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교안으로 정리한 한국노동운동사. 해마다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일단 정리된만큼 올려놓는다.

 

1. 들어가며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은 세 축으로 발전해왔다. 첫째, 어용노조에 맞서 대중조직운동으로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 둘째, 노동조합과 구별되는 현장대중(투쟁)조직, 현장활동가조직 등으로 발전해온 현장조직운동, 셋째, 노동운동단체, 비합법 써클, (반)공개 정치조직 등 ‘정치적 노동운동’의 단계를 지나 1996~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 이후 본격화된 노동자정치운동이 그것이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 노동자정치운동이 각각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고 과제와 전망을 찾아보려고 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 투쟁의 힘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정리할 것이다. 현장조직운동은 현장대중투쟁조직, 현장대중일상조직, 현장활동가조직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노동자정치운동에서는 ‘정치적 노동운동’에서 노동자정치운동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단계별로 들여다볼 것이다. 그런 다음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노동자정치운동을 한 데 묶어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뽑아볼 것이다.

 

2. 민주노조운동

 

2-1. 민주노조운동의 이념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서 사상 또는 이념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몇몇 이론가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노동자대중의 가슴 속에 각인된 민주노조운동의 이념들은 무엇일까?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1987년 여름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고 1970년 “근로자도 인간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자기 몸을 불태웠던 전태일 열사의 ‘대중적 부활’이었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망’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절박한 현실의 요구다.
민주노조운동의 생명은 ‘자주성’에 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있지 않다면 그 운동은 이미 민주노조운동이 아니다. 다음이 ‘민주성’. 일상 시기에 분리돼 있던 의사결정과정과 집행과정은 투쟁 시기에 ‘쟁의대책위원회’로 통일된다. 집행과정에 대한 평가와 대중의 통제과정은 잠정합의안에 대해 반드시 조합원 찬반을 묻는 ‘총회민주주의’로 구체화됐다. ‘직권조인’은 노동조합운동의 ‘수치’가 됐고, 어용노조들조차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빼먹을 수 없게 됐다.
“오늘 우리의 투쟁이 내일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는 ‘투쟁성’,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성’과 ‘연대성’, “노동해방”으로 상징되는 ‘변혁지향성’ 등도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정신’들이다.


2-2.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력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전국, 전산업에 걸쳐 동시다발로 폭발한 ‘사실상의 전국 총파업’이었고 파업이 파업을 낳으면서 들불처럼 번져간 ‘자연발생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으로 전국 1300여개 사업장에 신규 노동조합이 건설됐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맹을 필두로 서울, 부산, 진주, 대구, 인천, 경기남부 등지에 ‘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건설함으로써 한걸음 더 전진한다. 여기에 병원, 언론, 사무금융, 교사, 대학, 연구소 등 비제조업 분야에서도 업종별 노동조합들이 대거 결성됨으로써 우리 사회 전반에 노동조합운동을 일반화시켰다. 민주노조운동은 19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1990년 전노협, 1991년 연대를위한대기업노조회의, 박창수 노대위와 ILO 공대위,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1995년 민주노총으로 확대·강화됐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와 IMF, 1998년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 들어와 전체 노동자 투쟁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그 성과로 2005년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가 출범했다.

 

2-3. 세상을 바꾸는 노동자의 힘, 투쟁

 

