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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세상에 불 지르러 온 ‘길 위의 예수’

혼탁한 세상에 불 지르러 온 ‘길 위의 예수’

 
2012. 09. 19
조회수 1821추천수 0
 

문정현 신부와의 대화
 
문정현 / 길 위의 신부로 알려져 있을 만큼 칠십 평생을 낮은 곳을 지키기 위해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로운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정마을로 이사해 ‘강정상단’ 대행수로 일하고 있다.
 
김덕진 /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인권 지킴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 활동가이다.

 

20120919_1.JPG » 문정현 신부“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복음 12장 49절
 
생명이 위태로운 곳에, 평화가 깨어지는 곳에, 억울하게 쫓겨나고, 빼앗긴 이웃들이 눈물 흘리는 곳이면 흰 수염의 노 사제를 만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을 ‘길 위의 신부’라는 칭하며 편안한 성전을 떠나 세상 한가운데 교회를 세우며 살아 온 문정현 신부. 지긋지긋했던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1987년 서울의 봄이 지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에도 그는 경찰의 방패에 밀려 나뒹굴었고 검찰의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연히 이명박 정권 4년 내내 그는 길 위에 있었다.
험하고 먼 길을 돌아 제주 강정마을의 주민이 된 문정현 신부를 만났다. 뜨거운 햇살과 바닷바람으로 검게 그을린 노 사제는 제주 강정이 자신의 마지막 싸움터가 될 것이라며 태풍이 휩쓸고 간 구럼비해변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풍 무이파가 제주를 포위하여 모든 항공편과 배편이 결항되어 아무도 제주 밖으로 나가지 못한 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구럼비해변과 서귀포시의 한 식당에서 문정현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덕진(이하 김): 신부님, 이제 강정 내려오신지 얼마나 되셨죠?
문정현(이하 문): 7월 6일에 완전히 이사 왔으니까 한 달이 훨씬 넘었네.
 
김: 신부님께서 강정에서 사시겠다는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사시는 집이 무척 좋던데요. 어떻게 구하셨어요?
문: 이사 오기 일주일 전에 평화바람 식구들 오두희, 딸기 등과 같이 강정에 왔었어. 5박 6일 동안 오동나무집이라는 민박집에 공짜로 머물면서 주민들을 만나고, 매일 구럼비해변을 나갔어. 그때 결심했지. 여기 와야겠구나, 강정이 내가 살 곳이구나 하고 말이야.
 
김: 이른바 “오동나무집 구상”이군요.
문: 그 집에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평화상단도 생각한 거야. 그래서 마을회장님한테 부탁을 했지. 강정에 와서 살려고 하니 집 좀 구해달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강동균 회장이 강정에서 제일 좋은 집을 구해주셨어. 1층에는 주인이 살고 우리가 2층에서 살아. 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집세도 안 받으시고 너무 잘해주셔. 직장일과 아픈 식구가 있어서 열심히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시다면서 말이야.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집을 내어 주지 않았을 거라고 하셨어. 우리가 월세 비슷하게 봉투를 드렸더니 질색을 하시면서 일절 안 받으시겠다는 거야, 하하. 어디에서나 난 늘 좋은 사람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아, 참 감사한 일이야.
 
김: 평화상단 시작하시기 전에 제주 갈치랑 고등어랑 파시기도 하셨잖아요. 그때가 재작년인가요?
문: 2008년은 평화바람 식구들과 평화유랑을 다닐 때인데, 그때 제주에 왔었고 제주 해군기지백지화대책위 사람들을 만났지. 제주 해군기지가 화순에서 위미, 위미에서 강정으로 왔잖아. 그때 갈치랑 고등어 장사를 시작했지. 많이 팔았어. 천삼백 만원인가 벌어서 대책위에 드렸지.
 
김: 와! 대단하시네요. 이번 평화상단의 젓갈, 멸치 장사 목표는 얼마세요?
문: 돈이 있어야 싸움을 하지. 주민들이 투쟁하다가 벌금선고도 받고 손해배상 소송도 걸려 있어. 각종 법률 대응하는데도 돈이 들고, 버티고 지키는 데도 돈은 필요해. 그래서 한 오천 만원은 벌어서 전달해야지 싶은데 벌써 천만 원은 전달했어. 이번 평화상단은 반응이 좋아. 주문량이 많아서 물량대기에 바빠. 또 우리가 가끔 실수도 해서 ‘소라젓갈’ 주문한 집에 ‘참조기젓갈’이 배달되기도 하고, 여름에 포장이 터지기도 했는데 소비자들이 웃으시면서 다 양해를 해주셔. 이건 이 사업이 된다는 뜻이거든. 게다가 광주대교구 옥현진 주교님도 지난주에 구럼비해변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시면서 평화상단을 적극지지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이제 별로 걱정 안 해.
 
