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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4/23
    헬로우 블랙잭 8권 암의료편 마지막 권 나옴.(4)
    고철
  2. 2005/04/23
    rss의 지원(5)
    고철
  3. 2005/04/12
    진정한 정치란?(7)
    고철
  4. 2005/04/08
    쿠니미츠의 정치, GTO(반항하지마), 그리고 파시즘?(3)
    고철

헬로우 블랙잭 8권 암의료편 마지막 권 나옴.

* 어쩌면 이 글은 요 며칠 진보블로그에 떠돌고 있는 암 건강보험 이야기와 돌봄노동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 물론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 8권에 대한 스포일러성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면 1] 우사미(의사) : 의학이라는 건.... 수술을 하거나 약을 먹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나 병을 치료하는 것....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의학은 아닙니다. 의학이란 어떻게 죽음과 직면하느냐를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 살고 죽는건 원래 생물에게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의사는 병을 낫게 하는 것 외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음을 패배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패배인가요....? .......................... 사이토(인턴) : 죽음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죽어가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이 세상에 있을까요? 사는 것을 포기하는게 정말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건가요? ........................... 만일 진지하게 살 수 있다면... 왜 죽을 때 후회따윌 하는 거죠? 필사적으로 살려고 하는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렇게 다른 겁니까...? 생과 대면하는 것은.... 죽음과 대면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요? [장면2] 우사미 : 내 치료의 목적은... 암의 고통을 더는 것입니다... 암의 고통이라는 것은 크게 나눠 두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입니다.... TS-1을 사용함으로써 요시에 씨의 마음이 만족될 수 있다면... 난 항암제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장면3] 쇼지(의사) : 난 암으로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발짝씩 다가드는 죽음에 위협을 받으며 그저 절망 속을 사는 일따윈 절대 사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걸.... 부디 용서하세요.... 난 부인처럼 살다가.... 죽어가고 싶습니다... [장면4] 요시에(암환자) : 엄마는... 죽어... 엄마는 너희들이 태어났을 때 말야.... 이 애들이 클때까지 절대 죽고 싶지 않았었어... 하지만 그 땐 말이지.... 이제 언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어... 엄마는... 전혀 후회 같은 건 안해... 너희와 같이 지내고... 죽어 갈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것 따윈 전혀 슬프지 않아...


