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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10
    축! 조선일보 개장!
    순수
  2. 2004/08/07
    多多
    순수
  3. 2004/08/07
    트랙백
    순수
  4. 2004/08/05
    토론과 합의 과정이 없다?(2)
    순수
  5. 2004/08/04
    내부 비판의 부재(2)
    순수
  6. 2004/08/03
    인터넷 자본(10)
    순수
  7. 2004/08/03
    Blog???(1)
    순수
  8. 2004/08/03
    룰루랄라 블로그 시작!
    순수

축! 조선일보 개장!

"조선일보 내 기사에 대한 트랙백을 작성할 수 있는데 "엮인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블로그의 회원만 폐쇄적으로 사용할 수가 있게 해놨습니다."
장하다 조선! 조선 만세!
솔직히 좌우건 보수건 진보건 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그저 열려 있어라. 나는 트랙백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열린 공간을 닫힌 공간으로 재영토화하는 조선에 대해 10초간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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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多

"준비도 없이 후다닥 썼던 글을 괜히 올렸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블로그의 개방성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글을 올리면 안 되는 건데.."
저는 NeoScrum님이 "무책임하게"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는 게 있고, 그게 지금 확립됐든 안 됐든 ─ 저는 오히려 모든 것이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ㅎㅎㅎ ─ 상관 없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트랙백과 덧글, 아니면 어딘가에서의 새로운 글이 차고 넘치길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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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트랙백을 보면 너무나 아름답다.
덧글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지만(그래서 phpBB와 같은 포럼 시스템을 좋아한다), 트랙백에 의해 시각적으로도 다양함을 누릴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그래서 블로그를 더 좋아한다)
최근 두가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 사실 그것도 둘 다 트랙백이다 ─ 다처에서 벌어지는 이 두가지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그냥 관련글을 찾아서 트랙백을 타면 된다. 웹서핑~ 서핑 유에스........켈록...
의외로 너무나도 차분하게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의외라서 재밌었다. 역시 열린 공간에서 소통은 항상-이미 이뤄진다는 것인가. (소위 폐쇄적인 운동권에서는 "소통"이 항상 관건이다. 왜? 평소에 불가능하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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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합의 과정이 없다?

일단, 위험하게 텍스트를 읽는 것 같아서 먼저 전의 글에서 썼던 부분을 다시 쓰도록하겠다.
"우리는 내/외부를 가르고 외부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내부 비판에는 너무나도 인색하다."

