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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96년 8월

 

노개위와 노개투


  지난 4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5월 9일 노·사·공익 대표 30명으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노개위)가 꾸려졌다. 5월 22일 진념 노동부장관은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되, 합의가 안될 때에는 최대공약수를 법 개정에 반영하도록 하겠다"며 올해 안에 노동법을 어떤 식으로든 손보겠다는 뜻을 뚜렷이 밝혔다. 7월 2일 정부는 '96년 하반기 경제운영방향'을 확정했다. 근로자파견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를 정부가 나서서 들여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7월 9일 노개위는 '노사의 자기혁신과제와 정부의 역할'을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7월 11일 '노동관계법·제도 개선의 기본방향'에도 합의했다. 7월 15일 노개위는 이 1차 합의안을 '노사관계 개혁 추진상황 및 향후 추진계획'('추진계획')이라는 보고서로 꾸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7월 19∼21일 민주노총은 단위노조 대표자 수련대회를 열어 하반기 노동법 개정투쟁(노개투) 방안을 논의했다. 이른바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맞바꿔서는 안된다는 단위노조 대표자 다수의 결의가 확인됐다. 한편 전경련은 7월 23일 진념 노동부장관을 초청한 가운데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주최하고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도입과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 "경총에만 맡기기엔 사안이 너무 중요해" 이른바 '재계' 전체가 나섰다는 얘기다. 노개위는 앞으로 8월말에 법·제도 개선안을 마련하고 9월초에 노개위의 법 개정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계획이다. 10월쯤 있을 임시국회가 이 개정안(또는 정부안)을 심의하게 될 것이다.

  먼저 지난 7월 2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3/4분기 경제장관회의에서 확정된 '96년 하반기 경제운영방향'부터 살펴보자. 정부가 밝힌 하반기 경제운영의 큰 줄거리는 '고비용 저능률 구조의 개선을 통한 경제체질 강화'다. 내용을 줄여서 옮겨보면 이렇다. 첫째, 우리 경제가 물가가 불안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예상보다 두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등 어려움이 많은데, 이게 다 이른바 고임금·고금리·고지가·고물류비용 등 '4대 고비용' 때문이고 그 가운데서도 고임금이 가장 큰 문제다. 둘째, 저능률도 무엇보다 노동시장이 경직돼서 그렇다. 이래 갖고는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따라서 지나치게(?) 높은(?) 임금 수준을 낮춰야 하며, 근로자파견제·변형근로시간제·정리해고제 등을 들여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한마디로 경제가 어려운데 이게 다 노동자들 임금이 높고 노동법이 '선진국 수준'으로 개혁(?)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거다. 다시 말해 "경기 하강국면에 기업들이 노동비용을 줄여 수익성을 높이거나 업종전환을 신속히 하려면 값싼 시간제 노동력 고용, 무노동 무임금 논리에 입각한 조업 단축, 잉여노동자 해고 등을 손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덧붙인다면, 이날 확정된 대책이란 데는 저임금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연수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이고 지금 있는 2만명에서 3만명으로 늘린다는 계획도 들어 있다.

  하나씩 짚어 보자.

  첫째, 우리 임금 수준이 정말 높은가? 정부가 근거로 내놓은 통계는 세가지다. ① 94년 제조업 임금이 85년의 3.8배로 올라 미국 1.3배, 일본 1.2배, 대만 2.4배를 훨씬 앞질렀다. ② 국내 제조업 노동자가 94년에 받은 년간 임금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의 1.80배로 미국 1.02배, 일본 1.28배, 대만 1.20배 등에 비해 비율이 높다. ③ 95년 인건비가 부가가치 생산액에서 차지한 비중이 제조업 평균 47.7%로 매우 높다. 민주노총은 반박한다(주1). ① 노동자의 임금 상승률은 생산성 증가율을 넘지 않았다. 95년의 경우 임금 인상률은 9.9%로 생산성 증가율(12.8%)에 물가 상승률(4.5%)를 더한 17.3%에 훨씬 못미친다. ② 우리나라 1인당 GNP 대비 임금 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은 거꾸로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한 데 따른 것이다. 다른 나라 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누리고 있는 교육·의료 등의 사회복지 혜택을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임금으로 해결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80년에도 이 비율은 한국 1.81배, 미국 1.25배, 일본 1.42배, 대만 1.14배로 한국이 가장 높았다. ③ 부가가치 대비 인건비(노동소득 분배율)는 최근 몇년동안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한마디로 안높다는 얘기다. 오히려 세계 최하위권의 복지 수준에 비추어 봤을 때 "임금으로 노부모도 모시고 자녀 교육비도 대고 퇴직 후 대비도 해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아직도 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둘째,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문제다.

