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왜’ 여성노동권이냐고? 사실 요즘 여성노동자들은 한 달에 백만 원 벌기도 힘들다. 여성들은 하루 12시간씩 꼬박 일해서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액수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의 20~3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하는 일은 대체 뭔가? 텔레마케터, 청소용역, 간병인, 보험모집인, 학습지교사 등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이다. 또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여성이다. 여성들의 노동은 가사노동의 연장선에 놓여진다. 자녀를 돌보듯이 누군가를 돌보는 노동이나 하루 종일 움직여도 끝이 없는 가사노동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한 시작도 끝도 없이 손이 많이 가지만 단순 반복적인 일들이다. 백화점이나 유통상점 점원, 캐시어, 식당 점원 등은 감정노동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도 버려야 하는 일들을 한다. 이들 여성의 입에서 우리는 간 쓸개도 다 빼놓고 일한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또 최근에는 여성 노동력의 자원으로서 ‘섹슈얼리티’가 동원되기도 한다. 70년대에는 여공이 되었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제는 더 넓어진 서비스 직종에서 나레이터 모델, 도우미, 홀서빙 등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은 극단적으로는 성매매(성노동)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용모 단정이 가장 중요한 고용 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노동과 구분된다.

 

여성노동의 주변화

 

유엔보고서는 매일 행해지는 노동시간의 66%가 여성에 의해 이뤄지는 반면, 여성은 세계 전체 소득의 10% 그리고 전체 부동산의 1%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 빈곤층 13억 인구 가운데 70%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25%~50% 더 적은 급여를 받고 있다. 고용주들은 여성을 더 순종적이고 덜 조직적이며, 결혼이나 임신 같은 사유로 해고하기 쉬운 존재로 보고 있다. 하청, 시간제노동, 계절노동, 성과급노동 등이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는 세계 경제에서 여성은 특히 불안정하고 더욱 착취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노동은 부차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쉽게 해고된다. 세계 여성노동자의 94%가 비정규, 비조직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회적,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고 또한 노동단체들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형편에 처해 있다. 이제까지 여성은 이중노동에 의해 고통받아왔으며, 세계화 이후 여성노동의 주변화와 빈곤의 심화로 더욱 고통받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는 더욱 값싸고 더욱 유연한 노동을 찾는 자본의 속성에 따라 결국 여성들의 상태를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 아이엠에프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효율성이 낮다는 이유로 여성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퇴출시키고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0%에 달하나 시간제, 임시직, 파견제 등 비정규노동이 여성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고용조정 과정에서 새로운 남녀차별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여성우선해고’였다. 기혼여성(맞벌이 여성, 사내커플, 임신한 여성, 출산휴가 중 여성), 장기근속여성, 비정규직 여성을 1차 해고 대상으로 삼았고, 정리해고 후 비정규직(시간제, 계약직, 아르바이트)으로 유도하고 강제로 무급휴가를 유도하여 퇴직하게 만드는 등 성차별적인 여성해고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의 상태는 어떠해졌는가? 여성가구주 가구 중 빈곤 가구는 IMF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이(40.3%→43.8%)를 보여 남성 가구주 가구(19.8%)의 두 배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여성들, 정말 비정규직을 원할까?

 

전문가들은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 등으로 노동가능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추세인데다 남성경제활동 참가율은 이미 90%를 웃돌아 향후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여성노동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볼 맨 소리를 한다. 이 말은 결국 여성인력 활용이 남녀평등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 때문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가사노동과 직장생활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여성들의 요구라기보다는 노동력 부족 위기에 직면한 자본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요구하는 유연안정화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만 한다. 동시에 출산 양육 보살핌 노동의 온전한 제공자로서 여성인력을 활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여성정책이 갖는 근본적 한계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아래서 여성은 가사노동과 양육의 부담과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위치로 항상적인 이중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여성 임금은 남성의 65%, 비정규직 노동자의 70% 이상이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53%, 여성 임시일용직이 70%인 상황으로 여성고용의 불안정과 여성의 빈곤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시장에는 더욱 값싼 노동력을 선호하는 자본의 입장이 철저하게 관철되면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여성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한다’는 억지 이데올로기를 보자. 여성은 대개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의 이중부담을 지고 있다.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간접적으로 고용된 여성 노동자들은 이중부담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중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사노동을 병행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선택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99년 조사된 ‘미조직 여성노동자의 고용현황과 과제’(한여노협, 전국여성노조추진위)에 따르면, 여성 비정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취업한 이유에 대해 38.7%가 정규직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또 일정 근무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약속했다거나(5.1%), 정규직으로 취업했으나 임시직으로 전환되었다(3.7%), 취업한 후 비정규직인 줄 알았다(5.1%)를 합하면 전체 비정규직 중 52.6%가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강제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이론에서 특히, 여성 노동에 관해서는 노동자의 공급보다 자본의 수요가 언제나 주도적인 요인이라는 사실은 여성 스스로의 직업 선택이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준다.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직종에 분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실직 남성 대신 노동시장으로 유입된 여성가장은 가족임금, 즉 잘못된 ‘남성생계부양자모델’로 인해 왜곡된 임금구조 아래서 질식당했다. 은행에서 부부 취업노동자들 가운데 여성은 예외 없이 해고된 것처럼, 남성들은 가족을 책임지는 가족생계부양자이기 때문에 여성이 우선 해고 대상이 된다. 이것은 아이엠에프 이후 한국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통용되는 여성해고 사유다. 그러나 실제 기혼 여성은 다양한 생계부양적 임금노동을 해야만 생활을 유지해 갈 수 있다. 남성가장이 벌어오는 수입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는 가족임금체계 자체가 이미 무너졌다는 것이다. 