블랙잭 8권은 근래에 가장 기대해 왔던 책이었다. 암의료라는 주제도 그렇지만 암의료편 3권까지오면서 펼쳐보인 이야기를 작가는 어떻게 정리할까가 마치 모든 것을 건 도박판의 마지막 패를 살며시 째려보는 것 같은 긴장과 설레임을 주었다. 8권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나도 모르게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언제 만화를 보면서 눈물 흘린적이 있었을까?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다. 말기암 환자 요시에 씨의 죽음.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다 보니 그냥 눈물이 흘렀다. 블랙잭이라는 만화의 미덕은 쉽지 않은 갈등구조를 쉽게 한쪽으로 손들지 않고 끝까지 밀고나가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타의 의료만화처럼 신적인 치유능력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평범한(?) 인턴의 경험과 갈등을 중심으로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적이라는 부분에 여러 평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상식 상에서는 여러 현실들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의 의료상황을 그린 것이지만 한국의 상황도 이와 거의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에피소드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번 암의료편은 많은 주제를 던져준다. 의사란 무엇인가? 의료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전반을 흐르는 주제이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특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앞에서 의사는 무엇인가? 의료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암의 고지와 항암제 사용과 관련한 문제, 종말의료(연명치료?)의 성격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우사미와 쇼지는 예전에 한사람의 췌장암환자의 치료를 위해 미승인된 항암제 치료를 시도했다. 항암제 투여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는 듯 보였으나 보험에 적용이 안되는 관계로 그 환자의 모든 재산과 가족의 집을 치료비로 날려버리고 항암제 투여는 중단되고 그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일 이후로 우사미는 암환자에 항암제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 의사의 길로 가고 쇼지는 항암제의 연구와 치료를 하는 의사의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10년이 지나 인턴 사이토가 암치료병동으로 오고 똑같은 병의 요시에라는 환자를 맡게 되면서 항암제를 중심으로한 갈등이 고조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갈등을 항암제의 사용이 완치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면 항암제를 인정할 수 있다라는 걸로 우사미와 화해를 시도하고 치료행위 자체보다 요시에라는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쇼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그리고, 요시에의 죽음이후 제도적인 방법으로 완치를 바랄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한 완화의료과를 설치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열혈독자의 입장에서 끝에 완화의료과를 설치하는 것으로 맺은게 조금 못마땅은 하지만 의사와 병원중심의 만화이니까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8권의 내용 전반적으로 봤을때 마지막 패가 대박 카드였다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여러 지식과 경험이 있다면 각각의 주제들로도 책 한권이 나올만한 주제들이지만 하나하나 풀어쓸 능력은 없고 예전 이반 일리치의 '의료의 한계(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읽은 기억을 되살리면서 정리를 하려고 한다. 진보진영에서 흔히 무상의료를 옆집사는 순이 이름처럼 쓰고는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감기만 걸려도 병원을 의존하고 생활공동체는 점점 그 안의 몸을 돌보고 치유하는 능력과 지혜를 잃어가고 있고 그 끝에는 종말의료라는 돈을 잡아먹는 블랙홀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인정한 상태로 무상의료로 가는 것은 또한 더 많은 전제들을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지속적인 경제성장 아니면 적어도 현상유지, 의료의 전문화, 산업화...... 완화의료과가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우사미나 쇼지 같은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또한 잘꾸며진 종말 패키지 상품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된다면 그게 어떤 의미를 갖을 것인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의식과 그 사회의 문화적 양식으로 전해 내려왔었다면 지금의 의료는 그것을 병상에서의 마지막 집중치료로 표준화, 산업화 하고 있다라는 것은 타당한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단순히 가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과 나누는 마지막 안식이 존재하지 않다라는 것도 맞는 얘기인 거 같다. 내 느낌은 요시에씨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요시에씨에게 정답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맞는 죽음의 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죽음을 대면하는게 생과 대면하는 거와 같다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어떻게 죽어가느냐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면 대부분은 종말 패키지 상품을 소비하며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반 일리치는 10년동안 암과 같이 살아가다가 편안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 죽음 역시 그가 살아가던 방식과 완벽히 일치하였다고 생각한다. p.s)'쿠니미츠의 정치' 신권도 나왔습니다. 아마 23권인가 일텐데 우연치 않게도 이번 권에서는 의료의 문제를 다루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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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의 지원

* 이 글은 진보네님의 [트랙-팩 12 : 진보블로그 1000개 기념 트랙팩] 에 관련된 글입니다.

파이어폭스를 깐지 한달이 넘어가지만 엊그제 부터 불여우를 주 브라우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 보니 익스플로러에서 느끼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더군요. 물론 그에 해당하는 다른 폐인 세계도 다가왔습니다. ㅡ.ㅡ;;
하옇든 불여우가 MS익스플로러와 가장 대비되는 기능은 rss를 중심으로 한 기능들이더군요. 라이브 북마크 기능과 sage 에서의 rss 구독 기능등은 참 흥미로운 기능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요즈음해서 이러저러한 다른 사이트의 블로그들을 방문했는데, 진보넷 블로그가 그중 가장 rss 기능을 잘 구현한 사이트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copy right 를 거부하는 진보넷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러저러 보다 보니 앞으로 rss 기능을 얼마큼 잘 지원하냐가 그 사이트의 개방정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갑자기 딴 얘기지만 포스트 쓰기의 메뉴들이 왜 갑자기 다 사라졌는지 궁금하군요. 현제 BR 태그 직접 넣어가면 글 작성중입니다.)
하옇든... 얘기하려던 바는 현재의 진보넷 블로그의 rss 지원기능을 열렬히 칭찬하면서 (짝짝짝...) 좀더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2가지 인데
첫번째는 새로쓴 포스트를 읽어 들일수 있는 rss 를 제공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기능의 제공이 실제 블로그간의 교류를 차단하고 rss reader 중심의 읽기만 장려하는 부작용을 우려하면서도 rss 기능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분야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번째는 자가증식 불로거진의 이전 내용들을 rss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 진보네님의 왕노가다로 구성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블로거진은 거의(!) 매일 갱신이 되고 있는데 진보넷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흥미로운 포스트들을 잘 정리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 지내다 보면 며칠동안 인터넷 사용을 못할 수 있는데 이 때 놓친 블로거진이 궁금할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주일 단위정도로 모아서 rss로 제공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두번째 기능은 꼭 rss 만이 아니라 html 사이트로도 보여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글루스 같은 곳에서는 블로거진과 비슷한 [이오공감의 흔적]이라는 것을 쌓아두고 있는데 괜찮은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진보네님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부입니다. 어쨌든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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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정치란?