  근로자파견제부터 보자.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밖에도 '불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2∼30만명에 이른다. 한달 10만원도 안되는 임금으로 맘껏 '부릴' 수 있으니 자본쪽에서야 이들 노동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거기다 이 노동력들을 합법으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처지다. 더구나 근로자파견제가 시행되면 지금껏 '불법'(주2)으로 생산에 투입했던 하청 노동력을 '대놓고 하는 사람 장사'로 마음껏 '써'먹을 수 있게 된다. 자본의 뜻대로 되면 문제는 커진다. 먼저 중심부 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로 찢겨진다. 중심부는 중심부대로 고용불안과 과밀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주변부는 또 주변부대로 경기변동의 총알받이가 되어 인신매매와 현대판 노예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렇게 대놓고 자본에 쥐어짜이는 게 경쟁력을 높이는 거라면 '국민의 삶의 질' 어쩌구 하는 건 죄다 '개소리'가 되고 만다.

  변형근로시간제는 또 어떤가? 한국노총에서조차 변형근로시간제가 1개월 단위로 운용되면 6.4% 정도 임금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반대하는 입장이다(주3). 회사 일에 모든 걸 맞춰야 되니 밤낮이 없어져 생활이 노동과정에 더욱 종속되고 그만큼 산업재해의 위험도 늘어난다. 『노동자신문』14호의 분노에 찬 철도 노동자는 말한다. "마음 편히 가족 나들이 한 번 해볼 수 있는 유급 휴일이 1년에 단 하루도 없는 생활. 변형근로제 하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근기법이 존재하는데도 법을 어겨가며 노동자를 족치고 있는데, 아예 변형근로제를 법으로 인정한다면 노동자더러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끝도 없는 죽음같은 노동과 만성적인 해고·고용불안, 변형근로제 하에서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래도 변형근로제를 법으로 꼭 만들어야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철도에 와서 단 1달만 근무해 보고 판단하라고 권하고 싶다."

  정리해고제는 이 나라 노동자 전부를 반실업 상태로 내몬다. "정년퇴직할 때쯤 되더라도 자식이 겨우 대학생인데 40대에 덜컥 짤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있을 때 코피 터지더라도 벌어 놓고 보자"는 과노동으로 노동자들을 몰아 넣는다. "만일 정리해고제가 입법이 된다면 사양산업의 정리, 업종전환 등의 과정에서 대규모 해고가 합법적으로 보장될 것이며, 근로자파견제와 연동될 경우 해고 대신 파견근로자로의 전락이 강요될 것이다. 특히 위 요건 중 노조와의 성실한 합의 요건을 완화, 간소화하려고 하며, 이때 노조는 법적 대응력을 상실함으로써 무력화되어버릴 것이다."(주4)

  이렇게 보면, 이른바 '노동력 이용의 유연·전문화'를 향한 자본의 열망이 아주 크고, 또 정부가 이 문제를 팔 걷어부치고 제도화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높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경쟁력 확보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이윤 축적 도구로 전국민을 강제동원하겠다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이 점에서, "세계시장에서의 경제전쟁에서는 모두가 이기기 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패배하고, 이긴 사람들조차 다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참여자 모두가 허리띠를 점점 더 세게 매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경제전쟁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영화 '트라이엄프' 속에 나오는 나찌 하 강제노동수용소의 권투선수처럼. 이 '중독'의 고리를 끊어주는 것은 불행하게도 '죽음'뿐이"(주5)라는 말은 정곡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웅배 부총리 말대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파견근로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등의 도입을 강하게 요구하겠다"는 데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인가? 진작부터 복수노조 허용 등과 변형근로시간제 등을 맞바꾸겠다는 속내야 읽히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서는 건 분명 무슨 까닭과 계산이 깔려 있을 터이다. 쉬운 말로 "선수 치는" 것 같다. 정부가 쟁점을 주도해서 자본쪽의 요구를 '관철'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안팎에 내보인 것이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문제도 있고 해서 속도를 앞당기자는 포석으로도 읽혀진다. 민주노총 안에 노사협조세력을 다수파로 포섭하겠다는 전략까지 포기하는 건 아닐테지만 어차피 법 개정이 현실 문제로 다가온 마당에 따낼 건 분명히 따내겠다는 심산이다. 예의 그 개량화 전략이란 것도 복수노조 허용 다음에 밀고 당기고 해도 늦지 않을테니까 민주노총이 합의하지 않더라도 국회에 어쨌든 노·사·정이 함께 만든 모양새를 갖춰 노개위 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키면 되는 것이다.