"pure님의 문제 인식을 다시 '거칠게' 요약한다면, "우리는 내부 비판에 소홀하지 않은가?"와 "연대를 위해서는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라는 두 가지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진정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중의 하나는, pure님의 글은 내/외부의 '편가르기'와 그 편가르기에 따른 종파적인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그렇다면 내부인 '우리'는 어떻게 '외부'로 진출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더더욱 종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도대체 내부는 누구고 외부는 누군가?"
글을 너무 손쉽게 파악하려 할 경우 이런 오해로 치닫게 된다. 내부 비판에 소흘하다는 문제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로 내/외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분법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 구분에 의해 내부라고 인지하는 곳에는 관대함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외부를 유지할 경우 "내부가 외부로 진출"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부-외부 접속을 "연대"로 오해하게 된다. "노동자/민중은 특별한 계층으로 대중과 분리된 채 홀로 투쟁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집단인가?"라고 지적한 것은 무엇인가? 노동자/민중이란 개념은 홀로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후자의 경우라면, 계속 말하다시피, 도대체 그 '기본적인 것', '감수성', '상식' 등에 맞는 패러디 대상은 따로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에 우리를 맞춰 '운동'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부시"나 "노무현"과 같이 비판의 대상을 패러디하는 것과, 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을 패러디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둘 수 있는가?"라고 이미 나의 견해를 밝혔다. 또한, 여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미 토론은 시작됐다."라고 이야기했다. DC가 됐건 블로그들이 됐건 그 글들을 단순한 "욕"으로 파악하는 것인가? 노동자들이 내뱉는 것은 "욕"이 아니고? 바른 말 고운 말을 쓸 때만 상대를 하겠다는 것인가? 분명히 참수 패러디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pure님은 이것이 탄압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일단 쌍욕부터 지르고 보는,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으로 경향성을 보이는 지금의 상황을 '탄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네티즌들의 그런 토론과 합의과정이 없는 맹목적이며 집단적인 분노는 재작년의 이화여대 총학 사이트 사이버 테러 등의 물의를 빚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의 상황이 그런 상황까지 가리가고 보는 것은 오바이겠지만, 나는 그러한 '경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탄압"의 범주를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대총학사이버테러"가 "탄압"인가? 이것은 명백히 "사이버테러"인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해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등등의 문제를 분석해야 한다. 그저 이것을 "탄압"으로 환원할 경우 우리는 제대로 된 분석과 대응이 불가능하다. 이대사이트가 사이버테러를 당할 때 "탄압 반대!"라고 피케팅이라도 할 것인가? 말 그대로 "테러"는 "테러"인 것이다. 이게 단순히 네티즌들의 "토론과 합의 과정 없는 맹목적이며 집단적인 분노"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분노를 하기 위해서는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인가? 또한 분노를 위한 토론과 합의 과정은 무엇인가? 개인들의 의견들이 ─ 그것이 욕이든 뭐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고상한 엘리트의 잔치를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 인터넷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모이고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미 토론은 시작됐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토론과 합의 과정 없는"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맹목적이며 집단적인 분노"는 이미 시작된 토론과 합의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서 없어질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토론과 합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거기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물론 나 자신도 그 패러디를 보고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바로 그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 이 패러디를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귀족노조 어쩌구 하는 건 짬밥이 있으니 쉽게 반론할 수 있다. 과연 참수 패러디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러나 그것이, 주지하듯이, 내가 그 패러디를 '억압'하거나 '탄압'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아무도 그 패러디를 "억압"하거나 "탄압"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을 비난하건, 비판하건, 물리적이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것이다. DC인사이드 게시판에 수많은 덧글이 달린 것도 탄압인가? 까놓고 말해서 LG정유노조측은 그것을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 사안이 뉴스로 옮겨간 후, 사측이나 정부에서 이것을 악용할 경우일 뿐이다. 실제로 그러고 있다면 이야기를 하라. 아니, 그 이전에 이것을 사측이나 정부에서 정확히 어떻게 악용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도 궁금하긴 하다.
"일단 발끈해서 쌍욕부터 하고 보는 건 토론과 합의 과정이 결코 아니다!"
일단 발끈해서 쌍욕부터 하고 보는 것도 바로 토론 과정의 하나다. 공장에서 좆 같은 작업 환경에 대해 "씨발 못 해 먹겠네"라고 하는 것도 토론 과정의 하나다. 엘리트들이 격식을 맞춰서 이야기하는 것만이 토론인가? 초기 의견이나 반응은 당연히 즉흥적일 수 있고 정리되지 않을 수 있고, 틀렸다고 생각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토론과 합의 과정이 결코 아니"라고 묵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영문인가?
"나는 '故 박정희 씨'의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를 그 가족들이 봤을 때의 감정이나 부시가 난자당하는 패러디를 그 가족들이 봤을 때의 감정과, 이번 패러디를 유가족들이 봤을 때의 감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부시"나 "노무현"과 같이 비판의 대상을 패러디하는 것과, 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을 패러디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둘 수 있는가?"라고 일차적으로 이야기를 했고, 이번에는 좀 더 나아가자. 사실 이들 패러디를 봤을 때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맞다. 부시를 난자하는 것은 패러디 수준이 아니라, 변태적이다. 부시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부시)을 난자한 것을 어찌 그냥 볼 수 있겠는가? 부시를 난자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부시가 뚝뚝 피를 흘리는 것은 참으로 은혜롭고 감미로운 일인가?
"누군가가 故 전태일 열사를 패러디한다면 나는 물론 기분이 나쁘고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대뜸 욕부터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대뜸 욕부터 할 수도 있다. 왜 할 수 없는가? 교양인이라서? 물론, 그 후에 "왜 욕부터 하느냐?"라고 반문을 하면 된다. "왜 욕하고 지랄이냐?" "전태일을 그딴 식으로 패러디한 게 맘에 안 든다." "왜 맘에 안 드냐?" "어쩌구 저쩌구..." 이게 바로 토론과 합의 과정이다. 이것을 무시하지 마라. "이건 욕이고 개소리니까 안 들을 꺼야."라고 하는데 토론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논리에 따르면 인텔리 몇명 모여서 자기들이 그럴싸한 지식놀이하면 토론과 합의가 끝나는 거 아닌가? 또한, 도대체 패러디에 대한 토론과 합의는 언제쯤 시작하고 이뤄지는 것인가? 이미-항상 토론 중이란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면 인권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연대하려면 갖추어야 할 상식인 것이다."
이미 전의 글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옮겼다. "감수성"으로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면 두번째 문장에서 이야기한 "인권" 문제로 이해하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라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무도 이것으로 "탄압"을 하거나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다. 단지, 상식적인 사회를 바라는 ─ 사실 이런 게 좌파다. 정치경제학적 상식으로 보니 "잉여가치"란 게 존재하니 그것의 원인인 "사유재산"이나 "임금노동"에 대해 고민하는 것 아닌가? ─ 사람이라면, 그 삶 속에서 그 상식을 이야기하라.
"감수성이 지나치다보면, 한 쪽 눈을 가리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다. 감수성이 부족하다 보면, 한 쪽 눈을 가리고 세상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는? 참수 패러디라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 & 그에 대한 철저한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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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비판의 부재

