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거 직후의 안중근 의사 [사진-국가보훈부]
의거 직후의 안중근 의사 [사진-국가보훈부]

[통일뉴스]는 안 의사 순국 116주기인 26일 고마츠 모토코(小松元吾, 필명 방외생) 기자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10년 9월 10일자 '안중근의 묘' 기사를 최초 공개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무엇일까?

이 사료를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교수는 고마츠 기자가 남겼을 또 다른 기사를 비롯해 새로운 사료를 전면적으로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법정투쟁을 삽화로 남기고 사형 집행 약 5개월 후 매장지에 대한 르포기사를 쓸만큼 안 의사를 경외한 고마츠 기자가 이렇게 짧은 글(공백 제외한 글자수 1,583자, 200자 원고지 기준 9.3매)로만 기사를 마무리했을리 없다는 것이 첫번째 착안점이다.

두번째 주목한 점은 이번 사료 발굴 과정에서도 드러나듯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 순국일 이전에만 집중해 온 사료 연구, 조사 과정의 허술함이다.

이 교수는 고마츠 기자의 기사를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4월 15일 일본에서 확보했다고 말했다. 기존 정부기관과 연구소 등에서 발행한 관련 자료집에 누락된 자료임을 확인했고, 이는 사료조사를 순국일 전후의 좁은 기간으로만 제한한  결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론은 앞으로 정부와 연구자들이 일본은 물론 중국 정부의 비협조로 사료발굴이 어렵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민간 사료에 대한 연구와 조사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
  
특히 고마츠 기자가 남겼을 가능성이 높은 다른 기록을 찾기 위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 구체적 사료연구에 집중해야 

여기서 고마츠 모토코 기자의 신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31살의 청년 안중근이 뤼순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재판받는 과정을 직접 취재한 고마츠 기자는 1875년 일본 고치현(高知県) 우사기다(兎田) 출생으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 의사보다 네살 위이다.

화가의 꿈을 안고 19살에 상경했다가 1898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2년까지 5년을 살다 돌아 온 방랑객, 낭만적 예술가의 면모도 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 [요동신보(遼東新報)] 기자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당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특파원으로 뤼순에 머물며 이토 히로부미 처단 사건에 대한 안 의사의 재판 과정을 취재하면서 법정 스케치와 공판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남겼다. 일부 남아있는 기록에는 고향인 고치현의 지역 일간지인 [도요신문사(土陽新聞社)] 통신원으로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중국 뤼순 법정에 취재진으로 파견된 일본인이었으나, 법정에서 안 의사의 당당한 기개와 논리 정연한 '동양평화론', 그리고 적국 일본의 천황이나 민중을 증오하기보다 동양의 진정한 평화를 역설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1924년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귀국해 고치현 아사히(旭)에서 생활하다가 1956년 82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고치현은 뤼순 관동도독부 법원 재판 당시 재판 절차의 불법성에 반발하며 안 의사에 우호적이었던 일본측 검사인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관선 변호인인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카마타 세이지(鎌田誠二) 등의 고향이기도 하다. 

50대에 접어들어 고향에 돌아 온 고마츠 기자가 이들과 교유하며, 젊은 시절 그들의 인생에 잊지 못할 흔적을 남긴 안 의사에 대한 기록을 다듬어 남기지 않았을까? 

사형집행 후 약 5개월이 지나 작성한 '안중근의 묘' 기사를 다시 읽어보자.

앞머리에 "나는 감회에 젖어 다롄에서 뤼순으로 와 고인을 애도(이토 히로부미를 의미함-이규수)하는 마음으로 안중근의 묘를 찾고, 동시에 당시 공범이었던 세 수인(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이규수)의 현황을 살피고자 뤼순감옥을 방문하였다"는 취재 의도와 배경, 심경을 적었다.

'이토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 먼길을 자청해 안 의사의 묘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공신'이자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일본 근대화의 지도자'가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한일합방에 속도를 내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토를 애도하는 마음'이란 그저 명분으로 삼기 위한 핑계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기사 중 안 의사의 매장지를 확인하는 순간 '광한(狂漢, 미친 사내) 안중근'이라고 쓴 것도 일본 매체에 게재되는 현실적 제약속에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

그는 필명을 쓸 필요가 없는 특파원이었으나 굳이 '방외생(方外生)'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속세를 떠나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일본식 한자어인 '방외생'도 의미심장하다. 

