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성 학회 소식지에 쓴 글이다. 건강형평성을 고민하는 곳이니 건강 형평성에 관한 책을 골라야했겠지만 따로 책을 읽는게 부담스러웠다. 세미나 때문에 읽고 있는 '노동을 거부하라'와 시간날때마다 틈틈이 읽고 있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 중에 써볼까 고민하다가 지금의 촛불 정세에 어울리는 책인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가 생각났다. 몇년전 2/3쯤 읽고 책꽂이에 꽂아 놨다가 얼마전 부러진 손가락을 치료 받기 위해 입원해 있던 도중 다 읽었는데 그 속에 포함되어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 생각나 끄적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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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6월이다. 2008년의 서울은 전쟁터 같기도 하고, 축제의 현장 같기도 하다. ‘명박산성’이라는 컨테이너로 이미지화되는 정권의 소통 불능에 대해 중고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노래하며 응수한다. 폭력적인 국가 권력이지만 물대포에는 ‘온수를 달라’는 외침과 물총으로, 소화기에는 까나리액젓으로, 경고방송에 대해서는 ‘개인기’를 요구하는 외침으로, 불법 규정에는 인도를 몰려다니는 게릴라 시위로 응수하는 민중들의 발랄함이 넘치는 곳이 지금의 서울이다.
지금의 서울에서 가장 넘쳐나는 것은 아마도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라는 체계와 그 체계를 운영하는 기본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직접 몸으로 실천하고 거리에서 표현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며 남미가 떠올랐다. 멕시코 사빠띠스따의 평화의 행진과 국민소환투표라는 민주주의의 장에 자신을 던졌던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결단이 지금 한국이 상황과 겹치는 지금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는 시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민주주의와 소위 좌파들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는 남미의 최근의 정치 흐름과 상황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민주주의적 진보에 대한 방향을 살피게 하는 책이다. 사빠띠스따 부사령관인 마르코스의 ‘창설 20주년 봉기 10주년’ 기념 인터뷰와 세계적 작가 가르비엘 마르께스의 차베스의 대한 르포, 비판적 지식인 갈레아노의 ‘베네수엘라 소환투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세계적 관심 속에서 출발한 룰라 정부의 현재를 짚어보고 이후의 과제를 제시하는 페트라스의 글도 포함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국제연합개발계회(UNDP)가 2004년에 발간한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하여’가 전문 번역되어 남미의 흐름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해본다.
1부에서는 마르코스의 입을 통해 사빠띠스따의 긍정성과 그들의 활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우리가 만난 세상이 산 속에서 상상했던 세상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놀랐습니다. 당시 시민들은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했고 정보를 얻고자 했으며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는 예상.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라는 마르코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그 설레임과 벅참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사빠띠스따에 대한 ‘마술적 사실주의’로 그 내용이 가공되어 현실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진정한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는 우려를 전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베네수엘라의 지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석유라는 절대적인 자원을 배경으로 진보적 실험을 계속 해가고 있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행보를 살펴본다. 그리고 반대파들의 극렬한 저항(?)에 국민소환투표라는 제도로 의연하게 맞서며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 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석유를 매개로 경제적으로 기반을 만들고 국제통화기금이나 미국과의 관계에 일정정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행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개혁과 경제적 개혁의 온도가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 실현과 민중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책의 적극적 추진은 전 세계가 베네수엘라를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브라질의 룰라 정부에 대해서는 좀 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제안정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행한 정책들과 그의 실패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룰라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브라질 민중의 목소리를 전하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조망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보고서를 소개하면 남미의 흐름들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잣대로 평가하고 다양한 지표를 통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 속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정치적∙시민적∙사회적 시민권이 고루 보장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라고 평가하고 국가의 능력이 안팎의 이해집단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는 핵심적인 견해를 제출한다.
최근 진보 세력사이에 불고 있는 남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속에서 남미의 흐름에 대한 일방적인 환상이나 찬사가 아니라 이에 대한 곱씹기와 분석을 시도하는 글로 구성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할 것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와 변혁이라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덜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노력과 소통의 확산 속에서 가능한 것이며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견해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가 총 대신 새로운 무기를 벼리고 있으며 그 무기가 바로 직접민주주의라는 엮은이의 견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발랄함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가부장적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실현되는 직접 민주주의에 흥분을 하기도 하지만 운동권이냐 비운동권이냐 또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로 양분되며 다양성이 제한되는 모습에 불편해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행진을 하면서 직접 토론을 통해 투쟁의 방향을 결정하고 두 달여 가까이 밤잠을 설쳐가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자발성에 놀라면서도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들이나 지역의 온도가 서울과 다르다는 사실에 고민을 하는 지금, 민주주의에 대한 이 책의 한 구절을 마음에 두고 두고 곱씹는다.
[ 민주주의는 인간개발의 핵심적인 조건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인간 개발은 "한 국가의 시민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늘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면, 인간 개발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발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발전은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에 의한' 발전이란 바로 인간개발이 남성들과 여성들의 창의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컨대 인간개발은 자연이나 운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을 위한' 발전이란 인간개발의 목적이 국고에 예치되는 돈의 액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시민들이 보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발전은 곧 자유'에 다름 아니다. ]
- 우리가 가장 제대로 포착한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배우려는 자세와 능력을 갖추고 있덨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싸우는 것을 배웠습니다. 적을 구별하고 적이 아닌 이들을 구별하는 것을 배웠지요. 말하는 법과 귀 기울이는 법도 배웠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걷는 것도 배웠고 차이응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 다른 이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그대로 우리를 들여다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빠띠스따들이 가장 제대로 한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배우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 민주주의는 우리들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공공생활의 방향이 담긴 여러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아마르티아 센의 굳은 신념이다. '인간개발은 바로 민중이 향유하는 실질적인 자유(권리)들이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견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 이 보고서는 민주주의가 시민권의 통합적인 발전을 요구한다는 견해를 채택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반 권리를 완전히 보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민적인 권리들과 사회적인 권리들 또한 완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즉 민주정부는 절차적 최소요건(선거제도)을 바탕으로 정치적 시민권, 시민적 시민권, 사회적 시민구너을 보장하는 체제, 요컨대 통합적 시민권을 보장하는 제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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