김: 갈치 장사하시던 2008년하고 평화상단을 꾸리신 지금하고 강정마을 분위기는 어때요? 그때랑 많이 다른가요? 아니면 비슷한가요?
문: 오랫동안 싸움을 하면 당연히 지치게 되어 있어. 그리고 제주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이 문제가 전국적인 사안으로 부상하지 못했던 것도 분명히 있어. 그런데 주민들이 대단해.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상처도 아픔도 있었는데 흔들림 없이 버텨 온 거지. 물론 도법 스님이 이끄시던 생명평화탁발순례, 개척자들, 또 평화활동가들이 주민들과 함께 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봐. 거기에 영화평론가 양윤모 선생이나, 평화활동가 송강호 박사, 주민대책위 고원일 위원장 등이 구속되고 단식하면서 투쟁이 불이 붙었어. 특히 지금 구속되어 있는 최성희라는 여성이 대단한 활동을 했어. 나도 놀랬고, 주민들도 많이 자극을 받은 것 같아.
 
김: 저도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대단했는지는 잘 몰랐어요. 그분들이 신부님의 강정 행을 재촉했나 봐요.
문: 진작 강정에 오려고 했었어. 2008년에 평화유랑이 끝나면 강정에 오려고 했지. 그런데 2009년 초에 용산참사가 터졌잖아. 공권력 때문에 철거민 5명, 경찰 1명, 여섯 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인데, 용산에서 장례 치를 때 까지 매일 미사하면서 유족들과 철거민들과 1년을 살았어. 그래서 강정에 오는 게 늦어 진거지. 그런데 2010년에는 또 4대강 공사 저지 운동이 확대되면서 명동성당에서 사제들이 단식기도를 했잖아. 그런데 그 단식기도 중에 명동성당이 우리 사제들을 박해했잖아. 그래서 명동성당에서 6개월이 넘게 나 혼자 기도를 시작했어. 그래서 또 강정에 오는 게 늦어졌지. 용산과 명동에서 기도 안 했으면 진작 강정에 왔을 거야.
 
김: 용산이나 명동에 계실 때도 강정이야기 종종 하셨잖아요. 연락도 계속 하셨고요.
문: 그럼, 양윤모 선생은 명동까지 직접 오시기도 했고, 고유기 집행위원장, 고권일 주민대책위원장 등하고는 연결이 되어 있었지. 연락이 오고 가고 했어.
 
김: 강정에 이사 오시면서 편지를 쓰셔서 전국에 보내셨다면서요?
문: 응, 신문이랑 인터넷언론에도 실린 글인데 그 글이 사실 호소문이고 편지거든. 그래서 전국 성당들, 사제단 신부님들에게 다 보냈어. 그때 한 자매가 내가 명동성당에서 사순절기도회를 하면서 했던 강론을 모아서 소책자로 만들어왔어. ‘참사람 되어’라는 책자를 혼자 발행하시는 분인데 원래 조용히 숨어서 일하시는 분이야. 독자들에게 읽게 하고 싶어서 만드셨다고 하시더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비로 천 권을 만들어 오신거야. 그래서 그 강론집과 편지를 같이 보냈지. 곧 응답들이 있으실 거라고 믿어. 그 편지 보내고 여기 들어왔는데 주민들이 “신부님이 오셔서 든든해요”라고 하니까 나도 책임감이 생기고 그래.
 
김 : 신부님이 강정에 오고 나서 큰 싸움이 한 번 있었지요?
문 : 그렇지. 7월 24일 날. 7월 21일에 조현오 경찰청장이 제주를 순시했어. 헬기를 타고 강정마을을 돌아보고는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갔어. 그때부터 여긴 비상이었어. 24일은 일요일이어서 주일미사도 함께 드리고 음식도 마련해서 주민들하고 나누어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오후에 강정마을에서 구럼비해변으로 진입하는 도로와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으로 삼성과 해군이 보낸 용역들하고, 경찰 수백 명이 몰려온 거야. 주민들이 막아서니까 막 욕을 하고 폭행하고 난리가 났지. 주민들하고 활동가들이 온몸으로 싸워서 쫓아냈어. 그날부터 밤새서 지키고 그런다니까.
 
김: 마을회장님이 잡혀가신 날이 그날이신가요?
문: 아니, 그날은 15일이야. 마을회장님이 집에 있는데 경찰 수십 명이 와서 다짜고짜 연행해갔어. 출석요구서도 한 번 밖에 안 보냈고 나중에 출두하겠다고 경찰에 연락도 했다는데 말이야. 조현오 경찰청장이 왔다가 가고 나니 제주 경찰들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 연락받고 마을회장님 집에 간 고권일 주민대책위원장과 평화운동가 송강호 박사까지 연행해 갔어. 마을에 난리가 났지.
 