2-3-1.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전노협 5월 총파업투쟁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을 이끌었던 지도부에 대한 재판에 참가하기 위해 조합원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어렵게 탄생한 민주집행부의 이영현 위원장과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되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갑용 사무국장을 의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1990년 4월25일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4월28일 새벽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1만여명의 전투경찰병력이 백골단을 앞세우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했다. 육·해·공 삼면에 걸친 이른바 ‘미포만’ 작전이었다. 실제 전투상황을 방불케했던 이 작전은 노동자들을 국가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입안됐다.
그러나 ‘공권력’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으로 향하던 경찰병력을 저지하면서 격렬한 가두 바리케이트전을 벌였던 것이다. 4.28 연대투쟁으로 불리우는 이날의 투쟁은 “현중이 깨지면 현자도 깨진다”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연대의식과 “여기서 더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지체한 공권력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저지선을 간신히 뚫고 현대중공업으로 진격해갔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현대중공업 정문의 1차 저지선이 무너지자 노동자들은 비상식량과 식수를 챙기고 난공불락의 요새 골리앗 크레인으로 올라가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골리앗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몰리고 몰린 마지막 벼랑 끝 골리앗 상공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고 선포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5월1일, 5월3일, 5월4일 전국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의 광범위한 파업 동참으로, 국민연합의 5월9일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과 5월18일의 국민대회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마창노련 동맹파업을 비롯한 선진 지노협의 동맹파업→전노협 5월 총파업(정치파업)→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의 임투 참여(경제파업)→국민연합의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으로 발전한 이 투쟁은 우리 사회 대중투쟁의 합법칙적 발전경로를 보여주었으며 1990년 1월22일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체로 출범한 전노협을 투쟁으로 사수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은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보여진 ‘거리에서 촉발돼 거리에서 끝나는 무계급적 전민항쟁노선’의 한계를 ‘왼쪽에서’ 극복해냈다. 한편 전민항쟁노선을 ‘오른쪽에서’ 폐기한 일군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선거혁명’의 길로 대거 ‘전향’했다.
골리앗투쟁은 한국사회 변혁의 ‘물리력’이 어떻게 생성·발전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법칙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물리력은 노동자계급 선진층의 ‘정치력’과 결합되지 못한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투쟁의 정점에서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눈물을 머금고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2-3-2. 1991년 5월투쟁

 

1991년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진압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연합을 위시한 재야단체들이 신속하게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를 꾸렸고 전국에 걸쳐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범대위는 이 투쟁을 ‘보수대연합에 반대하는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으로 모아가고자 했다. 한편 평민당을 비롯한 제도권 야당들은 투쟁 수위를 조절하면서 지자체 협상의 유리한 교두보로 이 투쟁을 활용하고자 했다. 1987년 6월 항쟁에 무차별 거리 대중으로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부산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옥중에서 의문사하자 5월6일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들이 모여 박창수노대위를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5월투쟁에 참여했다. 5월7~8일의 거리투쟁, 5월9일의 시한부 파업투쟁, 5월11일의 대규모 거리투쟁은 5월18일, 전국 16개 지역에서의 총파업투쟁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슬로건에 만족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노동자들은 ‘민중권력’과 ‘노동자권력’을 소리높여 외쳤다. 아직 정식화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범민중적인 정치투쟁 공간의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 구호를 제출했던 것이다. 5월투쟁은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가 당장 걸려 있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특정한 정세에서 민주주의투쟁전선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노협이라는 개별 기업노조들의 협의체라는 조직틀과 노대위라는 사안별 공동투쟁체계만으로 당면한 정치적 쟁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현장에서는 임투, 거리에서는 정치투쟁’이라는 이분법적 한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완성된 형태의 정치파업이 조직되지도 않았고, 1990년 골리앗투쟁에서 보여졌던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의 광범한 결합과 이에 기초한 민중연대투쟁으로의 역발전 역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고 개별 기업 단위로 힘겹게 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2-3-3. 1996~97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투쟁

 

1996년 12월26일,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154명은 새벽 6시에 자기들만으로 임시국회를 열어 7분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비롯한 11개 법안을 날치기 기습 통과시켰다. 노개위 공익위원 안보다도 훨씬 후퇴한 노동법 개악이 ‘노사관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들어갔다. 12월26일 83개 노조 14만명, 12월27일 165개 노조 20만명이 총파업투쟁과 지역집회투쟁을 전개했다. 12월28일 민주노총 175개 노조 21만8000여명이 총파업투쟁을 벌임으로써 1단계 총파업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를 넘기면서 수그러들 줄 알았던 총파업의 열기는 1997년 1월6일 민주노총 150개 노조 19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대오에 복귀함으로써 되살아났다. 2단계 총파업투쟁은 1월15일 민주노총 431개 노조 37만여명의 3단계 총파업투쟁과 한국노총의 시한부 파업동참으로 이어져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전선은 전면 총파업투쟁에 이은 범민중항쟁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1월17일, 제10차 투쟁본부(투본) 대표자회의에서 전면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후퇴함으로써 20일 넘게 진행된 정치총파업투쟁은 마지막 순간에 완전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됐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김을 누른 권영길’이라는 어느 시사 주간지의 표제에서 보듯 여야 할 것 없이 제도권 정치가 제 할 일을 못찾고 헤매는 동안에 민주노총은 우리 사회 보수정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주었다. 투쟁이 한창일 때 국회는 개점휴업이었고, 오로지 투쟁하는 대중들과 명동성당의 지도부가 청와대와 직접 힘을 겨루는 ‘총파업정치’만이 한국사회 정치를 대표하고 ‘독점’했다. 국민들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힘있는 세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그만큼 보수정당들의 거짓 정치를 투쟁으로 제압하고 청와대와 직접 ‘정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는 겨우 싹을 틔웠을 뿐이고 가능성만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가 1월17일 제도정치권으로 공을 넘겨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것은 이 새로운 정치의 싹을 좀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길을 너무 일찍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97년말 15대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승리21의 “일어나라 코리아” 류의 어처구니없는 ‘국민’정치는 노동자 정치의 싹을 왜곡시키면서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19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1996~9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1991년 5월투쟁에서 거리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됐고 거리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1996~9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정당의 부재로 인해 이 ‘정치’총파업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조직이 전적으로 지도해야 했고 범대위가 결정적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2-3-4.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2002년 발전노조 파업투쟁