고마츠 기자는 '안중근의 유해는 실은 감옥 묘지에 매장되지 않았다거나, 일단 매장되었으나 지금은 그곳에 없다'는 등의 항간의 소문을 언급하고는 "나는 내심 정말로 없다고 단정할 수 없어 그 진상을 알고자 하였다. 게다가 돌이켜보건대, 가령 그 진상을 탐구한다해도 경솔하게 이를 발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지나쳐 왔으나, 이제야 말로 탐구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되었다"고 썼다. 안 의사의 주검을 찾는 일에 일종의 사명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각과 더 정성스러운 접근법으로 사료를 찾으려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교수가 언급한 고마츠 기자의 '별도 상세 기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하는 일, 뤼순감옥 사망자 유해매장을 전담했던 용역업체인 '대륙공사'(大陸公司)의 사망자 명부와 묘지 배치도를 비롯한 1차사료를 추적하는 일을 비롯해 해야 할일은 아직도 많다.

남북 합의는 피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돼

국가보훈부와 통일부, 외교부 등 정부 부처가 협업체계를 구축하고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민관협력단'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지방보훈부에서 발족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국가보훈부와 통일부, 외교부 등 정부 부처가 협업체계를 구축하고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민관협력단'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지방보훈부에서 발족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만약 안 의사 유해 발굴과 관련해 매장지 확정을 위한 좀 더 자세하고 새로운 사료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그 사료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 볼 수 있을까?

지난 19일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민관협력단' 발족식에서 나온 정부측 설명으로는 '쉽지 않다'.

그에 따르면,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원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중국 정부는 북측의 사전 동의 또는 남북공동조사 발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2008년 뤼순감옥 서쪽 '위안바오'산(元寶山, 원보산)지역을 발굴할 당시에는 북측이 판문점연락관을 통해 남측의 단독 발굴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전달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현재 남북관계 상황으로는 논의 자체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또 중국 정부는 매장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 제시를 요구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가 어떤 자료를 가져가도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알려달라며 번번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문가들이 뤼순감옥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중국내 주요 문서보관소인 '당안관' 등에 대한 자료조사에 대해서는 비협조나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어 현재 접근조차 쉽지 않다.

중국은 한국 정부의 안 의사 유해 발굴에 대해 △북측의 사전동의 △구체적 자료제시 요구를 견지하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정부 차원에서 중국에 공식적으로 유해발굴 협조를 요청했을때에도 중국은 같은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다 지난 2005년 남북이 '안중근열사 유해 공동 발굴 사업 추진'을 합의하고 2007년 4월 실무접촉을 통해 위안바오산을 우선 발굴대상지로 확정 발표한 이후 발굴에 동의했다.

지금까지 두 차례, 지난 2008년 3~4월 남북 합의 아래 한국과 중국이 합동으로 위안바오산 지역을 처음 발굴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측이 단독으로 뤼순감옥에서 서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사오파오타이'산(小炮台山, 소포대산) 지역에 대한 단독 발굴을 실시했으나 두 곳 모두 1910~1920년 감옥 증축시 흙을 파낸 흔적과 쓰레기 매립층이 발견되는 등 지형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인골이나 묘지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차례의 발굴은 뤼순감옥 소장인 구리하라 사다키치의 딸인 이마이 후소코의 관련 증언과 사형집행 후 추모제가 열린 사진의 배경을 토대로 이뤄졌다.

그보다 훨씬 전인 1970년대와 1986년에 북한은 조사단을 파견해 '둥산포' 묘지 등을 조사했으나 지형변화로 인해 유해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 여순감옥묘지 '둥산포'가 유력 매장지로 지목되고 있다. [사진 출처-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민간협력단 발족식 국가보훈부 발표자료. 촬영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 여순감옥묘지 '둥산포'가 유력 매장지로 지목되고 있다. [사진 출처-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민간협력단 발족식 국가보훈부 발표자료. 촬영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현재까지 연구결과가 가리키는 유력 매장지는 고마츠 기자의 기사가 설명한 뤼순감옥 묘지인 '둥산포'(東山坡)이다.