  7월 15일 노개위 안에서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대통령에게 보고된 '추진계획'으로 들어가 보자.

  첫째, "공무원과 교원 등은 근로자로서의 기본 권익을 존중하되 사회적 책무성을 감안하여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모색해 나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보편타당한 국제적 규범을 존중하여 노사관계제도를 세계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단결권의 폭을 넓히는만큼 쟁의권을 제약하겠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둘째, "노동시장의 활력 제고", "새로운 고용관행의 존중"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의 도입 '의지'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민주노총 '파견자'들의 동의(그것이 '선방'이었든 말 그대로의 '동의'였든)는 7월 19∼21일 민주노총 단위노조 대표자 수련대회에서 "소환"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을 일으킬만큼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셋째, 제도를 손보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과 관행까지도 이른바 '신노사문화'운동으로 '혁신'(?)시키려는 점이 두드러진다. 기업문화전략을 국가 수준으로 넓힌 듯한 이 계획은 그 본질이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추진계획'은 보고서의 앞머리에 나오는대로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로부터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로 바꿔나간다는 대전제를 "노사의 의식과 관행, 노동관계법과 제도, 노동행정 등 노사관계의 전부문에 걸친 개혁(?)"으로 구체화함에 있어 그 기본 방향에 대해 1차 합의한 문서다. 이 합의로 민주노총은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라는 자본의 패러다임을 적극 인정한 꼴이 되었고, 자본이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끝내 들여오고자 애쓰는 변형근로시간제를 막아낼 명분을 잃어버렸다. "맞바꾸기는 죽어도 안된다"지만, 결과는 그렇게 될 판이다.

  노개위는 이제 법 개정에 대한 성안과정을 남겨놓고 있다. 남은 기간 민주노총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지난 과정의 문제점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둘째, 성안과정에서 부딪히는 쟁점들을 조합원 대중의 동력으로 이어내고 총파업투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국민여론에 기대는 이른바 '언론 플래이'라는 것도 이러한 작업이 전제되었을 때만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노개위 철수 문제는 이러한 쟁점 형성과 총파업투쟁의 준비과정 속에서 그야말로 '전술적으로' 판단내리면 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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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여기서 이 반박의 '불철저함'을 비판한 다음 글은 귀담아 듣고 넘어가자.

"이러한 이른바 '임금 관련 지표들'에 대해서 관련 '지표들'을 가지고 반론을 전개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통계의 이니셔티브를 자본과 국가측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논리·논거나 부분적인 '지표들'을 들어 그들 주장의 허위를 파헤칠 수밖에 없는데…'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소위 '생산성 임금론'적 반론은 유감스럽게도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반론을 그러한 논리와 논거로 조직하는 것은 조작된 통계와 기만적인 논리에 놀아나는 것이고, 이른바 '노동경제론' 등을 내세우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위장된 진보 이데올로그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이다." (채만수, 「막가고 있는 문민정부의 경제정책」, 『현장에서 미래를』1996. 7)

주 2) 지금 있는 '직업안정법'에 따르면 청소와 경비용역 빼고는 모두 불법이다. 현대중공업 내주 하청 노동자가 쓴 '총무님 시급 좀 쪼까 올려주쇼'(『노동자신문』14호)라는 글은 비정규직 파견노동자의 실태를 잘 요약하고 있다.

주 3) 작업장 특성을 이유로 하루는 6시간, 하루는 10시간 노동을 할 경우 기존 같으면 법정근로시간인 8시간을 초과하므로 초과분만큼 잔업수당을 지급하여야 하지만 이를 도입할 경우 양일 평균 8시간을 노동한 것이 되어 잔업수당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본측으로 보면 일이 적은 날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업무량이 많은 날에는 추가임금 부담없이 노동시간을 늘일 수 있어 2중의 이익이 된다. 한편, 기본급이 낮아서 잔업을 포함하여 평균 주당 50시간 이상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변형근로시간제에 의한 실질임금의 저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남노동자』제3호)

주 4)『성남노동자』제3호

주 5) 강수돌, '세계화시대와 노동조합', 『월간자료』199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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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8:07 2005/02/14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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