 

1998년 현대차노조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2002년 발전노조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투쟁을 비교해 보면 몇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98년 정리해고 문제가 우리 사회 전체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을 때 현대자동차 노조는 “노동조합이 희망퇴직으로 1차 양보하고 임금삭감으로 2차 양보했는데도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하려고 한다. 회사가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면 무급 순환휴가든지 다른 다양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고 버티다가 막판에 정리해고 최소화에 합의하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처음부터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정리해고 그 자체를 쟁점화시킨 것이 아니라 수세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것이다. 36일 동안의 공장점거 파업투쟁,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보여줬던 강력한 투쟁 의지와 공권력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감, 매일 뉴스 머리를 장식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전사회적 쟁점으로 선도했던 그 투쟁의 규모와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논리’가 빈약했다. 이에 반해 발전노조는 처음부터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끝까지 버텼다. 노동조합과 정부 사이에 공방은 오로지 사유화 문제로 집중됐고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문제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강요받을 정도로 발전산업을 사유화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그 자체로 선명하게 쟁점화됐다. 그 결과 노조 출범 이후 협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단협과 같은 나머지 문제들을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파업 한번 안해본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현대차노조 지도부조차 웅크러들었던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부딪쳤던 것이다. 발전파업은 이렇듯 “가장 원칙적일 때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줬다.
지금까지 제조업, 특히나 금속 대공장 노조의 파업투쟁은 공장점거투쟁이고 공권력과의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는 투쟁이었다. 1998년 현대차가 그랬고 1999년 한라중공업이 그랬다. 현재까지 금속 대공장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1999년 한라중공업 노동조합과 2009년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해 총자본과 목숨 건 일전을 치른 쌍용차지부다.
반면 공공부문 파업투쟁의 전형은 2002년 발전 파업에서 가장 잘 보여졌듯 상징 거점에서의 지도부 점거투쟁과 조합원들의 산개투쟁이다. 이전에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의 산개파업 시도가 있었지만 2002년 발전 파업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발전노조의 산개파업에서 핸드폰과 인터넷은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8일 동안 가족들은 남편 말만 믿고, 남편인 조합원들은 위원장 말만 믿었다. 산개파업은 그러나 숨어지내는 투쟁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산개파업 대오의 번개집회와 조별 피켓팅 등의 전술이 선보였지만 좀더 공세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수도권 일대의 노조 상급단체와 노동단체 사무실에서 산개 조들을 묶거나 섞어 실시했던 교육과 토론은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보여지는 투쟁은 그래서 가족들 몫이 되었고 4월2일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파업이 마무리된 후에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 큰 혼란과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2-3-5. 2003년 화물연대 파업투쟁

 

2003년 화물연대 파업투쟁은 기계를 세워 생산에 직접 타격을 주는 투쟁만이 아니라 유통을 중지시키는 투쟁도 훨씬 위력적인 ‘파업’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화물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요 고속도로와 철로를 점거함으로써 유통과 생산을 ‘타격’하는 아르헨티나의 실업자운동과 맞닿아 있다. 화물연대 파업이 2002년 인천택시의 65일 파업투쟁과 같은 택시파업과 버스파업, 2001년 항공사 조종사들의 파업투쟁, 2002년 철도파업 등 운수노동자 전체의 투쟁으로 모아지고 지역별 실업자운동이나 기층 주민운동과 결합된다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투쟁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임에 틀림없다.