김: 그래서 그날 어떻게 되었어요?
문: 당장 서귀포 경찰서로 쫓아갔지. 그런데 서귀포 경찰서가 아주 빡빡하더라고. 면회도 안 시켜주더니 세 사람을 제주 동부 경찰서로 빼돌렸어.
 
김: 저런, 웃기는 경찰들이네요. 뭐가 무섭다고 빼돌려요?
문: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동부경찰서로 바로 쫓아갔지. 그랬더니 여기서는 또 우습지도 않게 경찰서장이 나와서는 서장실로 안내를 하는 거야. 서귀포경찰서는 문부터 걸어 잠그더니만 면회도 순순히 시켜주는 거야.
 
김: 왜 그랬죠? 동부경찰서장이 혹시 천주교 신자 아니에요?
문: 아니야. 그건 아닌데 굳이 심하게 할 이유가 없었겠지. 자기 관할서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있는데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마을회장님을 면회 온 거야. 난 얼굴도 모르니까 몰랐는데 사람들이 도지사라고 하더라고, 마을회장이 경찰서에 체포되어서 왔다고 도지사가 면회를 온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은 도지사의 면회를 마을회장님이 거부해서 도지사가 못 만나고 돌아갔어. 강동균 회장, 대단한 사람이야.
 
김: 그분이 이장도 겸하고 계시다면요. 체포영장에 의해 경찰이 연행해 간 마을이장을 도지사가 면회 오고, 그 도지사의 면회를 마을이장이 거부한다니 아무리 제주도가 작다고 하고, 도지사가 무소속이라도는 하지만 제주도가 좀 특별한 고장이긴 한 것 같네요.
 
김: 신부님은 천주교 사제로 따지면 전주교구 신부님이시잖아요. 그런데 다른 지역에 많이 이주해 다니셨어요. 신부님의 이주 역사가 남한사회 투쟁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문: 응, 그렇게 이주하면서 살게 되었네.
 
김: 은퇴하시고 평화바람 식구들과 자리 잡은 신 곳이 군산이시죠? 군산이 고향이신가요?
문: 익산이야 내 고향은 익산이지.
 
김: 맞아요. 익산이시죠. 익산이 고향이시고 전주에서 오랫동안 사목을 하셨고, 평택 대추리에 사셨고, 용산 4구역에 가서 사셨죠?
문: 매향리에도 가서 살았었지.
 
김: 익산, 전주, 화성 매향리, 평택 대추리, 군산, 서울 용산, 명동, 이제 제주시네요. 섬에 사시는 것은 처음이시지요?
문: 그러네, 섬은 처음이네.
 
김: 섬이라서 조금 다른 점이 있나요? 아무래도 뭍하고는 조금 다를 것 같은데.
문: 많이 다른 것 같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서도 다른 것 같고, 시민단체들도 좀 다른 것 같아. 아직 내가 평택 대추리 살 때처럼 마을 주민들과 한 덩어리가 못 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김: 신부님께서는 현지 주민들과 금방 한 식구 되시잖아요. 이번에도 대추리나 용산처럼 싸움이 끝날 때까지 강정을 안 떠나실 것이지요?
문: 응, 그렇지. 비행기 값도 비싸서 왔다 갔다 할 수도 없어.
 
김: 제가 지난 10년 동안 신부님 투쟁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곁에서 지켜보며 살았는데, 이번 제주도 싸움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여중생 사망사건 때나, 매향리, 대추리, 용산참사 때도 항상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신부님들은 함께 하셨지만, 주교님들이나 천주교회의 주류에서 신부님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번에 강정에 오셔서는 제주교구의 환대를 받으셨어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으신데요. 제주교구장이신 강우일 주교님께서 스쿠터도 선물로 주셨다면서요. 강 주교님은 또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시기도 하시잖아요.
문: 그래, 처음 있는 일이지. 돌아가신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이해해주셨지만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시거나 하시진 않았지. 현장에서 생활하는데 그 지역의 교구장과 뜻을 같이 하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
 
김: 지금까지 강우일 주교와 광주대교구 옥현진 주교께서 구럼비에 오셔서 미사를 하셨고, 앞으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와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께서도 구럼비에 오신다니 사실 신기해요. 저도 이런데 신부님께는 더 특별하시겠어요.
문: 4대강 공사 저지에도 주교님들이 나서주셨고, 이제 강정 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해서도 주교님들이 마음을 모아 주시니 여러 생각이 들어. 왜 주교님들이 그동안 사제단과 거리를 두었는가? 왜 사제단 신부들과 사목적 대화를 하지 않고 애써 모른척하고 외면해 왔던가 말이야, 참 알 수가 없어.
 