* 이 글은  [쿠니미츠의 정치, GTO(반항하지마), 그리고 파시즘?] 에 관련된 글입니다.

 

'쿠니미츠의 정치' 21권 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쿠니미츠와 장래의 라이벌 후와의 담판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맞어.. 정치란 그런거야.' 하고 눈물흘리며 감동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나저나.. 이런것도 저작권 문제에 걸리나? 이건 흡사 만화 광고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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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미츠의 정치, GTO(반항하지마), 그리고 파시즘?

*이 글은 코지토 님의 일본 만화 몇편, 그리고 파시즘 에 관련된 글입니다.

 

처음으로 진보넷 블로그 밖의 포스트에 트랙백을 겁니다. 감개무량하다. 하하..

저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만화를 보는 편이고 코지토님 글과 그 댓글들에 나온 만화들은 아주 재미있게 보거나 적어도 보려고 한 두권은 넘겨보다 포기한 책들이라 관심있게 글들을 봤습니다.

 

우선 저는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의 팬이라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군요. 누가 만화 추천해 달라고 하면 얘기하곤 하는 책이죠. 그리고, '반항하지마(GTO)' 도 엄청 즐겁게 읽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나 묘사가 가슴을 뜨끔뜨끔하게 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하는 만화만 읽지는 않지요.

 

그래서, 코지토 님의 글이 '일본 만화 몇편, 그리고 남성 중심주의' 라고 달렸다면 '흐음.. 역시 그렇지.' 하고 넘어갔을텐데 파시즘이라는 타이틀은 좀 동의하기 힘든 딱지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댓글에 나온 많은 만화들 (정치9단, 생츄어리, 지팡구....) 은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딱지를 붙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팡구와 같은 작가가 그린 것이지만 '침묵의 함대'는 파시즘이라고 붙이기는 좀 모호한 면이 있지요. 군국주의적 냄새를 품겨서 한발만 더 나가면 '에이 군국주의 만화야!'라고 부를려고 하는데 끝가지 줄타기를 하며 마지막 한발을 더 나가지 않는다고 할까요. 사실 그런 줄타기에서 오는 묘한 긴장으로 만화를 보는 재미가 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넓게 봐서는 우파적 세계관이긴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적을 뛰어넘는 주인공 캐릭터의 특징이 그런 느낌을 준 것 같기도 합니다.

 



 

딴쪽으로 샜는데 쿠니미츠의 특성을 박정희와 비교하고 그것을 통해 파시즘 국가의 지도자 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비약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쿠니미츠의 캐릭터는 일본 학원물에서의 일반적인 주인공 캐릭터입니다. 힘있고 쌈 잘하고 머리는 비었지만 천성은 착하고 정의감 있고....

 

이런 캐릭터가 학원물에서는 역시 힘이 장땡이야 하면서 짱먹는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스토리를 양산하지만, 나이가 먹어 학교선생이 되거나(GTO) 정치가 비서가 되면 (쿠니미츠의 정치) 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캐릭터 자체만 가지고 본다면 쿠니미츠의 라이벌이 얘기하는 정치와 쿠니미츠가 얘기하는 정치의 차이는 없어지고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쿠니미츠가 보이는 행동의 의미등이 없어지게 되죠.