 

2-3-6.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1999년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과 재능교육교사노조 건설을 시작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본격화됐다. 2000년 서울대시설관리노동자 파업, 방송사비정규직노조 투쟁, 이랜드와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에 이어 2001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전국건설운송노조, 캐리어사내하청노조가 투쟁을 벌였다.
2003년 들어와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다시 폭발했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2004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 분신투쟁이 벌어졌고, 타워크레인노조가 산별 단체협약을 쟁취했다. 금호타이어에서는 불법파견으로 판정받은 비정규직 282명이 전원 정규직화 됐다.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76일간 파업을 벌였고, 덤프연대 노동자들이 3차례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2006년 들어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이 이어졌고 KTX 여승무원들의 장기투쟁이 시작됐다.
화물노동자, 덤프노동자, 레미콘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보험설계원, 학습지 교사, 애니매이터, 방송작가, 가전제품 수리기사, 간병노동자(호스피스), 학원차량기사, 대리운전기사, 퀵서비스 기사 등 200만명에 달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동3권을 법으로 보장받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2007년 7월1일 비정규법 시행 이후 500만명에 달하는 기간제 노동자들의 운명을 걸고 뉴코아-이랜드노조가 총자본과 전면전을 벌였다.
이주노동자들도 투쟁을 계속해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동단속에 맞서 2003년 11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명동성당 농성을 전개한 이주노동자들은 2005년 4월24일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허가제 철폐, 노동허가제 쟁취 △단속추방 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외국인보호소 인권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사내하청노동자들도 원청사용자책임 인정과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2005~2006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철폐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2005년 류기혁 열사가 자결했다. 2010년 현대차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에 따른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5일 동안 공장점거파업을 벌였다. 2011년 홍익대 청소노동자와 경비노동자 174명은 고용승계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49일동안 농성을 벌여 승리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청소노동자 연대파업으로 확산됐다.

 

3. 현장조직운동

 

3-1. 현장대중투쟁조직

 

현장대중투쟁조직은 특정한 시기에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대중투쟁을 이끌어냄으로써 대중적 지도력을 획득하는 대중투쟁기관이자 현장권력기관이다.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지도부, 1991년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1995년 현대차 양봉수동지 분신공동대책위원회(분신공대위) 등이 바로 대표적인 현장대중투쟁조직들이다. 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는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1991년 현연투는 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 당시 현대자동차 민주세력이 총결집하여 만들어졌다. 현연투는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현연투는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 집행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대중투쟁 지도부가 되어 자발적인 정치투쟁까지 벌여냈던 것이다. 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전공장에 걸쳐 분신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장대중투쟁조직은 노동조합이 투쟁을 회피하거나 가로막을 때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대중투쟁을 직접 이끌어냈다. 투쟁하는 동안 현장에서는 노동조합과 현장대중투쟁조직의 이중권력 상태가 만들어졌고, 현장대중투쟁조직은 투쟁하는 대중들로부터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받음으로써 노동조합의 형식적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현장대중투쟁조직은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현장 대중들의 직접적인 투쟁기관이자 현장권력체로서 공장평의회로까지 전면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투쟁이 끝난 후 현장대중투쟁조직은 선거를 통해 민주노조로 전환되었고 결국 다시 노동조합으로 되돌아갔다. 민주노조가 대중투쟁기관으로서 거의 유일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조를 회복한 이상 또 다른 대중투쟁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대중투쟁기관으로서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성과 역동성에 주목하면서 한국에서는 민주노조 그 자체가 평의회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근래 민주노조운동이 처해 있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고려한다면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별시대로 접어든 민주노조운동의 개량화와 관료화가 심화될수록 노동조합을 대체하는 현장대중투쟁조직의 평의회적 맹아가 발아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현장대중투쟁조직의 전국화와 정치화가 가속화될 것이다.

 

3-2. 일상적 현장대중조직

 