중국 다롄시정부가 뤼순감옥에서 사형 집행된 중국인 항일열사들이 안장되었다는 이유로 200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곳이고 반경 3km에 해군부대 등 군사시설이 다수 있어 발굴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아무튼 중국측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여러 난관을 뚫고 유해 발굴을 시도하기 위해서라도 매장지를 특정할 수 있을만한 사료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제 1의 과제가 되고 있다. 

또 하나 피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일이 안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공동조사와 발굴에 대한 남북의 합의이다.

유해 발굴을 위해 필수적인 중국의 협조를 위해서도, 국권회복과 동양평화에 대한 안 의사의 사상을 현재에 되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동양의 평화는 꿈꾸었으나 민족의 분단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안 의사의 부활은 분단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각성하게 하는 분명한 상징이다.

안 의사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싸운, 남과 북 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유해 발굴 뒤 남북 공동 '안중근 동아시아 평화기념관'을 건립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경주 에이팩 계기 한중정상회담과 지난 1월  중국 국빈 방문시 시진핑 주석과 안 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지속적인 소통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진행해 왔다.

지난 18일 '범정부 차원의 협업체계 구축'과 '민간전문가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민관협력단'을 16년 만에 다시 발족하고 '둥산포' 발굴 방향을 제시한 것은 그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16년을 넘기고도 유해조차 찾지 못한 안 의사에 대한 도덕적, 역사적 책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면 바로 이어지는 문제는 고국으로 봉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북한은 안 의사의 고향인 해주와 27살까지 살았던 신천군, 의병활동을 위해 연해주로 떠나기 전 2년간 교육활동을 벌인 평안도 용강군 진남포(현재의 남포시)를 중심으로 생애를 설명하고 있다.

남포시에 사는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 안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의 자손들이다. [사진 출처-통일부]
남포시에 사는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 안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의 자손들이다. [사진 출처-통일부]

안 의사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학술조사단을 구성해 2009년 9월초와 11월 상순 두 차례에 걸쳐 생애 조사한 결과가 『력사과학』 2010년 1호에 발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 석천동에서 안태훈의 맏아들로 태어나 6~7살이던 1885년 부친이 일가 친척 70~80명과 함께 신천군 청계동(현재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으로 이사하면서 해주를 떠나 이곳에서 16살(1895년)에 김아려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27살까지 지냈다.

1905년 을사5조약 체결에 격분하여 부친과 함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먼저 시찰을 떠났으나 식솔을 이끌고 청계동을 떠난 부친이 노상에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고 1906년 3월 온 일가와 함께 '평안도 룡강군 진남포 비석동'(현재의 남포시)으로 세번째 거주지를 옮겼다.

남포에서 양옥집 한 채를 세우고 생활을 안정시킨 다음 가산을 털어 남포시내 산 중턱위에 삼흥학교를,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또 한 곳에 돈의학교를 세워 27살의 젊은 교육자가 되었다. 

삼흥학교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일제가 파괴하고 일본인학교를 세웠다.

"선생은 1879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탄생하였다. 애국사상이 강하였던 선생은 반일단체인 향군회를 조직하고 1906년 이곳에 삼흥학교를 창설하였으며 직접 교단에 서서 청년들을 반일애국사상으로 교양하였다. 1907년부터는 반일의병투쟁에 참가하였으며 1909년 10월 26일 할빈에서 일제 조선강점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적 기개를 과시하였다. 선생은 1910년 3월 26일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1965년 3월 26일 건립-"

북한이 안 의사 55주기인 지난 1965년 3월 26일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옛 삼흥학교 터에 세운 '애국렬사 안중근선생기념비'의 내용이다. 비석은 현재 남포시 해방공원에 원래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안 의사의 유해가 발굴되면, 유언에 따라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 옆에는 안중근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안중근 동아시아 평화기념관'을 남과 북이 함께 건립하여 동북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다짐하는 큰 마당이 되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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