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점거파업 이후 510일 간
이랜드그룹의 성령충만한 돈지랄에 맞서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던
옛 홈에버, 그러니까 현 홈플러스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맞습니다, <외박>.ㅋ
이 <외박>과 한 세트(우소꿈까지 포함하면 3종세트ㅋ)로, 곧 있을 외박데이를 시작으로
이후 계속될 공동체상영 때 함께 선보일 자료집의 편집이 진행중입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외박 외전>이란 이름으로 나올 텐데요.
아래는 이 외전의 편집위원으로 관여하면서 쓰게 된 글입니다.
다가오는 20일에 있을 외박데이 홍보도 할 겸ㅋ 한 번들 읽어보셨음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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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일까
들사람
편집위원,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준) 회원
1.
“(이젠) 직장에서 어디로 탈출하는 건가... 해고자의 탈출구는 어딘 거예요?”
이경옥씨(홈플러스 해고노동자, 전 홈플러스노조 부위원장)는 이렇게 반문한다. 생애 첫 ‘탈출구’였다던 결혼을 사뿐히 즈려밟고서, 이제야말로 탈출구다운 탈출구를 찾아나선 중이랬다. 소모품 취급과 삥뜯기 좀 그만하라 한 죄로 직장에서 ‘제발로 퇴사’를 당한 지 이제 1년여. 그녀에겐 이제 ‘직장’도 탈출구가 아니다. 이 말엔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때 직장을 그 자체 출구로만 알던 자신은 이제 죽고 없다는 뜻인 동시에, 설사 실현된들 ‘복직’ 또는 새 직장이 과연 해답의 전부일 수 있겠느냐는 뜻이라서다.
김소연씨(기륭전자 해고노동자, 기륭노조 분회장)가 함께 해고당한 노동자들과 가산동에서 벌였던 싸움도, 따지고 보면 이런 질문과 맞닿아 있다. 2007년 여름 당시 이랜드일반노조의 상암동 집중 외박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꽤 전부터였다. “솔직히 기륭 아니면 내가 갈 데 없겠”냐면서도, 기륭전자의 글로벌 노무관리 구상에 맞서 그토록 오랜 시간 싸운 이유? 별로 복잡한 게 아녔다. “문제는 (어딜) 가도 똑같고”, 그래서 “누구든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서였다(물론, 그 누구 중 꽤나 상당수는 똑같은 이유로 각자 선 자리에서나마 이들을 응원·지지하진 못할 망정, 심지어 ‘엄살’ 그만 떨라며 빈정대고 냉소하기 일쑤다). 여기엔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것이 너무 억울해서…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노”가 당연히 스며 있다. 집에만 가면 까부라지던 몸이 정작 ‘현장’에선 연대하는 이들과 웃고 떠드는 가운데 한결 가뿐해지곤 했던 것도, 집에선 이런 분노를 살아 있는 자기긍정의 근거로 도무지 곰삭여 낼 수 없어서였을 터(이때 누구든 꿈꾼다는 ‘즐거운 나의 집’이란, 누군가에겐 확실히 악몽을 부르는 음울한 유배지일 수 있다).
물론 과문해서 그렇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적극적인 자기긍정의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 분명 이들 둘만인 건 아니다. 실은 그래서다. 이들 목소리에 반갑고, 때론 설레이기까지 하던 맘이 이내 모종의 갑갑함으로 잔뜩 숨죽곤 하는 까닭 말이다.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처럼, 짝꿍 네마자데한테 꼭 있어야 할 공책이 실수로 그만 자기한테 있는 걸 알고서 그의 집을 찾아 나서지만, 어딘지 끝끝내 찾지 못하는 주인공 아마드의 심정도 어쩜 이런 거였을까. 네마자데가 있다는 데는 막상, 아마드가 찾던 네마자데의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 친구의 집은 어디냔 말이지!
뭐, 이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점거파업이나 투쟁 과정을 거치며 그/녀들 몸에서 돋아난 기쁨과 ‘새로운 시작’의 감각들은, 뭐랄까. 마치 각지에 흩어진 채로 있는 탐스런 드래곤볼 같다고 할까? 하나하나가 아무리 실하다 한들 결국 한 데 모여야 용트림의 장관도 가능할 텐데, 막상 그/녀들의 새로운 시작점들은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입체로 좀체 진전을 못하고 있다는 거다. 어쨌거나 갑갑한 건 마찬가지.
2.
외박이 “꿈만 같았”고 “꼭 소풍온 기분”이었다는 또다른 여성노동자의 경험담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점거파업이 의미심장한 사건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노동자들에게 크고 작은 자기긍정의 시공간, 바꿔 말해 ‘좋은 삶’에 관한 능동적인 자기표현의 계기를 형성해내기 때문이다. 지루했던 노동시간에 비하면야 비록 순간일지 몰라도 말이다. 이런 해방의 순간들을 어떻게 영원으로 지속시킬 것인가? (노동)운동은, 그 본질상, 이같은 근본적 물음을 마치 밤하늘을 짙게 물들인 은하수처럼 흩뿌리게 마련이다.