 

‘비공식 노동’을 통해 본 여성의 현실

 

우리들 모두의 엄마는 때로 가내노동을 하기도 하고 보험모집을 하러 다니기도 한다.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남성가장의 보조적 역할로 취급받으며, 남성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거나 여성권을 박탈당하면서 제발 잘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 모든 억압과 차별을 감내한다. 우리들 엄마들은 이른바 ‘비공식 노동자’들인 것이다. 현재 이러한 비공식부문의 노동은 신자유주의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에 동원되고 있다.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비공식부문의 전담자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데 사회문화적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물론 생산자로서의 ‘노동자’ 개념은 이 안에 없다.

 

간병인, 비공식노동 문제를 앞장 서 제기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노조투쟁은 국립병원이라는 서울대병원이 유료소개소를 통해 고용의 책임을 탈피하고자 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이들의 투쟁은 유료소개소가 중간착취와 외주용역의 온상임을 폭로했다. 간병인들은 분명 노동자들이면서도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다. 비공식 노동자는 고용계약관계에 있지 않거나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 등이 적용되지 않는 이른바 ‘법외노동자’이다. 이러한 비공식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통계에 반영되어 있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최소 5백여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일할 기회조차 없는 5~60대 중ㆍ고령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 때문에 간병인 노동자들은 24시간 주 6일 근무에 일당 4만 5천원이라는 저임금을 감내하고 있다. 잠깐 휴식을 취할 마땅한 공간마저 제공받지 못하는 설움을 견뎌내면서 간병인 노동자들은 수년간 병원을 지켜오고 있다. 

 

비공식 노동자라고 하면 조금 생소하고 낯설지만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유 배달원, 학습지 방문교사, 텔레마케터, 가사청소도우미, 미싱사, 장애여성노동자, 가내노동자. 법적으로나마 명시되어 있는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의 적용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부당 해고를 당해도 구제신청을 할 수 없고 일하다 다쳐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없으며 쥐꼬리만한 보수에도 최저임금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출산휴가나 육아 지원금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런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사노동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일들이 많고 그래서 그런지 많은 여성들이 비공식 부문의 일을 하고 있다.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외면되는 현실은 여성을 점점 더 소외시키고 있다.

 

주변화된 여성노동의 실체,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세계경제의 지배적 질서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는 기업의 재구조화를 중심으로 노동에서의 비용절감과 통제를 통한 노동유연화를 강화하고 있다. 자본의 이동성에 대한 무제한적 보장을 허용하는 노동유연화는 노동의 탈숙련화, 비공식화 그리고 노동의 여성화로 나아가고 있다. 주변화된 노동으로서 비정규직 문제는 부당노동행위를 동반하여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여성노동의 낮은 생산성과 임시성이라는 허구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여성노동을 유연화된 노동력으로 대상화시키는 명백한 성별화된 노동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즉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영역은 가정이며,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재생산노동으로 생산성이 낮은 노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자본제적 논리에 의해 노동생산성이 정확하게 측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니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는 남성의 영역인 것으로 간주되는 생산노동에서조차 생산성이 낮은 노동으로 평가되거나 임시적인 노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성노동의 임시성에 대한 확신 역시 가부장적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요구에 의해 유연화 된 여성노동의 선택적 착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가부장적 전략에 다름 아니다.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여성노동에 대한 성차별적 기제들이 여성노동을 낮은 임금, 낮은 지위로 전락시키고 있다.

 

여성노동권을 말하자

 

이래저래 여성들은 더욱 더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 여성 노동시장 진출이 늘고 있는 이유 하나는, 서비스산업의 성장 속에서 감정노동을 수행할 여성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요구 때문이다. 둘째, 아이엠에프 이후 남편 노동만으로 도저히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므로 여성이 가사 일을 전담하면서 소득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시장에 나온 여성들은 저임금-장시간 열악하기 짝이 없는 노동조건을 감내해야만 한다.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제로 교묘히 작동하는 것이다.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직종은 한정되어 있고, 동시에 남성 직종에 비해 가치 절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권을 쟁취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전제는 바로 공/사 영역 분리-성별분업 이데올로기 극복이다. 이것이 전제될 때 결과로서 여성의 빈곤화는 극복된다.

 

한국사회는 여성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직장에서는 항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참아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가정에서는 출산 양육 보살핌 노동과 가사노동을 도맡아 해야 하는 재생산노동의 전담자로,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한 가지 더 덧붙인다. 가정 일도 직장생활도 다 잘해내는 슈퍼우먼이 되라! 아파 드러누울지언정 어느 하나도 빵구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매스컴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떠들어댄다. 이쯤 되면 한국은 정말이지 여성들이 살기 싫은 나라다. 가사노동과 함께 이중부담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노동권 자체를 박탈당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즐겁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 이것은 정말 불가능할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노동의 여성화, 빈곤의 여성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여성노동권 쟁취와 재생산노동의 사회화를 요구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주장들이 넘쳐날 때 현실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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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1 13:04 2006/05/0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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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6/05/02 12:27 | DEL
突破, 늘 그랬듯이님의 [[이황현아] 왜 '여성노동권'인가] 에 관련된 글. 위 글을 읽고 생각난 김에 쓰는 글. 뭐, 꼭 트랙백까지 할 것인가 싶으나 '연상'이 되어. 그리고 진보네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