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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49호 97.1.17

 

총파업투쟁 승리로 한 해를 열어갑시다

  1월 10일 울산시청쪽 길목을 전투경찰들이 막아섰습니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한두차례 밀고 당기는 싸움 끝에 이쪽과 저쪽은 사이를 두고 팽팽히 맞섰습니다. 거리는 돌맹이와 최루탄 조각들로 어지러웠습니다. 그 때 한 노동자가 길거리를 막아선 전투경찰쪽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온몸을 휩싼 불꽃이 움직였습니다. "투쟁! 노동악법 철폐까…" 불꽃이 외친 소리였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불꽃을 뒤쫓아 달려갔습니다. 뒤쪽에서 성난 돌맹이들이 전투경찰쪽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최루탄이 엄청나게 터졌습니다. 최루탄 연기로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연기가 잠깐 잦아드는 사이에 뒤쫓아간 동지들이 전투경찰의 소화기를 빼앗아 불을 껐습니다. 현대정공 동지들이 날아오는 최루탄과 돌맹이를 막으려고 쓰러진 동지를 에워쌌습니다. 119 구급차가 전투경찰 뒤쪽에서 달려온 건 10분쯤 지나서였습니다.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습니다. 제 몸을 불태운 동지가 현대자동차 의장2부 소위원 정재성 동지라는 걸 안 건 구급차 안에서였습니다. 함께 탄 현대자동차 배만수 동지는 정동지 손을 잡고 내내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저 괜찮습니다…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끝까지 투쟁해주십시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양봉수 동지는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를 되살리려는 바램 하나로 불꽃이 되었습니다. "저는 3만 조합원을 사랑합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조합원을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본의 두꺼운 문을 동지는 불두덩이 온몸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동지의 큰 사랑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3만 조합원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정재성 동지가 불꽃으로 피워올린 바램은 이 땅의 민주화였습니다. 몽둥이와 방패와 최루탄으로 거리를 막아선 저 공(公? 私!)권력의 차가운 벽을 동지는 온몸 불태워 허물고자 했습니다. 동지의 바램은 3단계 총파업투쟁에 함께 하는 75만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불씨가 되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정재성 동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겁니다. 불로 입은 상처를 너끈히 아물고 우리 앞에 다시 설 겁니다. 하여 천만 노동자가 함께 지펴낼 커다란 불기둥으로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동지 여러분. 총파업투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1월 15일 대통령이 장관들을 불러모아놓고 멍청한 국민들 설득 좀 잘 시키라며 똥배짱을 부렸습니다. 국무총리와 노동관계 장관들이 따로 모여 대통령의 똥배짱을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뒤에서 재벌들이 '다 된 밥'에 코 빠뜨릴까봐 '학실히' 칼 뽑으라고 야단입니다. 대검찰청 공안부장이 드디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경찰청 사람들'은 명동성당과 파업 사업장을 '진압'할 작전회의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 붙여질 작전 이름은 도대체 뭘까요?

  1월 15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조합원 75만명이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날 하루 20만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농민들이, 노점상과 철거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민주노총 힘내세요." 시민들이 박수를 칩니다. 신부, 목사, 스님 할 것 없이 교만한 김영삼 장로를 질책하고 나섰습니다. 대학 교수들은 개악 노동법이 원천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주부들까지 나섰습니다. 환경운동단체들도 과격(?)한 성명을 내고 전선에 함께 섰습니다. 총파업투쟁은 이제 민중항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투쟁의 의의와 목표를 다시 분명히 해야 할 땝니다. 경찰력을 앞세운 저들의 공격에 맞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는 것도 우리 몫입니다.

