드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가 되는 그런 국가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유화정책때문에 쿠르드어를 배우고 쓰는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학교를 포함한 관공서, 정당, 국가기관 그 어느곳에서도 쿠르드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방문했던 DEHAP(데하프,민주민중당:쿠르드민족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합법정당. 터키에서는 쿠르드 민족을 위한 정당은 불법이기 때문에 노동자등 소외계층을 위한 정당으로 합법적 틀내에서 만들어져 있다. HADEP(하데프,민중민주당)이 해산된 뒤 간판만 바꿔달았다고 봐도 무방함) 이스탄불 지역 대표가 5.1 메이데이 포스터에 단 한줄의 쿠르드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유화정책을 쓰기 이전에는 더욱 엄혹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쿠르드 전통담배(예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피우던 쌈지담배와 비슷함)를 피운것이 세금을 내지 않은 불법담배를 피웠다는 죄목이 되어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끝에 죽음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화정책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평화의 어머니(Mother of Peace)'라는 단체는 한국의 민가협, 유가협과 비슷한 단체였는데요. 한국보다 상황이 더 비참하다고나 할까요.

큰 아들이 PKK소속의 게릴라라면 작은 아들은 징집되어 정부군 소속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그런 현실속에서 만들어진 비극적인 단체입니다. 저희가 터키를 방문하고 있던 그 즈음에도 그리고 한국에서 편하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터키군의 PKK 게릴라 소탕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PKK는 벌써부터 터키 정부에 평화협상을 제안한 상태입니다만, 정부는 평화협상엔 전혀 관심이 없고 쿠르드 민족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쉬쉬하기에 바쁠 뿐입니다.

귀국하던 마지막날 평화의 어머니가 주최하는 집회에서 PKK의 당수인 오잘란을 석방하라는 구호가 터져나오자 마자 경찰은 구호를 멈추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협박을 방송할 정도였습니다. 터키에서 '오잘란', '쿠르디스탄'이라는 단어는 금기되어 있습니다. 다른 구호를 외칠때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오잘란'이라는 말만 나오면 체포한다는 협박방송을 하는 터키 경찰이었습니다.
집회현장을 보면서 너무나 어이없었던 것은 경찰이 너무나 당당하게 캠코더를 들고 집회 주동자를 촬영하는가 하면, 군 정보부로 보이는 자들도 캠코더를 들고 당당히 촬영을 하는 것이었죠. 심지어는 집회장 주변에는 터키군의 헬기가 정지한 상태로 한참동안 떠 있기도 했구요.

캠코더로 촬영하는 경찰을 제가 캠코더를 촬영을 하자 곧바로 경찰이 다가와 촬영을 중단하라고 협박하기도 하더군요. 제가 외국인이었고, 마침 기자증이 있어서 아무런 위해는 없었지만 만약 쿠르드인이었다면 곧장 체포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들중의 한 경찰은 집회도중 저를 내내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집회참석자도 아닌 저를 촬영한 것에 대해 항의하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라고 대응하더군요. 대사관에 연락하겠다고 협박하니까 무엇을 원하느냐고 해서 제가 촬영된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니 '맘대로 해봐라'라고 하더군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차원이 다른 그런 경찰들이었습니다. 참 깜빡했는데, 집회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찰이 총기를 휴대한 상태로 대기중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전경과 같은 집단이었는데요. 거의 경찰특공대 수준이더군요.

집회장에 간 것만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고 할까요. 디아르바크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도시가 된지 9,000년된 도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 12,000년된 곳 디아르바크르는 현재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날 집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한 달 후쯤 잡혀가 경찰의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정부의 유화정책이 이루어져 그렇습니다. 아니면, 집회를 했다는 것만으로 전원이 잡혀갔을 것이라고 합니다.


더 웃기는 일은...

터키는 지방자치가 꽤나 잘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아르바크르를 비롯한 쿠르디스탄 지역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에는 100여개가 넘는 도시,마을의 시장이 데하프 소속의 쿠르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라면 거의 자치정부 수준이 아닐까 하고 순간 착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거버너'라고 불리는 직책을 알기전에는 말입니다. 디아르바크르를 예로 들자면, 지방자치에 의해 당선된 시장이 있고 정부에서 파견된 거버너가 있는 것이지요. 일종의 총독쯤 되는 사람인것이지요.

그래서 거의 모든 실권은 거버너가 독차지하고 있지요. 경찰과 군대, 그리고 거버너가 연계된 통치를 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장은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문화사업이나 복지사업정도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제한적으로...

