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 공세 강도가 심상치 않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13일 밤 담화에서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며 다음번 대적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며 군사 도발 가능성을 언급했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남측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해 북한의 모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군령권을 행사한다는 측면에서 김여정 제1부부장이 총참모부에 행사권을 넘겼다는 것은 대남 군사행동을 지시·승인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측의 이런 태도에 대해 남측 정부는 14일 새벽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화상회의를 열고 "남과 북은 남북 간 모든 합의를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서 기존 남북 간 합의 준수 기조를 강조했다.
북측이 연이어서 남측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배경을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남측 정부는 대북전단 살포 제재나 판문점 선언 비준 방침을 밝히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큰 효과를 거둘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북측은 당분간 상당한 정도의 긴장감을 높이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큰 듯하다.
특히 남북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때 드러나는 것은 북측이 상당히 오랜 기간 대남공세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러나 이에 대한 남측의 준비나 대응 전략이 무엇인지는 아리송하다는 점이다. 북측이 대남 비판과 공세적 태도를 취하리라는 점을 미리 예측했다면 국내외가 주시하는 상황에서 남측이 함량 미달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수십 년 간의 남북 관계 수준으로 환원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관측도 가능하겠지만, 상황은 그런 구시대적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부적절할 만큼 달라진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번 북한 태도의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의 대선 국면과 트럼프의 국내 위상 약화인 듯하다. 미국은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코로나19와 백인 경찰의 폭력에 의한 흑인 사망 사건 이후 전국을 강타한 차별철폐시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북미 대화에 대한 관심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미국은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이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북핵 문제는 그렇지 않다.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국제적 위상을 격상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고, 민주당이 승리할 경우 북미 대화가 순탄하지 않으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트럼프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과 싱가포르에서 만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우리의 동맹은 덜 안전하고, 김정은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여주기 위한 사진 촬영이나 연애편지는 억지력과 원칙 있는 외교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해, 깐깐한 대북 협상 방침을 예고했다<연합뉴스 2020년 6월 13일>.
북한은 미국 대선이 끝날 때까지 대선 이후의 대미 협상력 강화를 위해 한반도 위기지수를 높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한미동맹의 약한 고리인 남한을 공략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은 트럼프가 국내에서의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 등을 취할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을 직접 자극하거나 남한과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는 방식은 피할 전망이다.
북한이 남한을 격렬히 비판하는 배경에는 싱가포르, 하노이 북미회담 실패로 북한 주민에게 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간 사태를 털고 가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경제가 유엔 등의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적개심을 외부에 돌려 불만을 해소하려하는 노림수라 하겠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 추진 과정에서 남한이 미국의 종속변수 역할을 탈피하지 못했고, 향후 특별한 계기가 없을 경우 미 대선 이후에도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한국이 자주적 공간을 확장하거나 독립적 변수의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는 북한의 판단 결과도 이번 대남 도발에 반영됐다. 문재인 정부는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에서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뿐, 유엔과 미국의 대북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다는 전략이어서 지난 수년간 남북교류협력관계는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남북교류협력은 비핵화와 같이 가야 한다면서 계속 제동을 걸었고 북한에 대해서는 군사, 경제적인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면서 대화로 해결하자는 방식을 고집해왔다. 미국은 올해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군사 행보를 지속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할 수 있는 고래급 잠수함 건조 활동 기미를 보이자, 공군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 등 특수정찰기 등 각종 전략자산을 5월 들어 거의 격일 간격으로 한반도 주변에 출동시켰다<뉴스1. 2020년 5월 17일>. 미국의 이런 조처는 남북 정상간 합의나 남북한 간의 9.19군사합의 등을 무력화하는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지난 2000년 북미 간 핵합의를 이끌어냈던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12일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에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과거 자신이 추진했던 '단계적 협상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해 주목된다. 페리 전 장관은 당시 북한이 미사일과 핵 개발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할 경우 3단계에 걸쳐 경제적 보상과 북미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에 나서기로 양자가 합의했지만, 조지 부시 정권으로 바뀌면서 더 나은 방안이 있다는 이유로 폐기됐다고 지적했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6월 13일>. 북한은 수년전부터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하면서 핵보유국들과 군축회담은 할 수 있지만, 비핵화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북한이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핵 동결이나 핵 개발 포기가 아닌 핵보유 국가로서 군축 협상을 하자고 할 가능성을 페리 전 장관의 발언에서 유추할 수 있다. 북한이 미 대선을 전후해 핵군축 회담을 제안하는 공세를 취할 경우 남북한 관계도 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미 대선이후 북한이 남한에 대한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평가된다. 이는 북한이 실질적인 핵 보유국으로서 위상이 굳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중국은 미국의 압박 때문에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고 북한은 이런 점을 십분 이용해 앞으로도 대남 압박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측근이 최근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 등을 언급하는 것도 북한의 핵보유가 남한에 미칠 압박을 고려해 남한의 미국에 대한 밀착 강도를 더 높이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미국은 지난 수년 간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이 미 본토를 위협하고 있다며 초강력 제재를 전제로 한 '북한의 선 비핵화, 후 대북 제재 해제'라는 큰 틀을 정해 놓고 한국의 동참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 한국은 당사국이며, 북미관계가 존재하듯이 남북관계도 존재한다는 점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한국의 독자적, 자주적 입장이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 개선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미국과 유엔 등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가 2017년 9월 합의한 대북 제재 결의안 2375호에 자국의 독자적 대북 제재를 덧붙여 철통같은 북한 목 죄기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대북 제재 결의안 2375호는 한반도 비핵화를 평화적이고 외교정치적인 방식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결의안 1~23항은 대북 제재에 대한 내용이고, 24~25항은 식량부족과 의료 제도 미흡으로 인한 임산부, 어린이 영양실조 등 북한 주민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26~31항 가운데 일부는 대북 제재가 북한 주민 인도적 지원, 협력 사업 등을 저해해서는 안 되고 비핵화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24~31항 가운데 일부 조항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http://unscr.com/en/resolutions/2375).