  이번 투쟁으로 민주노총은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한국노총 위원장 이름은 몰라도 권영길 위원장 이름 석자는 모르면 간첩(?)이랄만큼 많이 알려졌습니다. 87년 여름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비합법 소수파운동으로 출발한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이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다수파운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총파업투쟁이 87년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가장 큰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서 이번 투쟁의 가장 큰 목표는 민주노총을 더욱 튼튼하게 다지는 것입니다. 이번 투쟁에서 자랑찬 선봉으로 우뚝 선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 동지들은 그동안 우리 투쟁의 맨앞장에서 싸워왔던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동지들의 지친 어깨를 다독거리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으로 찢겨져 있는 금속산업 민주노조들의 대통합은 이렇게 준비되어야 마땅합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의 우산 밑에 있던 노동조합들이 노조민주화투쟁에 떨쳐나서도록 투쟁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미 부천의 경원세기 노동조합이 한국노총을 뛰쳐나와 민주노총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은행 노조가 한국노총 금융노련에서 미련없이 나와버렸고 증권사 노조들은 눈치 안보고 민주노총과 이번 투쟁을 함께 했습니다. LG화학과 동양나일론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 새로 들어올 작정입니다. 이렇게 "내 사랑 한반도여, 민주노조 물결쳐라!"는 노랫말이 현실로 점점 두드러지게 될 때 한국노총과의 통합도 앞당겨질 겁니다. 이번 투쟁에서 미조직 노동자들을 새롭게 조직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허나 거리에서 혼자 또는 여럿이 참여하는 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그래서 산별노조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 전노협 총파업투쟁이 그랬고 91년 5월 박창수 동지 의문사로 터져나온 총파업투쟁이 그랬듯이 우리가 겪어본 총파업투쟁은 노동운동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방어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투쟁은 처음부터 정부를 상대로 한 제도개선투쟁입니다. 단위사업장을 뛰어넘어 전산업, 전부문에 걸쳐 있는 50만 민주노조운동진영의 하나된 요구를 걸고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싸워보기도 처음입니다. 우리는 이번 투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을 때 이 땅에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46년 9월 총파업과 47년 3월 총파업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투쟁은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로 우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기까지 무려 40년동안 노동조합이란 말도 입에 담기 어려운 기막힌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75만명의 노동자가 달라붙은 이번 싸움에서 우리가 다시 패배한다면 그 후유증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크고 깊을 겁니다. 다시 우리의 요구와 목표를 분명히 합시다. 우리는 개악 노동법을 그냥 놔둔 채 시행령을 좀더 유리하게 만드는 따위로 우리 투쟁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개악 노동법은 그 절차와 내용이 모두 잘못됐기 때문에 처음부터 없던 걸로 하고 다시 논의해야 합니다. 해서 개악된 정부안을 그대로 놓고 국회에서 재심의하자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됩니다. 덧붙여 우리는 지난번 노사관계개혁위원회 공익위원들이 내놓은 안 정도로 정부안이 '수정'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개악 노동법의 완전철폐뿐입니다. 그 다음 얘기는 그 때 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개악 노동법 완전철폐야말로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반드시 쟁취할 수 있고 쟁취해야만 하는 현실의 목표입니다.

  이번 투쟁은 21세기를 앞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내용과 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싸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이 누굽니까? 장군들입니까? 행정관료들입니까? 국회의원 나리들입까? 정보기관원들입니까? 아니면 청와대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대통령보다 더 힘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재벌들입니다. 재벌들은 우리나라 주요 산업시설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 좋다는 우리나라 땅이란 땅은 죄 재벌들 소윱니다. 재벌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을 빼고 우리는 단 한시간도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재벌들은 민영화되는 공기업들에 은행까지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언론사의 주인들도 재벌들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재벌들을 거스르고는 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문민정부라는 이 정부가 다른 건 다 개혁이랍시고 손을 댔지만 재벌은 손 끝 하나 대지 못했던 게 다 이런 까닭입니다. 이번 노동법 개악도 재벌들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이 정부와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이 총대를 매고 저지른 짓입니다. 재벌들은 우리 사회를 무한경쟁의 비정한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들 돈벌이로 '유연하게' 마음껏 강제 동원할 수 있는 사회가 재벌들이 바라는 21세기 신한국입니다. 온 국민에게 '전담'되는 고통의 대가를 재벌들은 대를 이어 향유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듯 몇 안되는 부자와 일자리가 불안한 다수의 보통사람들로 확연하게 찢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사회는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단결과 공동체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 원리는 지난 10년 우리가 민주노조라는 학교에서 온몸으로 깨닫고 실천해온 것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들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은 단결된 노동자들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하여 우리는 이번에 "개악된 노동법을 철회하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정치세력으로 커가야 합니다. "대선 때 신한국당을 심판하자"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로 나서자"고 외쳐야 합니다. 경제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대다수 시민들은 이제 정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노동자들이 이번 개악 노동법과 한국경제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설명한다면 시민들에게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안까지 내놓는다면 우리는 국민들로부터 더 큰 신뢰와 성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수기로 내몰리는 보수정치와는 그 뿌리부터 달라야 합니다. 이번 투쟁은 지난 10년 민주노조운동의 이념 속에 그 싹을 키워온 새로운 정치를 꽃피우는 첫걸음입니다. 정재성 동지가 이 땅의 민주화를 바라며 피워올린 불꽃이 총파업투쟁 대열의 맨앞에서 우리를 재촉합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만이 우리 사회의 참된 민주화를 일궈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동지 여러분.

  꼭 이깁시다. 하여 이 승리를 밑거름으로 소처럼 탄탄히 1997년을 열어갑시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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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8:20 2005/02/1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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