김: 언론이나 세상에서 주교님들 이야기는 다루지 않아도 사제단 신부님들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으니까요.
문: 사제단 소속의 사제들은 불이익을 많이 당했어. 강제로 안식년을 주고, 정기인사에서 제외하고, 본인의 뜻은 묻지도 않고 해외선교로 쫓아 보내고 말이야. 단지 사제단이라는 이유 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어디에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할 때에 항상 대화하자, 토론하자 했지. 토론을 해서 우리 사제단이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납득된다면 무조건 주교님들을 따를 것이라고까지 했어. 그런데 한 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지.
 
김: 신부님이나 사제단 신부님들이나 모두 교구장 주교님들을 따르셔야하는 순명이 있으시지 않아요? 사제서품 때 그런 약속을 하시잖아요?
문: 물론이지, 내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45년이야. 평생을 싸우면서 살아왔지만 교구의 한 사제로서 주교님을 모시는 일과 교회의 위계를 거부하면서 살지 않았어. 내가 하는 일이 사목적으로 위배된다면 언제든지 순종할거야. 이런 우리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배척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 대화도 해보지 않고 사제단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교구 사제들에게 말하는 주교가 있다는 것은 납득이 안 가지. 나도 그런 대화 한 번 못하고 내 갈 길을 지금껏 살아온 거야.
 
김: 그런데 제주교구 오셔서는 교구장 주교님께 스쿠터 선물도 받으시고, 나란히 미사도 집전하시고…
문: 처음 있는 일이지. 선물이 얼마냐의 문제가 아니야. 주교님들이 그렇게 하셨을 때, 우리 사제들이 얼마나 떳떳해지고 용기를 가지게 되겠어.
 
김: 용산참사 때도 늦기는 했지만 당시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님과 주교회의 정평위원장 최기산 주교님께서 용산에 오셨었지요?
문 오셨지. 하지만 힘들고 어렵게 오셨지. 조심스럽게 말이야, 조건도 많았고.
 
김: 사제단 신부님들도 용산참사 때, 참 대단하셨지요.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는 동안 많은 신부님들이 다녀가셨어요.
문: 용산참사 현장에서 이어간 생명평화미사는 우리 사제단의 꽃이었다고 봐야지. 우리 사제단 신부들도 누가 너의 이웃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은 거지. 남일당이 사제들의 훈련소였어.
 
김: 저도 용산에서 신부님들 진짜 많이 만났어요. 특히 사제단활동을 하지 않으시던 신부님들도 미사에 많이 오셨어요. 수녀님들도, 신자들도 그렇고. 용산참사 기도는 정말 천주교의 힘이 참으로 대단함을 보여주었지요.
문: 다들 사제로서 당연한 걸음들을 하셨던 거지. 억울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제도 교회 안에서 냉대를 받았지. 하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못했어.
 
김: 이번 제주의 평화를 지키는 싸움이 천주교 내의 새로운 바람이 될까요?
문: 내가 사제단 신부님들한테 “평생에 천주교의 교구장이 나와 뜻을 함께해서 자리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다. 이런 교구장의 뜻이 좌절 될까 걱정된다. 교구장의 뜻이 승리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어. 사제단이든 사제단이 아니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여기에 의기투합해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바른 길인가를 좀 뚜렷하게 보여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이번 일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범 교구 차원에서 사제단과 제도 교회가 함께해서 해낸 일이 되는 거야. 나는 이걸 중요하게 보고 있는데, 모르겠어. 우리 사제단 신부님들도 여기까지 생각하시는지는…  
 
김: 지금 이 구럼비해변에서 함께 미사하시는 제주교구 신부님들도 사제단이신 분들과 아니신 분들이 계실 것 아니에요?
문: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지. 내가 타 교구 신부지만 같은 사제니까, 그리고 다들 생각과 기준이 뚜렷하니까. 우리 다 중덕사에서 어울리며 잘 살고 있잖아. 여러 가지로 좋은 사례야.
 
