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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륀지' 광풍의 희생양들…"국가가 사기 쳤다"

정부 믿고 일하다 뒤통수 맞은 영어 회화 전문 강사 6100명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02 오후 5:48:45

 

 

"내가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어륀지'라고 하니까 알아듣더라."

2008년 1월 30일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의 말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유미경(가명·46) 씨는 자신이 5년 뒤 해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 씨는 중학교에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로 4년째 일하고 있다.

유 씨가 중학교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야심작인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 방안'을 내놨다. 2013년까지 1조7000억 원을 들여 원어민 수준의 고급 인력 2만3000명을 '영어 전용 교사'로 채용해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 대선 후보 시절인 2007년 10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 영어 프로그램장에 들른 이명박 전 대통령. ⓒ연합뉴스


"고급 인력 6100명, 정권의 희생양 됐다"

이명박 정부가 한창 장밋빛 영어 교육 비전을 홍보했던 2009년 5월, 전국의 시·도 교육청은 영어 회화 전문 강사 채용 공고를 냈다. 1년마다 계약하는 비정규직이었지만, 정년은 교육공무원법 제47조를 준용해 62세라고 했다.

선발 과정도 까다로웠다. 시·도 교육청은 응시 자격으로 교원 자격증, 테솔(TESOL) 등 석사 학위, 국내 대학의 영어학과 학사 학위, 영어 모국어 국가 대학의 학사 학위 등을 내걸었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전국의 고급 인력들이 모여들었다. 유미경 씨도 그중 하나였다.

무역 회사와 대기업 임원 영어 강의, 외국 유학 사교육 시장 등을 거쳤던 유 씨는 '학교'에 안착하고 싶었다. 교육청은 2009년 2학기에 유 씨를 수도권의 한 중학교로 발령했다.

"영어 토론 수업, 영어 글쓰기 수업, 영어 자기 소개 훈련까지…아이들한테 수업 재밌었다는 말을 듣는 보람으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4년여가 지나면서 '영어 몰입 교육' 열풍은 시들해졌다. 2009년 7월에 채용된 제1기 영어 회화 전문 강사 526명이 지난 7월 먼저 집단 해고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채용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는 6100명이다. 이들도 4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순차적으로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유 씨는 "돌이켜 보니 똑똑한 동기들은 우리가 기만당하고 정권의 희생양이 됐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깨닫고 하나둘씩 그만뒀고, 나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며 "국가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가 처음 뽑혀서 교육청에 연수 갔을 때, 장학사가 그랬거든요. '대기업도 함부로 해고를 못하는데, 하물며 교육청이 직접 뽑고 국가가 직접 하는 사업 아니냐. 걱정하지 말라'고요."

유 씨가 해고된 교육 현장에는 '창조 경제, 이공계 인재 양성' 열풍이 불고 있다.

"우리는 교사도 아니고 회계직도 아니래요"

이들이 적정한 처우를 받지 못할 조짐은 이전부터 있었다. 전북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로 일했던 이혜연(가명·43) 씨도 '정년 62세'라는 교육청 채용 공고를 믿고, 2009년 5월 교육청에 지원서를 넣어 합격했다.

교육청이 설명한 '장밋빛 전망'과 실제 학교 현장은 너무 달랐다. 이 씨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교사 일을 똑같이 하고 부담임까지 맡았지만, 1년을 일하든 4년을 일하든 임금은 그대로였다. 성과급도, 명절 상여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정규직 교사들이 쉬는 방학 때는 영어 회화 교육이 아니라 학교 회계직원과 같은 일을 했다. 정부가 설명한 '고급 인력 투입'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학교 눈칫밥 먹으면서 학교 현장이 이 정도일지 몰랐다고 실망하고 그만둔 사람들도 많았어요. 교사 일을 하는데도 우리는 교사도 아니고, 회계직도 아니래요. 기간제법, 노동법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독소 조항들을 다 모아서 법 사각지대에 넣은 거예요."

교육부, 전원 해고 뒤 신규 채용 시 '경력 불인정'

교육부는 지난 6월, 같은 학교에서 4년 일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는 해고하고 신규 채용 공고를 내라는 방침을 세웠다. 그 결과 526명이 전원 해고됐다.

이번 조치는 2009년 8월 교육부가 '한 학교에서 기간제로 4년 이상 일할 수 없다'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한 데 따른 것이다. 2년 이상 근무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토록 한 기간제법의 예외 조항을 두고, 최대 4년까지 계약하게끔 했다.
 