 

사실 쿠니미츠의 정치는 처음 소재의 친근함 때문에 끌렸습니다. 필요도 없는 도로공사에 의한 관과 건설업체의 유착, 우리나라 새만금을 생각하게 하는 이시하야만 간척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다룬 농약과 유기농 문제까지 일본에서의 (물론 우리나라도) 핵심 환경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문제의식이나 해결책들도 풀뿌리 정치차원에서도 올바른 방향입니다. 물론 해결방식 자체는 결국 쿠니미츠의 완력이 동원되는 클라이막스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만화의 구성상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처음에는 소재에 끌렸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물론 중간중간 삑사리 들이 있지만...)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점점 마음에 들고 있습니다.

최근에 쿠니미츠와 라이벌(이름을 모르겠습니다. --;;)이 담판을 벌이는 에피소드가 있지요. 그 담판에서 라이벌은 신시바가사키시를 살리기 위한 합리적 개발 방안을 제시합니다. "외부의 자본을 유치해서 중심 상점가를 키우고 캐릭터 산업과 부가 산업을 창출해서 발전을 시키겠다." 뭐 이런 류의 얘기였는데 그 라이벌은 부패하지 않은 일본(물론 우리나라도) 엘리트 관료들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우리나라 지자체의 대부분은 이런 모델의 개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민들 역시 이런 개발 계획에 반 수 이상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쿠니미츠의 얘기는 "당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제시한다면 도대체 평범한 주민은 무얼하느냐? 단순히 정치를 쳐다보는 존재냐?" 였습니다. (정확한 표현이 기억 안나는 군요. 아주 인상깊은 대사였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것은 주민의 동원이 아닌 참여, 중앙집중적 개발보다는 상부상조하는 삶을 통한 행복의 추구, 외부의 자원이 아니라 지역에서 순환할 수 있는 자원 순환의 도입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축제'의 장이라고 보는 것 역시 마음에 들더군요. 게다가 주인공 캐릭터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능력입니다. 머리가 빈대신 자기 얘기를 주구장창 떠드는 게 아니라 귀가 열려 있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제가 본 쿠니미츠의 정치인데 파시즘 하고는 차이가 좀 크지 않을까요?  어쨌든, 지금 배경이 시장선거여서 나오는 장점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만일 쿠니미츠가 비서에서 벗어나고 본격 정치가가 되어 일본 총리에 도전하는 것 까지 얘기가 진행된다면 파시즘의 성격을 보여줄 가능성은 있겠지요. 하지만 현재의 스토리 진행상 거기까지 가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게 안도가 되면서도 그렇게 진행됐을때 작가는 어떤 정치를 보여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GTO에 대해서는 길게 할 얘기는 없고, '평교사' 영걸 캐릭터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임도 교감도 교장도 교육감도 아닌 평교사가 영걸에게 딱 어울리는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아무리 사고를 쳐도 영걸은 평교사가 딱이지요. 그리고, 영걸에게 학교는 아이들과 노는 곳입니다. 물론 그 논다라는 것은 '상남 2인조'시절의 노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역시 폭력이 난무하기 하지만 말이지요. --;; 아이들도 자기들을 통제하고 교육시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같이 놀아줄 수 있는 선생을 바라지요. 영걸은 그런 아이들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주는 존재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일들 속에서 자기 영향력을 넓혀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반 아이들과 그 자리에서 노는 선생입니다. 파시즘적 욕망의 인간형 하고는 차이가 있지요.

 

위 두 만화를 일본작가가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아이들도 즐겨 보는(특히 GTO) 이유는 한국의 정서와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점점 합리적으로 되어가는 시스템 속에서 무기력해져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해결책 중 하나로 파시즘이 제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신드롬도 그렇고 많은 일본만화의 파시즘적 성격도 그런 곳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해결하는 다른 방안으로 시스템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본연의 생명력을 드러내고 빛내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위 두 만화책이 그런 길을 일말이라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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