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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의 시대, 진보의 새로운 연대와 단결이 필요하다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인데, 나는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몇 차례 e메일 등으로 거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조롱, 경멸, 비아냥거림, 증오가 가득 담긴 그 항의 메일은 불행히도 내가 오랜 기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던 이들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내용의 요지는 “왜 내가 응원하는 후보의 적을 함께 공격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배신자, 사기꾼 등의 단어가 섞인 그 메일들의 내용은 공개하기가 꺼려질 정도로 과격했다.

회색분자의 운명이랄까? 돌이켜보면 나는 늘 이런 비판을 듣고 살았다. 진보진영 안에서 의견이 분열될 때 나는 오랫동안 “당신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애매한 태도를 견지해왔던 탓일 게다.

운동권 내부에서 민족해방계열이니 민중민주계열이니 하며 싸울 때에도, 노동 현장에서 현장파니 국민파니 중앙파니 하며 다툴 때에도 나의 태도는 늘 “당신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줏대 없이 사냐?”는 비판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태도인데, 이번 칼럼에서는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자 한다.

로버스의 동굴 공원 실험

현실갈등이론, 혹은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으로 불리는 이론이 있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무자퍼 셰리프(Muzafer Sherif)의 이론이다.

셰리프가 1954년 실시한 실험의 요지는 이렇다. 평범한 11살짜리 아이 22명을 뽑은 뒤 이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캠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이 두 팀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 몰았다.

경쟁이 본격화되자 각 팀의 결속은 놀랍도록 강화됐고, 상대팀에 대한 증오도 매우 높아졌다. 사실 두 팀은 그냥 캠프에서 경쟁을 했을 뿐인데, 이들은 빠른 속도로 결집해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고조되면서 밤에 서로의 캠프를 급습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죽여버리겠다”는 위협도 등장했다. 서로의 감정이 너무 고조되는 바람에 실험팀은 예정보다 빨리 실험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실험 기간 1주일). 이게 바로 실험의 1단계였다.

2단계에서 실험팀은 이 두 팀을 다시 한 팀으로 묶었다. 새롭게 한 팀이 된 이들이 과연 과거의 증오를 잊고 원팀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두 팀의 갈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니었는데도 상대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지 않았다. 고작 1주 동안 경쟁했던 사이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 과정을 거쳐 실험팀은 마지막 3단계 실험에 돌입했다. 한 팀으로 섞여있는 이들 앞에 새로운 거대한 적을 등장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공원 관리인이 수로를 끊어버렸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과제를 준 것이다. 끊어진 수로를 복원하는 일은 두 팀이 협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미워하던 아이들에게 공원 관리인이라는 더 거대한 적이 등장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두 팀의 협력이 복원됐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외부의 적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내부의 갈등을 접고 마음을 터놓았다.

이 실험의 요지를 정리해보자. 1단계 실험의 요지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서로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팀이 분리됐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할 정도로 미워할 수 있다.

2단계 실험의 요지는, 한번 상대를 미워하면 그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움의 감정이 가슴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리 외형상 한 팀이 돼도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한 번 보고 술 한 잔 마시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증오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3단계 실험의 요지는 무엇일까?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를 미워해도 더 거대한 적이 나타나면, 그래서 그 적과 맞서 싸울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 연대의 감정이 그제야 비로소 복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 진보의 연대를 복원해 나가자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바로 내가 “당신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애매한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한 이유다. 나는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건강한 분열은 진보의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기에 어느 방향으로, 혹은 어떤 속도로 세상을 바꿔야 할지에 관해 당연히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견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치열한 토론을 거치는 것이다. 그게 분열로 비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분열을 얼마든지 환영한다.
 
저작권:양지웅 기자


하지만 나는 진보가 분열로 망하지는 않을지언정, 분열로 꽤 고생을 할 것이라는 대목에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건강한 분열이라 해도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형성된 증오의 감정은 좀처럼 쉽게 수습이 안 된다. 그러다보면 넘어서서는 안 될 선을 훅 넘어가는 사람이 나온다. 지난번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한 몇몇 옛 진보진영 인사들의 행동이 그런 것이다.

참고로 그런 자들에게까지 관대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므로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나는 우리편에게는 관대하지만 상대편에게는 잔인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선을 넘어선 사람은 더 이상 우리편이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이나 자비를 남겨둘 필요가 없다.

아무튼 말하고자 하는 변명의 요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의 3단계 국면에 지금 진입해 있다. 윤석열이라는 새로운 거대한 적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 국면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연대의 끈을 하나하나씩 복원해야 할 때다. 연대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대한민국 보수는 그렇게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물론 묵은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진보라는 넓은 울타리 안에서는 “죽어도 너와는 함께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상대가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상대가 진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한은 말이다.

역사의 진보는 이 울타리를 얼마나 넓히느냐의 싸움이다. 윤석열 정권이 출범한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고, 앞으로 50년 같은 5년의 세월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2016년 겨울 함께 전국을 누볐던 촛불 시민의 연대를 다시 회복하자. 혹자는 “촛불의 시대는 끝났고 촛불의 연대는 절대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 안 되는 게 세상에 어디 있나? 장담하는데 그런 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싸울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결집하는 것, 끊어진 연대의 끈을 다시 잇는 것, 그리고 함께 싸우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모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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