일상적 현장대중조직은 노동조합 규약으로는 의사결정기관이나 집행기관의 지위를 갖지 않지만 노동조합과는 다른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독자적인 투쟁과 활동을 벌여내는 조직이다.
현대차의장부총연합(의총련)과 현대중공업 1630,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과 같은 조직들이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의총련은 콘베어 타는 의장부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현장대중조직이었다. 사업부별 대표자들과 전공장 회의체계를 꾸리고 일상 선전사업과 콘베어수당 인상투쟁 등을 대중적으로 벌여냈다. 의총련은 자동차 생산공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콘베어 노동자들의 처지와 열망에 근거해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콘베어수당 인상을 쟁점화시켜 대중투쟁의 동력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의총련과 같은 조직형태로 도장부총연합(도총련), 차체부총연합(차총련) 등 부서별 현장대중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현대중공업 1630은 유해작업자인 조선소 도장부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현장대중조직이었다. 1630은 “하루 6시간, 주5일 30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자발적이고 일상적인 현장투쟁을 벌여냈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pool)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그렇다고 소위원회가 초보 활동가들의 훈련코스인 것만은 아니다. 집행부나 대의원을 하지 않는 경우, 경험 많은 활동가들이 소위원회에서 다시 활동함으로써 소위원회 자체 내에 활동 경험이 축적되고 새로운 활동력들이 보충된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 소위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선출되고 그 소위원들의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체계가 꾸려진다면 이야말로 공장평의회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울산지역에서 초보적 시도가 있었듯이 단위사업장 공소위들을 묶어 지역체계를 꾸리고 더 나아가 소위원회의 전국체계까지 꾸려질 수 있다면 이 조직이야말로 노동자평의회에 가장 근접한 형태가 될 것이다.
현장의 대중들은 자신의 처지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현장대중조직들을 만들어왔다.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건설되는 일상적 현장대중조직은 노동조합운동이 위계화될수록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대리주의적 한계를 뛰어넘어 일상시기 노동조합을 대체할 평의회적 맹아를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3-3. 현장활동가조직

 

