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울교협통신] 35호 96.9.19
재정경제원의 예비비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쌈짓돈인가?
재정경제원(재경원)은 9월 17일 국회에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에서 올해 6월말까지 일반 예비비를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밝혔다. 재경원은 6월말까지 일반 예비비 3천1백48억6천5백만원을 정부 13개 부처에 줬는데, 이 가운데 2천7백89억8천8백만원을 '국가 안전 보장 활동 경비'라는 이름으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가져갔다고 한다. 6월까지 쓰여진 재경원 일반 예비비의 88.6%를 안기부가 '싹쓸이'한 것이다. 게다가 9월말께 6월말과 비슷하게 예비비를 받아갈 예정이어서, 올 한해 동안 안기부가 쓸 예비비는 모두 3천6백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올해 예산이 1천9백73억6천여만원이니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다.
재경원 일반 예비비의 70%가 넘는 돈이 안기부의 쌈짓돈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점 말고도 더 놀라운 것은 경찰청 치안대책비를 비롯한 정부 부처 예산의 갖가지 항목들이 이른바 '숨어 있는 안기부 예산'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숨겨진 예산들'은 지금껏 국가 기밀을 이유로 한번도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다. 따라서 그 규모가 얼마가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안기부가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한해에 쓰는 돈은 적어도 5천5백억원을 훨씬 넘는 것이 된다. 이 엄청난 돈들이 이른바 '국가 안보'를 위해 '제대로' 쓰여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좀 찝찝한 구석이 있다 치더라도 '맘 좋게' 그만큼 필요하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니까' 문제다.
첫째, 이 많은 세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 '못된 짓'에 쓰이는지 도대체 알 도리가 없다. 국가 예산의 집행을 심사하는 국회 정보위원회라는 게 있긴 하지만 어찌 된 게 '안기부 앞에만 서면' 흔한 말로 '깨갱'이다. 대충이라도 총 얼마가 어디어디 쯤에 쓰였는지 국회에서조차 알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안기부가 쓰는 돈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된다. 이 '성역'은 곧 '모든 길로 통하는' 청와대로 이어지므로 대통령의 이른바 '통치 사금고'로 쓰여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막말로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안기부 예산을 얼마든지 써도 되는 구조인 셈이다.
둘째, 정부의 비상금이랄 수 있는 예비비를 70% 넘게 안기부가 독차지하므로 국가 재난이나 비상사태가 닥쳤을 때 정부가 급히 써야 할 여윳돈이 그만큼 줄어든다. 여유가 없으니 추경예산이다 뭐다 해서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때를 못맞추기 일쑤다. 예비비가 정부 비상금으로서 제 몫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셋째, 국회가 총액만 심의해서 통과시키는 예비비는 '음지에서 일하는' 안기부가 쌈짓돈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국회의 에산 통제 기능을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기부가 한해에 얼마를 쓰는지 꼭꼭 숨기려다 보니 이런 편법이 나오는 것이고 모든 걸 다 감추려고만 드니 '구린 내'가 나는 것이다.
'신공안 광풍(狂風)'과 함께 '양지'로 나서고 있는 안기부는 '때 맞춰' 터진 동해안 간첩 사건으로 '복권'의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 '의도된 시대착오'는 9월 19일 청와대 여야 영수회담 자리에서 안기부 예산을 늘여야 한다는 3김의 '합의'(?)로까지 발전했다. 결국 6,7천억원을 넘는 엄청난 뭉칫돈에 또 얼마가 될지 모를 혈세가 '미친 바람'에 휩쓸려 안기부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됐다. 이 돈들이 이미 '적수'로조차 대접받지도 못하는 북한의 '위협'(?)을 막는 데 그렇게나 많이 쓰여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안기부가 '우국충정'을 살려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경제전쟁 시대에 걸맞게 이 돈들을 자기 체질 개선 비용으로 투자할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이 돈들의 상당 부분이 안기부의 고유 업무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안기부가 해체되지 않는 한 영원히 자신의 임무일 수밖에 없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 탄압에 쓰여질 것이고 때 아닌 '마녀 사냥'에 낭비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97년 대선은 한편의 보수 경쟁과 다른 한편의 개혁 경쟁이 서로 엇갈리면서 진행될 것이다. 안기부는 이 한편의 보수 경쟁에서 지금껏 그래왔듯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고 이를 위한 엄청난 '공작비'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YS가 쥐고 있는 카드가 아직 많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