김 작년에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논란이 있었잖아요. 보수적인 신자들이 단체도 만들면서 신부님들이나 종교가 사회문제에 왜 개입 하느냐 공격하기도 하고 강우일 주교께서 경향잡지에서 일갈해버리셨잖아요. 주교회의 의장 명의로요. 신부님 생각은 어떠셔요? 사회문제에 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문: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고 사회적인 일이잖아. 그것을 딱 갈라놓고 이야기 할 이유가 없는 거야. 전통적으로, 성서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너무 간단한 일이야. 누가 억압받는 사람이고, 누가 가난한 사람이야? 누가 빼앗기는 사람이고, 누가 탄압받는 사람이야? 그런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회참여야?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거야? 그렇게 표현할 필요가 없지. 누구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지역이든 거기에 빼앗기고 쫓겨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겠다, 이게 복음적인거야. 이 복음적인 삶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은 그냥 하기 싫다는 말하고 똑같은 거야. “나는 하기 싫은 일인데 너는 왜 하느냐? 네가 가면 나도 안 갈 수 없지 않느냐?, 나는 가기 싫다” 이런 명확한 말을 돌려서 다르게 표현하는 것뿐이야. 용산참사를 봐. ‘6명이 불에 타 죽었다. 공권력이 무리하게 진압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잖아. 그렇게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에 무슨 조건이 필요해. 예수님께서 즉시 물으시잖아. “누가 너의 이웃이냐?”고 말이야.
 
김: 그러네요. 사회 참여니, 개입이니 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억지군요. 너무나 당연한 일을 가지고 말이지요.
문: 그렇지. 배고픈 사람에게 쌀을 주는 것이 죄야? 북한 동포들 상황이 이리도 힘든데 남아도는 쌀 보내주자는 것도 좌익이래. 공안당국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신자들이 그런 소리를 해. 이런 모습들이 교회를 망치는 일이지, 교회의 원래 소임을 저버리는 일이란 말이야. 이런 이야기 가슴 터놓고 말 할 수 있어야 해.
 
김: 신부님 말씀 들으니까 정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또는 종교가 세상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시죠?
문: 그것이 복음적으로 사는 것이야.
 
김: 그렇죠.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여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복음적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1975년 인혁당 사건, 그 억울한 여덟 명의 사형집행 앞에서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나섰어. 그랬더니 정치활동이라는 거야. 억울하게 남편 죽고, 아버지 빼앗기고, 고통당하고, 고문당하고,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고문 받았잖아. 내가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까지 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정치적인 색깔을 덧씌워서 나보고 그 사람들 곁에 가지 못하게 했어. 그건 악마나 하는 짓이잖아.
 
김: 신부님 말씀대로라면 그런 일을 하실 때 위축될 이유가 없으시겠어요. 신부님의 명동성당 기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명동에서 사제단 신부님들이 4대강사업 반대 생명평화기도회를 하실 때, 명동성당 사목회 일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신부님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행패를 부렸던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명동기도를 시작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보수화되고, 권력화 되어 가는 우리 교회의 반성과 회개를 바라신 기도였잖아요. 그 기도로 신부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셨고요. 신부님의 삶을 천주교 안에만 국한지어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신부님은 기본적으로 종교인, 신앙인이시잖아요. 또 원래 가톨릭 집안이셨죠?
문: 신앙심은 아버지, 어머니께서 내게 심어주신 거지, 아주 독실하셨어. 나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만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하느님을 찾게 되고, 사제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
 
김: 그런데 인혁당사건 때부터 오늘까지 억울하게 당하고 말도 못하게 처참하고 참혹한 현실들을 마주하면서 사셨잖아요. 그런 순간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무심하셔도 되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으세요. 신앙인으로서의 갈등 같은 것들이 있으시지는 않으셨나요?
문: 왜 없었겠어? 젊은 시절에는 고민 많이 했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나가는데 세상은 무관심 한 거야. 혼자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데 다 못들은 척하고, 심지어는 동료 사제들까지도 말이야. 선배 신부님들이 묻혀있는 성직자 묘지에 가서 술 마시고 혼자 펑펑 울기도 많이 했어.
 
김: 언제요? 신부님 젊으셨을 때요?
문: 응. 젊었을 때는 갈등도 많았어. 뭘 하려고 하면 혼자 걸어가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것을 여럿이 함께 가려 하지 않고 너무 혼자 앞서간다고 비판하는 거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말이야. 무슨 성명서 한 장을 발표하려고 해도 단어가 어떻고, 표현이 어떻고. 무슨 기념비적인 글을 남기겠다고 말이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문장력 없는 사람들은 성명서도 못 쓰는 거야? 그런 꼴을 보면 속이 상해서 확 뒤집어 버리곤 했지. 그러면 나는 또 혼자가 되고 말이야. 지금 당장 시급한 일들이 있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뒤로만 물러서는 사람들을 볼 때면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 따지고 보면 뭐 내가 하느님을 만나보기를 했어, 음성을 직접 들어보기를 했어. 어떤 때는 ‘아 이것이 그 분의 뜻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가도, 어떤 때는 ‘하느님은 지금 저 위에서 뭐 하시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 사실 내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들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뭐 가보면 알겠지.
 