현장활동가조직은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운동 내부의 일정한 경향과 노선에 따라 결집하여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 등의 활동을 벌여나가는 조직이다.
현장활동가조직은 조직구성원리와 운영원리에서 노동조합과 다르다. 노동조합은 사상, 나이, 성별의 차이에 상관없이 그 노동조합의 규약이 정한 범위에 있는 노동자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현장활동가조직은 그 사업장의 민주노조운동이 쟁취해 온 활동목표와 내용에 동의하고, 그 활동에서 대중으로부터 검증될 뿐만 아니라 활동가 내부의 일정한 검열과정을 거친 현장활동가들로 구성된다. 또한 노동조합은 의사결정체계(대의원회)와 집행체계(상무집행위원회)가 분리되고 집행부의 상근으로 현장과 밀접하게 늘 결합되지 못하는 한계를 갖지만, 현장활동가조직은 해고자와 상집 파견자를 빼고 의장을 비롯한 조직원 전체가 대부분 생산노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의사결정과정과 집행과정도 의결체계인 중앙위원회와 집행체계인 집행위원회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중앙집행위원회로 통일되어 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노동자정치조직과도 차이가 있다. 노동자정치조직은 국가권력 획득을 일차 목표로 하여 직접 대중정치활동을 벌임으로써 대리정치를 지양하고자 하는 정치사상적 결사체이이다. 반면 현장활동가조직은 노선적 분화과정을 거쳐 정치적으로 발전하면서 노동자정치조직과의 구분과 경계가 엷어지고는 있지만 아직 그 자체로 노동자정치조직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현장활동가조직의 과도기성이 존재한다.
현장활동가조직은 또한 현장대중조직과 구별된다. 현장대중조직은 대중 스스로의 자발성과 현장의 직접성에 근거해서 대중투쟁기관이자 현장권력기관인 공장평의회로 발전할 맹아를 품고 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현장대중조직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현장대중조직의 평의회적 맹아를 싹틔울 수 있도록 촉진할 뿐이지 현장활동가조직 그 자체가 현장대중권력체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3-3-1. 현장활동가조직운동의 역사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공장에서의 현장활동가조직운동은 어디랄 것 없이 어용노조 퇴진투쟁으로부터 비롯됐다. 어용노조 퇴진에 뜻을 같이 하는 현장활동가들은 노민추를 건설했다. 당시 노민추는 노조민주화를 선거를 통한 집행부 장악으로 제한하는 경향과 투쟁성과 민주성을 강화하는 현장조직력 강화로 이해하는 경향이 그 내부에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거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한편 1987∼88년 대중투쟁의 선봉에 섰던 해고자들은 초창기 노민추 조직의 상근역량으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1989∼90년 어용노조 퇴진투쟁의 성과로 등장한 대부분의 노조 집행부가 직권조인을 저지름으로써 또 다시 어용화됐다. “집행부 장악만으로는 민주노조를 세워낼 수 없다. 민주노조를 제대로 지켜내려면 공권력과 부딪혀서도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의식적 지도력과 조직력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러한 자각 위에서 민주적 현장활동가들은 어용 집행부를 견제하고 노동조합의 현장일상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대의원에 대거 진출했고 소위원회가 광범위하게 꾸려졌다. 노조민주화투쟁은 집행부 장악에만 한정되었던 민주파들의 선거투쟁에 그치지 않고 민주노조운동의 일상적 대중 저변을 확대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노민추운동의 대중화’와 동시에 현장활동가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의식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현장학습소모임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로 민주집행부가 태어났다.
1990년대 초 새로 등장한 민주집행부는 집권하자마자 3중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첫째, 직권조인과 배신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를 열망하는 현장대중들의 신임 민주집행부에 대한 기대감이 아래로부터 폭발하듯 분출되고 둘째, 위로는 가볍게 넘어가고 싶은 첫 싸움조차 청와대가 진두지휘하는 총자본의 전면 탄압이 들어오고 셋째, 안으로는 집권 경험과 실무력 부족으로 고통받는 상태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3중고(三重苦)를 해결하기 위해 노민추의 주요 현장활동가 대부분이 노동조합 집행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노민추는 민주집행부 아래에서 조직이 해소되거나 활동이 느슨해졌고, 신임 민주집행부를 아래로부터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현장활동가조직으로 재편된 경우에도 주요 활동가 대부분이 집행부로 들어감으로써 현장조직력과 활동력은 극히 취약해졌다. 이렇듯 민주집행부와 새롭게 재편된 현장활동가조직의 관계와 상호 역할을 정비할 틈도 없이 대공장 민주노조의 첫 싸움은 예외없이 공권력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이 전면전에서 대부분의 대공장 민주노조는 대량 구속·수배·해고 등 총자본의 집중탄압을 받게 되고 현장활동가조직은 거의 와해됐다. 구속된 지도부를 대신해 살아남은 민주노조의 집행간부들은 직무대행체제로 민주노조사수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리한 노조정상화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 시기 현장활동가들은 한편에서는 부서동지회 등으로 산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활동가들이 보다 강화된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다(산개와 집중의 시행착오과정). 자본은 이 틈을 비집고 신경영전략을 전격 도입하면서 현장을 반 단위까지 장악해 들어왔다.
1995년을 지나면서 신경영전략으로 야금야금 빼앗긴 현장권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커져갔고, 현대자동차 양봉수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대공장 현장활동가조직들이 하나 둘 재건되었다. 이때의 조직 재건은 현장활동가들끼리 벌였던 이른바 만리장성론과 깃발론의 논쟁이 아니라 신경영전략 자체에 의해 야기된 현장대중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재건된 현장활동가조직은 선거용 조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민주노조를 강화하고, 현장활동가를 발굴·훈련하며, 노동조합 수준에 제약되지 않는 현장정치활동과 연대사업을 개척해가는 일상활동조직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지역과 전국으로 빠르게 일반화되어갔다. 1997년 금속산업 대공장 현장활동가조직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결성되었다.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1997년 대공장 노동조합 선거에서 대거 집행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배출된 노조 집행부들은 격렬하게 전개됐던 98년 투쟁에서 대부분 패배했고, 이후 현장활동가조직운동은 정치적·조직적 분화과정을 본격적으로 겪게 된다. 민주노조운동의 이념·노선과 활동방식을 둘러싼 차이는 1999년 금속산업연맹 임원선거에서 조돈희, 조준호, 문성현 후보의 3파전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현장파(좌파), 국민파(우파), 중앙파의 3분립 구도가 분명해진 것이다. 중앙연락사무소와 권역별 서기를 두고 대표자회의와 정책협의회를 달마다 열었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달리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하며 결성된 민주노동자전국회의는 중앙운영위원회와 집행위원회, 지역별 위원회체계에 이르기까지 보다 완성된 조직형식을 갖추고 출범했다. 2004년에는 평등사회로전진하는활동가연대(준)가 결성됐고, 2007년 4월 현장실천 사회변혁노동자전선이 닻을 올렸다.