디아르바크르만 하더라도 그 동안 터키정부의 발표로는 인구가 50만정도라고 해왔습니다만, 최근 민선시장에 의해 조사 발표된 인구가 150만입니다. 쿠르드민족은 산악지대에서 생활하는 민족입니다. 터키정부는 그 동안 꾸준히 산악지대에서 쿠르드민족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군인들이 베트콩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이유로 마을을 불태워 없애버렸듯이 정부군은 지금도 동부산악지대의 쿠루드 마을을 없애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입된 인구가 모두 도시의 최하 빈민층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정부는 상황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으니... 실업률 60~70%가 빈말이 아니란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왔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극심한 실업률탓인지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것입니다. 시장을 방문해도 가게를 방문해도 아동이 노동하지 않는 곳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저임금으로 부려먹기 쉬운 점과 한 푼이라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합쳐져 이루어지고 있는 아동노동은 그 사태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어딜가나 아이들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는...

그나마 좀 사는 집의 아이들은 노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집의 아이들은 노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 숫자가 제가 본 것으로 거의 반반이거나 아동노동이 더 많다고 느껴졌습니다. 시장을 가거나 버스정류장을 가건, 식당을 가건 일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고, 심지어 과일을 사기 위해 마켓에 갔을때에도 무게를 달아 가격표를 붙여주는 사람이 댓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마음이 그래서였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디아르바크르를 비롯한 쿠르디스탄지역은 아주 부유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만리장성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디아르바크르의 성벽이 있습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동굴집을 파고 살았던 유적이 남아 있고, 디아르바크르 자체가 기원전 7000년경에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뿐만아니라 터키 석유매장량의 60%이상이 쿠르디스탄지역에 매장되어 있고, 티그리스-유프라테스로 이어지는 수자원 역시 쿠르디스탄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터키정부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일 것입니다. 지금도 터키정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에 3개의 댐을 건설하여 이라크, 시리아와 마찰을 빚고 있으며 또 다른 댐을 건설계획중에 있습니다.

이런 쿠르디스탄 지역이 터키에서 가장 못사는 지역입니다.


아마 앞으로 계속 쿠르드 민족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할것 같습니다.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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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디아르바크르입니다.

지난 7월 쿠르드에 방문하고서 남긴 글입니다. (작성일 2005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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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디아르바크르입니다.

디아르바크르는 쿠르디스탄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도시로..인구 약 200만으로 추정되는 도시입니다.

하지만 10개의 상점가운데 1~2개만이 열리고, 실업률은 60%에 달하는 아주 열악한 상황에 있습니다.

이라크 전범재판 참가팀을 모두 한국으로 보내고 저희(CGA 평화활동가 지은과 저)는 이스탄불에서 데하프라고 불리우는 '민주민중당'과 '인권연합', 쿠르드 문화센터인 '메소포타미아 문화센터'등을 방문하며 디아르바크르를 방문할 준비를 했습니다.

순조롭게 준비가 되어 가는 듯하다가, 디아르바크르로 떠나는 비행편이 매진되어 버스로 이동하느냐, 기다렸다가 비행기로 이동하느냐로 고민을 했습니다만...

버스이동시 24~28시간 가량 소요된다는 말에 하루를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이동키로 결정하고, 어제 디아르바키르로 왔습니다.

다행히도 데하프 이스탄불 지부에서 데하프 디아르바크르 지부로 연락을 해주어 데하프 당원이 마중을 나오게 되어 큰 문제 없이 디아르바크르에 도착했습니다.

디아르바크르에 도착하자마자 그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한상진'씨가 곧바로 연락되어 한상진씨의 집으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는 하산키프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하산키프는 쿠루드족의 전통적인 동굴주거형태가 남아 있는 곳으로, 쿠르드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코스라고 생각됩니다.

뙤약볕아래 방문한 하산키프는 등산을 하는 기분으로 올라가서 그들의 주거형태와 역사를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만들어진지 몇 년이 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곳은...
터키정부의 고의적 외면으로 인해 쿠르족의 생활이 무척 힘이 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스탄불보다 하산키프의 광경이 더욱 관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펼쳐진 대자연과 그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온 쿠르족의 생활, 그리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강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광가치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터키정부는 쿠루드족의 실체가 국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그 흔한 관광책자에 하산키프에 관한 내용은 있지 않습니다.

하산키프뿐만 아니라 이곳 디아르바크르에도 아주 오래된...알려져 있기로 가장 오래된 모스크가 있고, 세계에서 만리장성 다음으로 긴 성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나 된 것인지, 아니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벽에 관해서는 여행책자에 잠시 언급된 것을 보긴 했습니다만, 그 외의 다른 정보는 거의 얻질 못했었지요.

저희는 오늘 하루동안 하산키프에서 돌아온 뒤 쿠르드 민족의 문화센터를 찾아보고, 그 곳에서 쿠르드 음악그룹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음악도 듣고 대화를 나눈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머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영어를 몹시 못하는 관계로 저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내일도 여러 일정이 있을것으로 예상됩니다.

내일일은 또 내일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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