김: 어딜 가보면 알아요?
문: 죽어봐야 안다고. 죽어보면 알겠지.
 
김: 그래도 사제로서 삼위일체나 예수님의 부활 같은 기본적인 교리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계신 것이지요?
문: 그건 몸에 배어있는 거야. 하나의 씨앗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부활 신앙이야.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죽으면 다 똑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김: 신부님께서는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요?
문: 아니, 요즘에는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세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 돼.
 
김: 지금까지 하신 일이 모자라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에요?
문: 그렇지.
 
김: 고상하게 말해서 ‘길 위의 신부’지, ‘깡패 신부’, ‘좌파 신부’란 이야기를 들으시며 사셨는데도 모자라다고 생각하셔요?
문: 우리 사제들은 미사하다 죽으면 순직이라고 하잖아.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는 건데, 아마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모자라다고 생각되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후회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주저하기도 하고, 힘을 아끼려고 할 때도 있었지. 그러고 나면 꼭 후유증이 생겨.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야.
 
김: 그러면 지금까지 활동하시면서 가장 아쉬운 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머뭇거렸다거나 부족했다고 생각하시는 일이 하나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문: 대추리…
 
김: 역시 그러셨군요. 신부님께는 정말 대추리 싸움이 크게 남으셨나 봐요.
문 대추리 행정대집행 때, ‘여명의 황새울 작전’ 말이야. 그것이 집행이 되고 나서 내가 대추분교 지붕위에서 내 발로 걸어 내려온 것이 가장 아쉬워. 그때 어찌어찌해서 내려가자는 분위기에 밀려 내려왔는데. 내려오면서도 ‘이거 아닌데, 이거 아닌데’ 했어. 행정대집행이 끝난 다음에 주민들이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거든. 그 이후로 주민대표들이 몇 번씩이나 우리집에 왔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는 거야.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오두희한테 주민대표들을 불러서 마을 밖으로 가자고 해서 대추리 지나서 있는 둔포 시내로 나갔어. 그날 술 정말 많이 마셨어. 주민대표들도 울고, 나도 울고. 마을주민들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다면서 말이야. 그렇게 대추리를 떠나고 마음이 계속 편치 않았어.
 
김: 다 끝난 후에 돌아오는 그런 상념들은 모두 온전히 신부님의 몫이잖아요. 누가 덜어주거나 대신 해 줄 수 없는 신부님 몫이요. 많이 힘 드셨겠어요?
문: 그러게 대추리 떠나고 나서는 참 힘들었어.
 
김: 지난 40여 년 동안 참 많은 일을 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잖아요. 피해자들, 유족들, 가난한 사람들, 또 동지들까지요. 그 분들 중 누가 가장 소중한 인연이세요?
문: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문규현 신부지. 문규현 신부가 없었으면 이렇게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지도 몰라.
 
김: 용산참사 때 단식기도하시다가 문규현 신부님 쓰러지셨을 때 정말 깜짝 놀라셨겠어요?
문: 단식기도를 하면서도 문규현 신부가 지방으로 강연을 다니고, 무리하게 일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막 화를 냈었거든. 한 가지만 하라고 말이야. 그러다가 일이 생긴 거지. 새벽에 전종훈 신부에게 전화가 왔는데 말을 이어가질 못하더라고. ‘아 내 동생이 죽는구나’ 했어, 그때.
 
김: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드셨겠어요.
문: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통곡을 하면서 올라갔지. ‘내가 문규현 신부 장례를 치러야하는 건가?’하면서 말이야. 병원에 가서 의사들을 보니 표정이 심상치가 않은 거야. 중환자실에 들어갔어. 그때는 깨어나더라도 어딘가 크게 고장이 나겠구나 싶었어. 며칠 지나서 문규현 신분가 눈을 처음 뜰 때, 내가 옆에 있었거든. 그때 정말 기뻤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어. 문규현 신부가 날 보고는 깜짝 놀라더라고.
 
김: 그때는 저도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 제가 용산참사 관련해서 어디 기고를 했는데 ‘문규현 신부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걸고 이명박에게 복수할 것이다’라고 썼더라고요. 저도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두 분이 나이차이가 좀 나시잖아요. 유년 시절에도 그렇게 가까우셨어요?
문: 어렸을 때는 오히려 가깝게 있었던 적이 얼마 없지. 나는 일찌감치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문규현 신부는 신학교에 조금 늦게 들어왔어. 그러니까 같이 학교생활을 해 본 적이 없잖아. 그래서 문규현 신부의 성장 과정은 솔직히 잘 모르지. 내가 그 친구 사제서품날에도 못 갔어. 감옥에 있었잖아.
 