이러니, 이런 운동들이 당장 글로벌 CEO들이나 이들과 그야말로 자웅동체인 관료·의회엘리트들에게 달가울 리 만무하다. 그네들 스스로 한껏 들린 이 세계의 부와 번영, 발전을 부추기는 매혹적 선망과, 노동자들 대다수가 보편적으로 겪는 엄혹한 절망의 풍경들. 얼핏 무척 판이해 보이는 두 풍경이, 결국 같은 과정의 다른 측면일 뿐임을 곧잘, 자꾸만 뽀록내니 말이다. 만국의 CEO/관료엘리트들께옵서 노동자들의 자기긍정을 그들 스스로 영속화하려는 데 대해 ‘불법’ 타령 해가며 아예 씨를 말리려 하거나, 이게 녹록치 않을 경우에는 그토록 길들이려 노고를 아끼지 않는 게 다 그래서다. 전투경찰대와 구사대·용역깡패처럼 공·사 경계를 넘나들며 이뤄지는 물리적 폭력이야 당근이고 이를테면 용산참사의 당사자들을 “테러리스트”라며 구속한 것처럼, 끝없는 자본축적에만 최적화돼 있는 법률적·제도적·상징적 토대로 ‘구조적 폭력’까지 써먹어 가면서 말이다. 물론, 이경옥씨나 김소연씨 같은 ‘장삼이사’들의 자기긍정적 반란이 이미 보여줬다시피, 그런다고 그저 만국의 노동자들이 죄다 입닥치고 본분사수할 리도 만무하겠다마는.
그런데, 이런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움직임에 이렇듯 깃들어 있는 전복적 잠재력 탓일까. 특히나 외박 이후, 그/녀들이 점거파업 때 저마다 체화했던 자기긍정의 기억들은 되려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지금 그 생기를 현저히 잃은 듯싶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마치 잃어버린 시간 마냥, 되찾기마저 버거워진 채 방치 중인 건지도 모르겠다. 홈에버에서 홈플러스로 직장 간판 바뀌면서 노동조합 간판까지 내려간 건 아닌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홈플러스 삼성테스코. 몇 년 전 입이 떡 벌어질 ‘떡값’잔치로 정작 떡업계 종사자들의 대외이미지엔 떡실신 수준의 타격을 입히더니만 요즘엔 또 계열사 증시상장으로 다시 돈지랄 중이라는 ‘또 하나의 가족’ 이건희 패밀리의 공식명칭, 그렇다. 삼성그룹,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순백의 와이셔츠에 튄 빨간 김치국물보다 더 추악한 줄로 아는 바로 그 삼성그룹에서 분열증식한 주식회사 아닌가(지금이야, 갓 시작된 글로벌 공황으로 최근 조짐이 흉흉하다는 영국 테스코그룹의 지분이 훨씬 더 크다지만 말이다). 워낙에 이런 직장이니, 노조 꾸리면서 견뎌야 할 유무형의 압력과 고충이 오죽할까, 하고 지레 넘겨짚을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백 번 양보해 그렇겠다 쳐도, 조합원들의 현장복귀 이후 간간히 들리는 홈플러스 노조 소식을 접하고 나면 씁쓸하달까, 착잡한 맘까지 피하긴 힘들다. 그래도 비정규·불안정노동 의제를 공론화해 광범한 지지와 성원, 연대까지 이끌어냈던 노조다. 헌데, 웬걸. 비정규직 문제의 지속적 의제화가 필요하겠다는 목소리를 ‘콤플렉스’의 발로인 양 치부하거나, 현장에 돌아왔으니 이제는 장기파업으로 빚어졌던 업무상 공백을 메울 때라고도 했더라는 소식이 들린다. 아니, 왜 조합원들이 외박에 나섰는지 벌써 잊은 걸까? 홈에버 시절, 저마다 물심양면으로 삥뜯기고, 사실상 박성수가 진 빚까지 대신 갚아가며 겪어야 했던 실존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던 거 아닌가. 노동과정에서 늘상 잠재하는 이런 공백들을 힘겹더라도 계속 공론화는 못할 망정 이젠 업무상 공백을 메울 때라니. 한마디로 생뚱맞다. 2007년 여름 상암동 집단외박 사건에 지지를 보내고 나름대로 연대했던 인근 주민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이쯤 되면 정작 메워야 할 공백은 위원장의 머릿속 어디쯤 아니냐 해도 션찮다 싶을 정도다.
그/녀들이 돌아가야 할 데가 과연 ‘안정된 직장’이나 ‘즐거운 나의 집’이었을까? 글쎄, 적어도 이 두 곳이 자꾸 한 짝으로만 보이는 내게, 확실히 그건 아니지 싶다. 그러구 보면, 적극적 자기긍정의 시공간을 생성시킬 그런 일상으로의 귀환은 아직 시도조차 안 해본 셈이긴 하다. 다만,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가 그 근거를 기업한테다 붙박아 두는 한, 이런 귀환은 사실상 영구히 미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콕, 짚고 넘어가야겠다.
