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 : 밸푸어 선언
전쟁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국의 대부호였다. 이미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던 로스차일드는 이 편지에 호응하여 영국에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 영국은 1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편지는 11월 9일 공개되었고,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치를 떨어야 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편지에 환호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이주는 순조로웠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의 지원이 있었고,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인 부호들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중동 전쟁은 종결된 것일까: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년)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대통령을 초청하여 13일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집트는 네 차례의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도했던 아랍의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국가였다. 따라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 체결은 중동 평화의 출발로 평가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수에즈운하 수입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마저 여의치 않자, 사다트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경제난을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사다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유화적’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78년 평화협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중동 평화의 출발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사다트는 이집트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랍권 국가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집트는 아랍연맹 회원자격이 정지되었다. 협정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평화적 해법의 출발이 되는가: 오슬로 협정 Ⅰ(1993)
1991년 11월 미국, 소련, 스페인이 주최하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가 초대받아 ‘마드리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비록 합의문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1990년대 평화 협상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중동 평화 협상은 1993년 오슬로 협정 체결로 빛을 보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이집트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한 2개의 합의문을 일컫는다. 1993년 9월 워싱턴에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 아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만나 합의서에 서명했다. 1993년 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측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를 오슬로 협정 Ⅰ이라고 부른다.
오슬로 협정 Ⅰ의 원칙은 두 국가 해법이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고,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5년 안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동의했다. 쟁점이 되는 예루살렘, 최종 국경,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등은 5년 후에 논의하기로 했다. 평화적 해결의 원칙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협정의 공식 명칭은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다.
1994년 5월 4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 대한 합의”를 체결하고,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 일정과 팔레스타인으로의 권한 이양 등을 합의했다. 몇 주 후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했고 PLO는 자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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