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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96년 12월

 

여의도에 울려퍼진 노동법 개정투쟁의 함성

  남해로 문상다녀온 탓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9일 아침 상경투쟁 버스에 몸을 실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현대미포조선, 고려화학, 한일이화, 세종공업, 삼주기계,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 간부들 90명 가까이가 1차 상경 대오다. 무거운 잠 끝에 눈을 뜨니 여의도 광장이다. 날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일찍 도착했는지 울산 대오밖에 안보인다. 2시 넘어서부터 대오가 불기 시작하더니 출정식 마치고 거리 행진 들어갈 무렵에는 얼추 500명 쯤으로 늘었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단호했다. "총파업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자리는 그냥 상경투쟁 선포식이 아니라 바로 5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총파업 출정식입니다." 대오는 새정치국민회의 당사 앞으로 옮겨갔다. "악법 철폐! 개악 저지!"의 함성이 여의도 빌딩 숲 사이로 힘차게 퍼져나갔다. 김영대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연설을 듣고 대오는 바로 옆에 있는 신한국당사로 움직였다.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이 신한국당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배석범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연설 다음에 단위사업장 간부들의 결의가 줄을 이었다. 스스로 연사로 나선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의 한 간부는 "만득이도 열받았다. 노동법 개악 저지하자!"라는 새로운 구호를 선보여 환호를 받았다. 마이크를 처음 잡아본다는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투쟁결의를 밝히다가 얼마나 떨리는지 나중엔 앳띤 얼굴에 눈물까지 비칠 정도였는데 연설이 끝나자 "제일 잘했다!"는 찬사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신한국당사를 향해 '발사'한 30초 함성은 여의도를 뒤흔들만큼 분노를 담고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사당 앞 집회가 취소됐기 때문에 일정은 빨리 끝났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정공 노동조합 간부들이 현총련 깃발 아래서 해산집회를 가지는 동안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그리고 효문과 남구지역 노동조합 간부들은 금속연맹과 울산시협 깃발 아래 옹기종기 모였다. 중앙대병원으로 숭실대 사회봉사관으로 숙소 찾느라 이리저리 옮기는 바람에 길거리에 쏟은 시간은 많았지만, 그리고 처음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간부들이, 중간에 현대정공 노동조합 간부들이 따로 움직이긴 했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한 군데서 짤막한 잠들을 청할 수 있었다. 총파업을 꿈꾸며…

  다음날 국회 앞 집회를 시작으로 이틀째 상경투쟁이 계속됐다. 새벽에 서울 떨어진 2차 상경대오까지 합쳐 울산대오는 170명 남짓 되어 보인다. 어제보다 전체 대오는 늘어나 1,000명 쯤 될 것 같다. 국민회의 당사 앞 집회에서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는 야3당의 '공조'를 강조한 다음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이러한 개정이 어렵기 때문에 내년 임시국회에서 다룰 수 있도록 여당에게 촉구할 것"이라며, "이런 점을 감안해 노동계도 성급한 파업은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뜻밖의 박수가 꽤(!) 됐다. 마지막 신한국당사 앞 집회에서 연사로 나선 민주노총 임원들은 배석범 부위원장과 양경규 부위원장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개엿'에 비유한 곽대천 울산시협 의장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이끌어냈다.

  이상현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총파업투쟁 지침 1호'를 발표했다. 11일 정오까지 각 지역본부별로 집회신고를 할 것, 12일 지역본부 주관으로 단위노조 상집간부들의 지역집회를 갖고 밤샘농성에 들어갈 것, 13일 낮 12시 30분을 기해 각 단위노조별로 집회 후 지역별 거리행진과 대국민 선전전을 벌이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12일 자정 권영길 위원장 이름으로 '파업지침'이 내려질 때까지 비상대기하라는 '엄명'과 함께 상경투쟁은 끝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울산대오는 현총련과 비현총련이 나뉘어졌다. 대오는 LG 쌍둥이 빌딩 앞에서 31일째 아사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LG 해고자 동지들을 지지 방문하는 속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목이 메어 고개짓으로만 인사를 건네니 트럭 안에 있던 성한기 동지와 이동렬 동지가 눈짓으로 겨우 받는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 글을 마치자마자 민주노총 임원회의에서 13일 총파업을 유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설마 하고 확인해보니 사실이다. 이 늦은 시간에 현장에서 확인 전화가 빗발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현대자동차 승용1공장은 현장 집회를 급하게 꾸리는 모양이다.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대중이 지도부보다 먼저 앞선다"는 말이 이번에도 어김없는 진실로 드러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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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8:17 2005/02/1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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