3.
운동들, 그 중에서도 노동운동이 위기라고들 한 지는 사실 꽤 오래다. 아무래도 중요한 건 그게 어떤 위기냐는 점이겠다. 그걸 뚜렷이 하기 위해서라도, 고뇌어림의 아우라로만 위기를 들먹이는 건 이제 좀 그만했음 좋겠다. 걔중에는 고 노무현씨가 우왕좌왕했다거나 2MB의 버그가 하도 심해 노동운동이 어렵다고, 이런 판에 ‘분열’은 곧 배신이라며 ‘단결’만이 살 길이라 핏대를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법, 기본 뼈대가 무척이나 닮았다. 뭐랑? 이른바 ‘샌드위치 위기’론이랑. 즉, (누가 그러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건만) 중국과 일본 등에 끼인 채 기업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아냐며,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여지는 일단 틀어막고 보려는 글로벌 CEO들의 쌍팔년도 가락이랑 빼닮아 있다는 거지. 어느 경우든, 노동하는 이들의 새로운 자기조직화가 곧 분열일 순 없겠다. 그런 만큼 위기는, 운동 바깥이 아닌 내부로부터, 그렇게 해서 확연히 바뀐 토대와 정세에 상응하는 실천적 도전들로는 뭐가 있겠는지 짚어가는 방식이라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기업조직의 본령이 애당초 고용이 아닌 이윤 창출이라는 사실도 이 과정에서 새삼 확인해야 할 급소겠다. 민주노총 자체가 분명 하나의 운동이었던 국면과는 크게 바뀐 현실적 조건상, 기존 민주노조들이 특정 기업이나 산업 전반에서 던지는 돌려막기식 고용의제에 더는 놀아나지 않을 수 있는지부터 점검·반추해야 할 때다 싶어 그렇다. “회사를 정말 먹여살리는 건 노동자들”이라는 이유로 이를테면 현대차나 삼성전자라는 사업장을 현대정씨나 삼성이씨 문중보다 굳이 더 사랑하지 않아도, 그렇게 글로벌 경쟁력과 선진화 구상 따위에 끄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그런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귀속감각’이란 어떤 것일지부터 얘기해보자는 거다. 그간 ‘현장’은, 이제 더는 직장일 수도 없고, 뭣보다 그래서도 안 되는 정세 속에 재정의가 불가피해진 셈이다.
그저 이윤밖엔 안 보이는 기업적 합리성에 코꿰이지 않을 ‘좋은 삶’을 우리는, 혹은 대규모사업장 노조에선 그럼 얼마나 장려해왔을까? 기업 논리와 삶의 논리가 충돌할 때 기업의 제거 따위 딱히 두려워할 게 없는, 그런 귀속감각 말이다. 어쨌거나 크고 또 길게 보면, 이런 감각이 고양·지속될 수 있는 조직 하나가, 헐리웃 액션만 능했지 막상 경쟁력 강화나 선진화 논리에는 조직편제상 몹시 취약한 대규모사업장 노조 조직 열보다 훨씬 더 소중하리라는 건 분명하겠다.
그럼 이러한 귀속감각을 북돋우고 살찌울 조직화란 어떤 것들이며,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자본의 사제들을 영원히 잠들게 할 시끌벅적한 반란과 이단의 문법은 어떻게 짜일 수 있을까? 이런 문법이 씨줄로, 자기긍정적 해방의 경험들은 날줄로 서로 엮일 때, 우리가 바라 마지 않을 정치, 다시 말해 ‘좋은 삶’들을 우리 스스로 꾸리고 지속하는 실천의 기예는 보다 더 촘촘하고 매혹적인 짜임새를 갖추는 것 아닐까? 이에 관한 제대로 된 토론과 전망 없이, 그간 해왔던 실천의 ‘진정성’이나 ‘단결’의 당위만 앞세우는 노동조합 강화론은 그 자체 악순환의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고 말 공산이 커 보인다. 그게 설령 산업별 노조 형태를 띠든, 하다하다 못해 “국민과 함께하는” 모양새를 띠든 말이다. 기본이니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별로 탐탁치 않은 것이, 결정적 2%가 부족하다. 기본/초심이라 불릴 만한 것들이 도출됐던 물적 토대와 조건부터가 바뀐 탓이다. 기본과 초심마저 사실 고정불변은 아니란 거지.
이런 상황에 (약하게는 심정적·우회적인 지지에서부터 강하게는 다종다양한 직접행동에 이르기까지) 적극 개입하지 않고서 좋은 삶을 바란다는 건 글쎄, 어떤 걸까? 겁주자는 소린 물론 아니고, 또 겁준대서 겁먹을 것 같지도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꽃단장한 괴물” 같은 시대의 지속에 본의 아니게 일조하겠노라는 다짐과 엇비슷해지지 않을라나?
그러니까 이건 당신과 나, 아마도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