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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상민이 왜 독립위해 나섰을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8/16 12:51
  • 수정일
    2019/08/16 12: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현 2019. 08. 14
조회수 414 추천수 0
 

 

 

일본군-.JPG

 

 

 

 

#만약 나라가 자신을 보호하고 대우하기는커녕 차별과 멸시를 가했다면 어떨까. 상민과 노비 같은 피압박민들은 “나라와 왕과 지배권력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는데?”라며 차라리 나라가 망해 자신들이 천형 같은 하층계급에서 탈출할 길이 열리기를 원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게 우리 민족의 아이러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는 조선이 불교를 내쳐 천시했는데도 승병들은 물론 노비들까지 낫과 도끼를 들고 싸웠고, 일제강점기 때는 가장 멸시받은 백정이나 기생들까지 나서 독립운동을 했다. 거대 제국 중국의 변방에서 거란족 선비족 여진족 말갈족 등 대부분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소멸한 데 반해 유구한 역사 동안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비밀이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신앙 이상의 공동체성으로 내면화해 있다.

 

김구-.jpg» 백정과 범인의 줄임말인 백범을 호로 사용한, 상민 출신 임시정부 주석 김구

 

 

남강-.jpg» 상민출신으로 대부호가 된뒤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오산학교를 세우고, 개신교의 3.1운동을 참여케한 남강 이승훈이 3.1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수감된 모습

 

남강1-.jpg» 남강 이승훈과 오산학교생들. 사진 <EBS>지식채널 갈무리

 

 

 

 

최재형1-.JPG»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의 대부가 된 최재형

 

 

 

 

 

 

 #하층민인데도 계급투쟁을 제쳐놓고 독립에 앞장선 이들이 있다. 상민 출신으로 ‘백정과 범인’의 약자인 ‘백범’으로 호를 지었던 김구, 상민 출신 부호로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고, 기독교를 3·1운동에 참여시킨 남강 이승훈이 대표적이다. 특히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된 최재형(1860~1920)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함북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극심한 기근과 가난을 탈출하려던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9살에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가출한 그는 실신 상태로 러시아 선장에게 발견돼 6년간 선원으로 세계를 다니며 글로벌 청년으로 성장했다. 18살에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상주한 수만명의 러시아 군인을 상대로 한 군납으로 대부호가 되었고, 지역 군수가 되어 한인마을마다 32곳의 소학교와 교회들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일본군에게 검거돼 총살을 당했다. 그 뒤 유가족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고, 그의 유해도 묘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기념비제막-.JPG»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의 고택에 마련된 최재형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기념비 제막식

 

 

참석자들1-.JPG

 

 

 

고려인들1-.JPG» 최재형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한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틴을 비롯한 고려인들

 

 

 

 

이주민1-.JPG»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

 

 

초기이주민-.JPG»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

 

 

 

핛살-.JPG»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인들

 

 

 

조직도-.JPG» 최재형이 지도자였던 연해주 대한독립운동 지도부 동의회의 조직도. 안중근은 동의회의 의병부대장으로, 최재형의 명과 지원에 의해 국내진공작전으로 승리를 거두기도했다.

 

 

의거-.JPG» 최재형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의 거사도

 

 

 

 

 #그 최재형이 살던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고택을 단장해 문을 연 최재형기념관에서 12일 고인의 흉상인 ‘최재형 기념비’가 12일 우수리스크 죄재형의 고택에 제막됐다. 최재형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거의 지원자였다. 안중근이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동맹한 것도 최재형의 집이었고, 안중근에게 ‘기자증’을 만들어준 것도 대동공보사 사장인 최재형이었다. 거사 뒤 러시아인과 영국인 변호사를 뤼순에 보내고, 안중근의 순국 뒤 유족을 보살핀 것도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은 노비 출신이라는 개인적 한계를 벗고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지만 일본의 감시 말고도 동포의 천대라는 또 다른 시련에 맞서야 했다. 고종에 의해 간도관리사로 파견된 이범윤의 견제를 받고, 1909년엔 이범윤 부하의 저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양녕대군 16대손임을 내세우며 왕족 코스프레를 했던 이승만 같은 양반 출신보다 상민이나 노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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