김: 아! 문규현 신부님 사제 서품식을 못 보셨어요?
문: 서품식을 못 봤어. 문규현 신부가 5월에 신부가 되었고 내 여동생은 6월말에 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했어. 그런데 두 곳에 다 못 갔어. 성직자로서, 형으로서, 오빠로서 동생의 사제서품식에 못 간다는 것, 누이의 종신 서원식에 못 간다는 것이 그때는 너무 서럽고 힘들었어. 내가 감옥에 가고 아무도 면회를 못하게 했었는데 문규현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다음날 날 찾아 면회를 왔어. 첫 가족면회였지. 사제로서의 첫 강복을 내게 주려고 왔지. 정말 감격이었어. 이제 동지구나, 신앙의 동지.
 
김: 그런데 두 분이 동지신건 확실한데, 두 분이 또 많이 다르시죠?
문: 어, 많이 다르지.
 
김: 두 분 다 아는 사람들은 너무너무 서로 아끼시고 그러는 거 알지만, 예를 들면 운동하시는 방식이나 성격도 다르신 것 같고, 물론 똑같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두 분 모두 욱하시면 비슷하시잖아요.
문: 닮은 점이 더 많아. 목소리도 많이 닮았고. 문규현 신부 집에서 내가 전화 받으면 100% 문규현 신부인 줄 알아.
 
김: 하하, 앞으로도 문규현 신부님과 함께 걸어가시길 바라시죠?
문: 이제 문규현 신부도 원로사제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있는데. 그 친구가 끝까지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지. 그 사람이랑 나는 말없이 통 하는 일이 많아. 이신전심이지.
 
김: 그럼 평화바람과 오두희씨는 신부님께 어떤 존재에요?
문: 난 평화바람 식구들이 모일 때 참석을 잘 안 해. 식구들이 회의하고 토론한 결과를 듣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이 좋아. 여기 오는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냐. 내가 밥상에 앉아서 강정이야기 하면서, 혼자 ‘끙끙’대고 그러니까. 오두희가 “신부님 한 번 다녀오세요.” 그러는 거야. 바로 강정에 다녀왔지. 다녀와서 또 내가 ‘궁시렁궁시렁’ 하니까 “신부님, 강정에 들어가 사실래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고 싶다고 했어. 당장 들어가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강정에 오게 된 거야. 식구들끼리 많이 싸우기도 하고 내가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서로 믿음이 있으니까 괜찮아. 평화바람 대표를 문정현으로 알고들 있겠지만 사실은 오두희가 내 배후야. 허허허
 
김: 오두희씨와 평화바람을 신뢰하세요?
문: 그럼. 신뢰하지. 물론 잘못될 수도 있겠지만, 신뢰하니까. 이제는 내가 앞서서 일을 저지르고 치고 나가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오두희와 평화바람 식구들이 하자고 하는 일, 만들어 주는 일에 충실하고 싶어. 평화바람 식구들이 하고 싶은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김:1974년에 사제단이 만들어지고 35년이 넘었잖아요. 그동안 사제단이 천주교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데요. 그만큼 우리 사회 안에서 사제단은 존중과 신뢰를 받고 있죠. 그런데 사제단의 운동 방향이나 신부님들의 활동 방식에 대한 비판도 있잖아요.
문: 사제단은 사제들의 모임이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사제들의 생각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사제단도 상처가 많아. 사제단과 함께 하는 사람들인 척하고 사제단을 이용한 사람들도 많았고 동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변절하는 것을 목격한 적도 많고 말이야. 박정희 때부터 이름한번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한 길만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제단이 독보적이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물론 아쉬운 점도 있지. 예를 들면 용산에서 내가 처음 미사를 시작한 게 3월 28일인데 처음에 시작할 때 허허벌판이었고 아무도 없었어. 그때 달려와 준 사람들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천주교 사회단체 사람들이었지. 신부님들은 그 후에 왔지. 그 신자들이 할 수 있게 해 준거야. 나야 그 사람들하고 다 통하고 마음을 아니까 존중하고 감사하지. 그런 걸 아직 모르는 사제들도 있을 수 있잖아, 사제들이라고 다 똑같을 수만은 없으니까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김: 다시 강정 얘기인데요, 신부님은 여기, 강정을 지키셔야하고, 이기셔야 하잖아요. 싸움이 계속 되는 한, 신부님 스스로 강정을 떠나시진 않으실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 싸움이 또 짧지 않을 것 같은데요?
문: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이 강정싸움과 비슷한 경험들이 있지 않아?
 