 

4. 노동자정치운동

 

1987년 이후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한 정치적 노동운동 진영의 각고의 노력들이 있어왔다. 이 과정은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로 대표되는 노동단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을 ‘지원·지도’하고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뿐만 아니라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ILO공대위) 등 ‘민주노조총단결대오’의 한 주체로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파조직운동은 주체사상그룹(주사파)과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그리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삼민, 노동계급,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제파PD) 등 PD 그룹으로 나뉘어 자신의 ‘정치’와 민주노조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4-2.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이 시기에 정치적 노동운동은 ‘분해’와 ‘해체’의 길을 걷는다. 노동단체운동은 선진노동자조직론자들과 민중당 불참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당 참여(동조)세력을 다른 편으로 하여 분리됐다. 전노운협의 1차 분화는 전노운협을 분리해 나온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한노당)세력이 빠져나가고, 전노운협에서 한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한노협)가 다시 분리되는 2차 분화로 마감됐다. 노동단체운동은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만들어지면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공식 참가 자격을 잃어버렸다. 19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1991년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박창수노대위), ILO공대위까지 민주노조총단결대오에 하나의 주체로 참여했던 노동단체운동이 민주노조총단결대오가 강화됨과 동시에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정파조직운동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온 충격과 정권의 탄압으로 안팎에서 ‘해체’되었다. 민중당 해체 이후 한노당에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로, 그리고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와 민중회의로 갈라져온 (반)공개정치조직운동은 1992년 대선 당시 백기완선대본에서 함께 했다가 사추위와 민중회의는 민중정치연합(민정연)으로 통합했고 민정연은 다시 진정추와의 통합 문제로 노동자중심의진보정당추진위원회(노진추)와 노동정치연대(노정연)로 분리됐다. 민정연 안에 있던 구 사추위 그룹은 진정추와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연)을 만들었다.

 

4-3.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정치적 노동운동은 이 시기에 복원된 현장조직운동과 결합하면서 민주노총과 산업별 연맹 단계에 접어든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싸고 새로운 노선 분화를 준비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노사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한노정연), 영남노동운동연구소(영남노연) 등 전국 단위의 연구소가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출범했다. 거의 활동을 중단했던 진정연은 1996~97년 노개투총파업 이후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로 ‘부활’했다. 노동단체, 연구소, 학술진영, 청년운동, 공개정치조직운동 등에서 좌파적 흐름을 형성해온 세력들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로 모였다. 정치연대는 1997년 대선에서 국민후보 대신 노동자·민중후보를 주장하며 국민승리21에 참여했다.

 

4-4. 1998년부터 현재까지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을 등에 업고 진정추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전환했다. 정치연대는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예비모임’(새정조)으로 전환됐다. 새정조 논의에 함께 했던 노진추는 민주노동당에 합류해 그 내부에서 평등연대→해방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분당 이후 탈당했고, 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연)는 정치연대의 국민승리21 참여를 비판하며 청년진보당→사회당으로 독립했다. 새정조는 1999년 8월 노동자의힘, 2008년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으로 전환했고, 2010년 사회주의노동자정치연합(사노련) 일부와 노동자투쟁연대(노투련) 등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를 건설했다.

 

4-5. 노동운동과 정치운동

 

1987년 이후 민주노조/현장조직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의 결합에서 두 가지 편향이 존재했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이 그것이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은 언제나 현장 노동자를 대상화시키고 노동운동을 밖으로부터 계몽해야 할 하위의 부문운동으로 협소화시켰다. 반면에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현장을 절대화시키고, 일체의 정치운동을 외부세력의 음험한 개입으로 단정지었다. 이는 이른바 바깥에 대한 극단의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협소한 노동자주의의 또 다른 재판이었다.
정치적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통일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정치적 명확성과 현장성이다. 1997년 이후 정치적 노동운동은 본격적인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연구소운동, 노동자 정치운동 등이 자기 자리를 잡아나가면서 그 모든 영역에 관여했던 노동단체운동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노동자 정치는 이제 뭉뚱그려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민족주의냐, 사민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조직형식 또한 이제는 정당 수준에서 민족민주정당이냐, 진보적 국민정당이냐, 노동자계급정당이냐를 명확히 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5.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과제와 전망

 

5-1. 노동자계급정치운동의 복원과 전면화

 