▲ 영어 회화 전문 강사들은 지난 4월 22일부터 교육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전회련 학교비정규직본부

'정년이 62세'라는 말을 믿고 지원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들은 뒤늦게 분노했다. 이 씨는 "정년을 속여서 뽑아 놓은 뒤에 시행령을 개정한 것은 '혼인 빙자 간음'이나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현장의 반발이 예상되자 교육부는 지난해 10월 강사들의 고용 기간을 4년에서 8년으로 늘리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입법 예고했지만, 지난 1월 법제처의 반대로 철회했다. 법제처는 이 시행령이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화하는 기간제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8년간 고용하는 지속적인 사업이라면, 무기계약직을 채용해야 옳다는 것이다.

법제처 해석에 대한 교육부의 선택은 집단 해고와 신규 채용이었다. 교육부는 4년 이상 일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을 우려해 '해고'를 선택한 것이다.

영어 회화 전문 강사들은 고용 안정을 위해 "신규 채용 시 기존 강사들의 4년 경력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교육부는 이마저도 "다른 신규 지원자와 형평성에서 어긋난다"며 거부하고 있다. 유 씨가 울분을 토했다.

"1년씩 재계약하다가 4년 뒤 다른 데로 가라고 해요. 그러면서 다시 경력 0년차로 시작해야 한대요. 경력 인정이 안 되니 다시 입사 시험 보고 들어오래요. 모든 기업이 이런 제도를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제도를 교사들한테 적용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특히 전북교육청은 기존 영어 회화 전문 강사 36명을 해고하고, 26명을 새로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36명 가운데 최소 10명은 해고장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씨는 지난달 30일부터 동료들과 함께 전북교육감실 앞을 점거하고 있다.

교육부 "영어 회화 전문 강사제, 언제까지 갈 제도인지 알 수 없다"

정년 62세를 명시한 데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몇 살까지 일할 수 있는지를 표시한 것"이라며 "예를 들어 58세에 임용됐다면 최대 62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의미였지, (젊은 나이에) 한 번 임용된다고 해서 그때까지 정년이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무기계약직 전환 요구에 대해서 이 관계자는 "한쪽만 (무기계약직 전환을) 해드리면 기간제 교원이나 스포츠 강사 등 다른 직종들도 해드려야 한다"며 "재정적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무기계약직이 늘면 임용 고사를 준비하는 사범대 학생을 배제하는 결과가 나와 다른 교사나 직종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상시·지속적 업무에는 무기계약직 채용이 원칙'이라는 고용노동부 방침에 대해서 교육부 관계자는 "15시간 이상 일하니 상시 지속적인 업무라고 볼 수 있기도 하지만, 이 제도가 한시적 제도인지, 언제까지 갈 제도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회화 전문 강사에게 지원되는 교육부 연간 예산 1100억 원도 언제까지 보장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신규 채용 과정에서 경력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이 관계자는 "새로 임용을 원하는 분도 있는데, 기존에 계신 분이라고 해서 다른 경력보다 더 (인센티브를) 쳐주면 불평등하다"며 거절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영어' 교육을 중시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공계 인재 양성'을 중시하고 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인 지난해 10월 대전 카이스트에서 간담회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창조 경제' 위해 과학 전문 강사 투입?…"다음 정부가 버릴 것"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 전문 강사 채용? 미친 거죠."

초·중·고교에 '과학 전문 강사'를 배치하겠다는 법안이 발의되자 이혜연 씨는 "박근혜 정부가 과학 교사들을 만들어 놓고 다음 정부가 버릴 것"이라고 냉소했다.

논란이 된 법안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인 한선교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6월 12일 대표 발의한 '과학교육 진흥법 일부 개정법률안'이다.

이 법안은 '창조 경제'의 핵심 과제로 내년부터 5년간 전국의 초·중·고교에 '융합과학 전문 강사(이하 과전강)' 1만1360명을 6899억 원을 들여 투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7월 해고 통보를 받은 '영어 회화 전문 강사'들은 이 법안에 대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또다시 정책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유미경 씨는 "과학 강사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일용직 쓰듯이 4년 동안 헐값으로 일 시키고 버릴 것"이라며 "또 농락당하고 끝날 건데 (학교에 과학 강사를 투입한다는 법안을) 비웃고 싶다"고 말했다.

유 씨는 "처음부터 정부가 '이건 파트타임 직종이다, 책임감 같은 건 필요 없고 대충 시간 때우고 대충 가르쳐라'라고 말해줬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준형 공공운수노조 학교비정규직본부 조직국장은 "지금 있는 비정규직도 관리 못하고, 대안도 못 만들면서 무작정 해고되는 조건을 만들어선 안 된다"며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다면 있는 비정규직 고용 안전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또한 지난달 17일 성명을 내고 "창조 경제, 일자리 창출 정부 시책에 학교를 실험하지 말라"며 "학교 파행을 불러오는 비정규직 양산 정책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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