김: 대추리랑 비슷하죠? 다른 점도 있겠지만…
문: 그렇지. 사람들도 다르고. 또 육지하고 섬이라는 것도 다르고. 그런데 여기서는 이긴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대추리에서 살 때의 마음가짐이면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주민들을 보면 그런 확신이 들어.
 
김: 저희 모두 마음 아픈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부안 핵 폐기장 막아낼 때, 두 문 신부님을 필두로 주민들과 시민사회가 열심히 힘을 합쳐서 이겨냈잖아요. 어렵게 이겨본 경험이라 참 기억에 남는 싸움인데요. 결국은 핵 폐기장이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고 핵 폐기장 자체가 백지화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쉬움이 분명히 있죠. 부안에는 핵 폐기장이 건립하면 안 되고 경주는 괜찮고 그런 건 절대 아니잖아요. 지금 제주에서도 화순, 위미를 거쳐서 강정에 해군기지가 왔어요. 우리가 열심히 싸워서 강정에 해군기지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고 쳐요. 그런데 제주도 반대편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하면 어쩌죠? 제주가 아니라 다른 해변에 건설하겠다고 할 때는 어쩌고요? 강정에서 막는다고 해군기지 자체를 백지화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문: 해군기지 사업도 새만금처럼 국책사업이라잖아. 해군기지가 백지화 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거야. 그러니까 더욱 여기를 막아야 해. 일단 강정을 막고, 그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지. 부안에서 경주 가는 꼴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이놈의 전쟁기지 만드는 일은 막아야지. 이거는 어디에 만들어도 문제가 되는 거니까. 군사기지를 거부하는 것은 아까 말한 것처럼 성서적인 이유, 복음적인 이유니까.
 
김: 신부님 마지막으로요. 많은 분들이 강정에 올 마음은 있는데, 시간과 용기가 없어서 못 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하루하루 사느라고 여유가 없는 분들은 강정싸움에 어떻게 마음을 보탤 수 있을까요?
문: 아 그런 분들을 위해서 평화상단을 꾸렸잖아. 투쟁 기금을 버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하면 내가 주말에라도 뭍에 있는 본당에 가서 강론이라도 하면서 강정마을을 돕기 위해 이런 것들을 팝니다. 그러면 좀 팔리지 않겠어?
 
김: 그럼, 젓갈 열심히 사서 먹고 선물하고 그러면 되는 거죠?
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잣대로 잴 수 있겠어. 다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지. 다만 여유가 되면 강정마을 구럼비 해변에 한 번씩만 다녀가면 좋겠어. 여길 다녀가면 왜 해군기지는 안 되는지, 여기를 왜 지켜야하는지 알게 될 테니까.
 
김: 참, 이번에 ‘길위의 신부 문정현-다시 길을 떠나다’라는 책은 직접 쓰신 책이에요?
문: 아니,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란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김중미라고 있어. 그 이가 작년에 한겨레에 내 구술을 받아서 ‘길 위의 신부’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했었는데, 그걸 토대로 책을 다시 써서 출간했어. 오래된 일들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오두희가 구술하는 걸 많이 도와줬지. 딸기가 녹취도 풀어주고.
 
김: 공동선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문: 사회의 시선과 관심은 항상 가장 아픈 곳에 쏠려야 된다고 생각해. 우리 몸도 그렇잖아. 나도 지금 발가락 하나가 많이 아파, 그러니까 가만히 있을 때는 온 신경이 여기로 몰리거든. 참여와 연대. 이렇게 아픈 곳에 함께 하는 것, 아픈 곳이 치유 되었을 때 또 함께 기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해.
 
김: 알겠습니다. 희망상단 젓갈 좀 맛있게 잘 만들어주십시오.
문: 서울 가거든 평화비행기랑 구럼비 축제 준비 좀 잘 해줘. 제주에서도 한판 크게 벌여봐.
 
문정현 신부와 대담을 마친 일주일 후인, 해방 66주년 광복절에 서울과 경기에서 500여명의 경찰병력과 물대포, 방송차, 진압장비 등이 배를 타고 제주항에 입도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강정마을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국회와 도의회 등에서 반발하자, 일단은 큰 물리적 충돌 없이 공권력 투입은 잠정 미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주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경찰과 용역들이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올레길 7코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강정마을 구럼비 해변에서는 9월 3일(토) 올레길 7코스 걷기 행사와 평화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함께 하기 위해 서울에서는 평화의 비행기가 뜬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정마을 구럼비 해변으로 향하는 순례행렬은 점점 길어지고, 혼탁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온 ‘길 위의 예수’ 문정현 신부의 얼굴은 점점 검게 그을리고 있다.
 
공동선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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