"LG정유 노조원들이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연봉 몇천을 받는데도 파업을 하는 것에 대한 증오인가?"
사실, 까놓고 말해서 연봉을 수억을 받는데도 파업을 한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 이미 "귀족노조" 운운하는 거는 써먹은지 오래 아닌가? 정확히 보자. 사람들이 갑자기 다시 귀족노조란 말을 꺼내게 된 것에는 바로 "참수 패러디"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분명히 귀족노조라든가 연봉이 메인이 아니라, 문제의 사진이 바로 메인 테마다. 자본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 등을 생각하는데, 왜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난 곁가지들에만 치중하는가? 귀족노조 운운하는 것은 여태까지 짬밥이 있었으니까 그 논리로 사람들을 설명하면 되겠지만 (설마 아직도 여기에 대응 못 하는가?) 문제는 역시 참수 패러디 부분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도대체 어디까지가 '패러디'의 대상인가?"
물론 여기에 어떤 강제력을 가진 "기준"이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스스로 행동하기에 앞서 생각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은 특별한 계층으로 대중과 분리된 채 홀로 투쟁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집단인가? 오히려 "우리는 모두 노동자"라고 말하면서 "Unite the Human Race"라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부시"나 "노무현"과 같이 비판의 대상을 패러디하는 것과, 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을 패러디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둘 수 있는가? 이것은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면 인권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연대하려면 갖추어야 할 상식인 것이다. 윤금희씨 시신을 공개적으로 내걸 것인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가 되고 있는 게 바로 현재의 상황이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정말 당파성에 의존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뿐이다. (참수 패러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전태일 분신을 패러디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패러디한 것 자체를 권력에 의해 봉쇄하거나 타도하거나 그런 것은 지적한대로 "파시즘"이 맞다. 그러나 인권, 연대 등을 말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감수성을 갖추길 바란다. "가대위 방문 및 조합원 장기자랑1" 게시물은 아무 말도 없이 슬그머니 게시판에서 자취를 감추고 ─ 공지사항에 이 게시물 및 사진을 삭제한 것에 대해 어떤 설명이나 해명, 사과 등이 존재하는가? ─ 또한 목적을 위해 수단에 대해 변명하는 것, 이런 것들도 명백한 "파시즘"이다.
"나는 당신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견해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 볼테르
지금 이것은 "견해"의 문제가 아니다. LG정유노조의 파업에 대한 견해 때문이 아니라, 참수 패러디라는 행위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그 누구도 이것으로 "탄압" 받고 있지 않다. 정부에서 이것을 사법처리하겠다고 하는가? 블로그라는 개인들의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모이는 게 바로 "토론과 합의 과정"이다. 먼저 앞서나가서 "아직 아무 토론과 합의도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이미 토론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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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본

