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6/11/20 10:41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간만에 나다에 갔다. 주로 혼자, 것두 나를 합해서 10명이 넘지않는 수준에서 영화를 봐오던 나로서는 주말 저녁의 꽉찬 나다의 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정말 차가운 영화였다. 영국인인 켄로치는 IRA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갈등을 정말로 냉정하게, 냉정하다 못해 차갑게 그려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온 몸을 조여오는듯한 냉기라니...


 

어찌보면 켄로치 할배는 좌파라기 보다 냉소주의자가 아닌가 싶었다.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형제끼리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눠야 하다니...

 

데이미언이 밀고를 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년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국이란게 이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죠'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쏟아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기어이 자신의 입으로 동생을 향한 사격 명령을 내리는 '테디'의 머리속에도 같은 말이 흘렀을것 같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의 데이미언의 머리속에도 '이념과 정의라는게 이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흘렀을것 같다.

 

과연, 그런 정의와 이념이란게 사람을 파탄시키면서 지켜낼만큼 소중한 것일까?

 

영화에서 나온 데이미언과 한 사회주의자의 대화속에 나왔던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라는 제임스 코놀리 말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IRA에 무기 자금을 대주던 악덕고리업자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관대한 대응을 보면서 그 정당성은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내용을 보고 민족주의자들이 자유군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낄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계속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투쟁이 (방법과 형태를 떠나서) 정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테디와 데이미언 형제를 보면서 '당장 내일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잘못하면 깃발만 나부끼고 사람은 없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간다면 종이놀이 세트로 만든 휘황찬란한 사회주의의 성을 만들게 되는게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마지막 장면... 크리스를 죽인후 데이미언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크리스의 엄마를 만났을때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대사와 마지막 데이미언의 죽음을 알리는 테디를 향해 시네이드는 같은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상처들 속에서 건설된 사회주의는 과연 우리가 바라던 그것이 맞을까?

 

보리밭에 부는 피가 섞인 바람에서 피를 빼는 방법은 없을까? 무엇이 우리의 성이 종이가 아니라 살아꿈틀대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까?

 

몸을 감싸는 냉기와 복잡한 머리... 켄로치 할배가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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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0 10:41 2006/11/2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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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탱이 2006/11/20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켄로치 할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현실이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이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영화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된다는 것... 뭐 이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2. newtimes 2006/11/20 1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냉기의 한복판에서도 잠이 오다니...ㅠ.ㅠ

  3. 해미 2006/11/21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곰탱이/ 맞아요. 여전히 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에 더욱 냉기가 올라와요. ㅠㅠ
    newtimes/ 옷을 너무 따뜻하게 입어서 그런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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