노동자계급정치란 ①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을 활동가정치조직으로서의 노동자계급정당으로 조직하는 것 ②부분적으로 분출하는 경제적 방어투쟁들을 정치총파업과 강력한 민중연대투쟁으로 집중하고 결합시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키워가는 대중정치로 활성화시키는 것 ③대중을 파편화된 유권자로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계급으로 통일시키고, 이렇게 계급으로서 정치화되고 주체화된 대중이 스스로 국가권력으로까지 상승함으로써 종국에는 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정치운동을 복원하고 전면화하기 위해 현시기 요구되는 과제를 보자. 첫째,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위로부터 관료제적 방식으로 조직되는 조합주의적 정치총파업으로 가둬놓거나 선거와 의회 진출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변질시키고 협소화하는 의회주의·조합주의 정치세력화노선과 ‘선거는 정당, 투쟁은 노동조합’이라는 ‘양날개론’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 총파업투쟁의 지도부, 특히나 그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첨예한 정치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그 지도부는 노동조합만이어서는 안되고 노동자정치조직이 마땅히 그 지도부의 한 축이 돼야 한다. 이로부터 지난 1993년 전노대 이후 계속돼온 노동조합운동의 과잉결정권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제조업(특히 금속) 대공장 노조의 공장점거파업, 공공부문 노조의 산개파업, 정치총파업과 반정부 거리시위, 유통과정을 타격하는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비정규직 투쟁 등 파업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파업투쟁이 노동자계급정치·총파업정치의 변혁적 전망과 올곧게 결합되도록 해야 한다.

 

5-2.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민주적 발전과 현장조직운동의 정치적 강화

 

산별시대로 접어든 노동조합운동의 중앙집중성과 계통성이 강화될수록 관료화와 개량화의 위험 또한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데 아래로부터 이를 억제·분쇄하고 민주노조운동을 계급적·민주적으로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현장권력을 부단히 창출해내기 위한 현장조직운동이 정치적으로 강화되고 조직적으로 집중돼야 한다. 한편 현장활동가조직은 변혁적 정치조직이 돼야 하고 정치조직은 변혁적 현장활동가조직이 돼야 한다. 이로부터만 노동운동없는 정치운동, 정치운동없는 노동운동의 문제와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조합주의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양날개로 다시 분리되는 의회주의 정치세력화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

 

5-3. 변혁의 상과 전망 재정립

 

활동가 정치학습을 체계화하고 획기적으로 강화함으로써 변혁의 상과 전망을 재정립하고, 현장활동가 자신의 운동과 삶의 전망을 새롭게 추스려야 한다. 근래 들어 현장활동가들 대다수가 운동의 전망을 찾지 못하고 활동가로서의 개인 삶의 미래조차 불투명한 상태로 힘겨워 하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대의원 되기, 위원장 되기, 상급단체 임원 되기, 지방선거를 비롯한 정치 판의 후보 되기 따위에 자신의 활동 전망을 가두고 있다. 현재의 이 질곡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현장활동가들의 정치학습을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좌파 이론진영과 노동자정치조직이 변혁의 상과 전망을 둘러싼 사상투쟁을 복원하고 이를 노동자계급정당의 강령건설투쟁으로 모아나가야 한다.

 

5-4. 현장대중투쟁과 선거·의회전술의 결합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고 투쟁해야 한다. 생산량, 노동강도, 노동시간과 근무형태, 인원, 건강권, 기업문화에 맞선 노동문화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전략에 대한 노동의 전략을 세워야 하고, 이를 세부적인 현장투쟁전술로 구체화해야 한다. 아울러 현장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선거와 의회전술을 결합시켜야 한다.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개입을 통해 현장과 지역을 잇는 ‘노동자·민중자치’의 다양한 실험과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현장정치활동은 지역적 수준에서 삶의 다양한 영역에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전국적·계급적 수준으로 확장되고 활성화돼야 한다.

 

5-5. 지역 노동자미디어운동 전략의 구체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지역 노동자 미디어를 건설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역 노동자 미디어는 현장 구석구석에 촉수를 뻗고 전임기자와 현장기자단의 망을 촘촘히 얽어내면서 강력한 ‘소통과 연대의 도구’로 기능할 것이다. 아울러 교육, 장애, 환경, 여성 문제 등 지역사회의 제반 이슈들에 대해서도 노동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투쟁 시기와 선거 시기에 노동운동 세력의 입장을 대중들에게 보다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노동자 미디어는 노동조합, 노동자계급정당, 현장조직 등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또 하나의 힘이다. 노동운동을 혁신하고 새로운 전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힘으로 지역을 바꿔내기 위해 노동자 미디어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5-6.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 없는 일터 건설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를 넘어 주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켜야 한다. 시간급제를 없애고 월급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장과 재구성을 위해 지역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삶을 집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노동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처지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자기 세대와 자식 세대를 위해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의 이익만을 좇아갈 때 자식 세대는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내 자식만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밤샘노동해 번 돈을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악순환’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1987년 우리는 한낱 기계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했고, 1996~97년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임을 역사에 알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빛바랜 깃발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가고자 하는 꿈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면 옥죌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커져갈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고, 함께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뒷 사람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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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21:56 2011/05/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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