"또한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민중진영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와 역량 배치가 필수적이다."
"혹시나 이제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블로그나 개인 미니 홈피가 무엇인지 궁금하거들랑 상업적인 서비스에 낼름 가입할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이 함께 구축한 진보넷 등이 서비스하고 있는 블로그나 홈피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좀 더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으로 보자. 글의 앞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본이 '인간들간의 소통'을 상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시장"과 "상품"이 사실 "자본" 이전에 중요한 포인트라고 보고, 이것이 기반이 될 때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본론』 맨 처음 상품 분석 직전에 하는 말을 보라.) 여기서 문제는 진보진영에서 구축한 블로그 서비스는 과연 "非상품"인가라는 게 될 것 같다.
사실 이런 이야기 이전에 전제가 되야 할 부분은 역시 사이버 공간에 대한 담론이다. 단순히 맑스가 분석한 생산에 기초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생산에 적용하기 너무나 어려운 부분이 많다. 사이버 이전에도 잉여가치를 쉽사리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 단순히 생산력에 의존해서 평균시간을 도출해서 계산하려 한다면 진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착취가 간과된다 ─ 사이버 이후에는 잉여가치라는 것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을 사이버 공간으로 착각하는 오류는 범치 않았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조금 확장을 한다면, 탈산업사회에도 분명히 산업사회의 요소들이 잔재해 있고, 그 경계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탈산업이라는 요소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맹아적 태도로 흐를 수 있다. ( 모던, 포스트모던 이야기로 확대해서 생각해 봐도 좋다. )
결국, 이 글에서 가질 수 있는 "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경제학적인 의미보다는 "계급(Class)"적인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그것도 맑스의 생산 분석으로 파악하기 난해한 상황에서 ─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자들처럼 교환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삽질이 가중될 뿐이다 ─ 계급이라는 관념은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까? 사이버 공간도 물적토대(서버, 라우터, 인터넷 회선 등?)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애매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통신시스템과 인터넷의 사유화를 반대하고 공공화하는 투쟁부터 시작하자."
사실 이래저래 헛소리가 길었는데 이 이야기에 다시 주목했으면 한다. 어디까지가 "사유화"인가? 국가와 거대 자본의 감시와 검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진보넷"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http://hosting.jinbo.net/guide/service.html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이 확실한 "非상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 자본을 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진보 내지는 저항 까지도 손쉽게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현대의 자본주의다. 이미 아도르노는 예술의 상품화를 지적한 적이 있다. 우리도 또한 이것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진영"에 의해서 이런 것을 쉽게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란 문제이다. 자, 진보넷 블로그는 얼마나 공적(public)인가?
 
P.S. 사실 진보넷 블로그의 탄생은 매우 기쁘다. 기존의 포털에서 운영하던 블로그에 강한 반발심을 느껴 블로그 없이 떠돌다가 이번에 진보넷에서 블로그가 생겼다고 해서 바로 개설하게 되었다. 어떤 새로운 희망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기쁘지만, "자본"을 너무 손쉽게 생각해서 "진영"에 의해 긍정하는 것은 좀 까다롭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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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blog = web + log
서로 글을 쓰고 읽으며 놀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즐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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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랄라 블로그 시작!

진보넷에 블로그가 생겼네?
여러분 방가요~
오른쪽 아래에 XML 보이죠?
RSS Reader가 됐건 뭐가 됐건
아무거나 펌질해서 많이 보세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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