26항 : 유엔의 대북 제재가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조처에 역행하거나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경제활동, 상호협력, 식량 원조, 인도주의적 지원, 원조 또는 구호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거나 중단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제재 조치 일부를 면제할 수 있다.
28항 :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의 재개와 2005년 9.19합의를 지지한다.
29항 : 한반도,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은 매우 중요하며 상황의 평화적이고 외교적, 정치적 해결을 지지한다.
30항 : 포괄적 합의를 달성하기 위한 긴장 완화 노력을 지지한다.
31항 : 한반도 비핵화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으로 달성할 목표는 평화적 방법으로 추진해야 한다.
위에 소개한 대북 제재 결의안 2375호의 일부 조항을 보면 미국이 자국의 국내법으로 대북 제재를 계속 강화하면서 비핵화를 압박하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6자회담의 재개나 그 합의를 외면한 채 미국의 주장만을 밀어붙이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은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항에 자국법을 적용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오랜 기간 중단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남북한의 비정치, 비군사적 경제협력을 저지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남북한 정상 간에 이뤄진 평양공동선언, 판문점 선언을 무력화했다.
미국의 독자적 대북 제재는 북한 경제 제재 등이 일정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고 좀 더 계속될 경우, 북한이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가리라는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외부의 재제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는 사태를 방지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가 두 나라의 군사적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 중국 포위 전략을 강화할수록 중국은 북한의 전략적 위치가 커진다고 보고 대처하고 있는 양상이다. 미국은 한국에 고고도방어미사일체계(THAAD) 배치 문제를 계속 부각해 중국을 자극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이 수년전처럼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가할 상황을 유도해 한국 정부를 미국에 더욱 밀착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4월 총선 승리로 그간 대미, 대북 정책이 국내 유권자들에 수용된 것으로 계산하는 모양새다. 따라서 향후 대선 등을 의식해 파격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할지 의문이다. 특히 미국과의 찰떡 공조를 제1순위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국내 선거 대책이라는 점을 여권 전체가 확신하고 있어, 향후 북한의 강력한 공세가 있다 해도 종래의 정책을 바꾸는 모험을 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야권이 문정부의 대북전단 단속 등을 놓고 종북이라는 식의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남한 내 대북 분위기가 경색되는 것을 미국은 내심 바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향후 북한의 대남 공세가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한 방향으로 치달을 경우 남한은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 것인가?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우선 미국의 대북 정책에 순응하고 미국의 대북 군사전략에 동의하는 식보다 남북 협력 부분은 예외로 인정받는 노력을 통해 남한의 자주적 공간을 넓혀야 할 것이다. 동시에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을 가능케 하는 한미동맹 관계의 정상화를 통해 군사적 자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는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는데 필요한 전진기지로 남한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시민사회의 대북 공론화를 막는 결정적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보법이 존속하는 한 남북 간 평화교류나 평화통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실질적인 핵보유국 위상 강화 전략도 남한이 어떤 식의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북한이 핵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핵의 비중을 축소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위해서는 남한이 향후 더 심해질 미중 대립과 갈등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해 동북아 평화와 안전에 기여한다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교류협력 추진에 대한 치밀한 전략 전술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 지금이라도 북한의 일탈적 행동에 즉각 대응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대내외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는 서로 상대방의 패를 보면서 벌이는 카드게임과 유사하다. 자주성의 확보가 최우선이고, 그 다음 평화적 방식으로 분단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1511291309829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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