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자원경제학과라는,
거듭 말하지만 단 한 번도 동의한 바 없는 '얄팍한' 간판으로
무난한(더 까놓고 말함 안이한) 변화를 꾀하느니
차라리 농업경제학과라는 기존 명칭을 유지하거나
'식량생태정책학부'로 틀거리를 아예 바꾸자는 제안을 했더랬다.
뭐, 결국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치고 말았지만..ㅋ;;
목소리를 내면서 새삼 느낀 건, 이 제안의 실현가능 여부를 떠나
이른바 박사급 교원들에게 한낱 학부 졸업생 얘긴
일단 접고 들어야 하거나 "자격요건" 미달인 모양이었더라는 거.
핵심이 과연(실은 고작ㅋ) 그런 건가 싶어도,
"분과학문적 훈육(disciplinary discipline)"을 아주 제대로 받아 그런지
그런 쭉정이 같은 요소가 훨씬 더 중요한가 보구나 싶더라.ㅋ
그렇다고 뭐 제대로된 출로 마련도 못하면서 말이다.
못 여는 뚜껑, 하여간 붙잡고선 끙끙댄달까.
***
접때 얘기에 이어, 이번엔 전공의 형식, 그리고 여기에 담아낼 토픽/주제에 관한 밑그림은 어떠해야 할지 얘기해볼까 합니다. 양 교수님께서 <통섭consilience> 개념을 얘기하신 바 있는데요, 난 김에 그럼 그 용어 번역하셨다는 최재천 샘 얘기를 실마리 삼아 풀어가보죠.
이야기 하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있다가 1년여 전이던가요,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가 듣기로, 저 통섭 개념이 시사하는 지적 비전을 실제로 구현해내는 데 ‘서울대-생명과학부’라는 틀은 아무래도 ‘낡은 부대’였던 모양이예요.
‘불필요하게’ 눈치 봐야할 것도 많거니와, ‘정통’ 생물학(또는 생명과학) 지식의 생산을 떠받쳐왔던 제도적 장치들이란 게, 당장 통섭에 바탕한 토픽이나 연구방법을 제대로 밀고나가는 덴 외려 걸림돌이 됐달까요.
이러다 보니, 최 샘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펼쳐볼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 ‘서울대-생명과학부-교수’란 명망있는 직함보다 더 중했던가 봅니다. 최 샘 같은 경우엔 다행히도 이런 바램이 그저 바램에 그치질 않았죠. 이화여대 측의 긍정적 반향 덕분에 학교를 옮길 수 있었으니까요. 해서, 지금과 같이 '에코과학부'라 불리는 '지적 프론티어'의 창설 및 운영에 관한 전권을 갖게 된 걸로 압니다.
이야기 두울. 작년인가,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란 책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왔더랬슴다. 물론, 최재천 샘이 쓴 거였죠. 줄거리는 대충 세 가닥으로 나눌 수 있슴다.
1) 여러 통계수치/추이를 종합해보건대, 2020년 쯤이면 한국이란 덴 피부양인구가 부양인구를 훌쩍 앞지르는 초고령화 상황에 들어설 거다.
2) 이리 되면 피부양인구의 삶의 질은 삶의 질대로 악화하고, 여기에 대처할 수 없도록 구축돼온 기존 사회시스템은 시스템대로 과부하에 따른 파열음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3) 이런지라,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곤 넋놓고 있다 막상 닥쳐서 허둥댄들 소용 없다. 전반적인 노령화 추세 자체야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시스템 붕괴’란 최악의 상황을 피하거나 적어도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라는 책제목은 바로 이같은 대비의 기본 비전을 하나의 명제로 압축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겝니다. 크게 50살 이전/이후의 삶을 나눠, 50살 이전의 삶 ‘안’에서 50살 이후의 삶이라는 ‘바깥’을 아울러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
개인적으로는 ‘인생 이모작’을 언감생심 내지 그림의 떡으로 만드는 건, 단작조차 버겁게끔 만드는 작금의 사회적 조건이건만, 이 부분에 대한 얘기가 넘 나이브하다 싶었습니다.
뭐, ‘또 하나의 가족’ 운운하며 여지껏 변변한 노조 하나 없이 낡아빠진 가족복지 관념에 기댈 뿐인 삼성서 나온 책인데 어련할까도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보다는 최 샘이 ‘생물학자’란 데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더군요. 인문적 소양이 출중하시다곤 해도, 앞서의 지적까지 감당하란 건 역시 무리다 싶었던 게지요.
하지만 최 샘께서 이 책을 통해 요청한바,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명제마저 그리 우습게 볼 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싶슴다. 좋든 싫든 ‘이모작 인생’을 대비해야 하는 거라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계의 ‘안’과, 이와는 아주 다를지 모를 이 세계의 ‘밖’을 동시에 바라볼 ‘겹눈’이란 소리로 들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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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길 그럼 왜 하느냐. 그거야 뭐, 제 생각에 지금 무엇보다 절실한 게, ‘학과 존치’를 지렛대 삼아 만들어내야 할 ‘새 부대’와 ‘새 술’에 관한 밑그림인지라서지요.
아무리 새 술이라 한들 낡은 부대에 담아봐야 아예 못 먹지야 않는대도 제 맛 나긴 힘들 거고, 새 부대가 아무리 번듯해도 거기 담아낼 새 술이 없으면 그게 뭔 소용이겠냔 거죠. 새 부대란 문제도 사실 ‘새 술’이 뭐냐에 뒤따라올 사안인 게, 새 술에 대한 고민이 없고서야 그 필요성을 딱히 느낄 일이 있겠나 싶어서요.
그렇다면 ‘먹을거리’라는 전공의 ‘중심토픽’을 시발로 여타 토픽들과 전방위적 접촉면을 갖는 포괄적 비전이 있다면 그건 뭘까요? 저만의 생각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른바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이 아닐까 해요(이는 다시 ‘(생산기반의) 지속가능성’, ‘지역’, ‘발전’이란 토픽으로 나뉠 수 있겠죠).
다시 말해 현 전공은 이 명제를 중장기적으로 실현하는 데 긴요한 지식생산 및 정책의제 개발, 이와 연계해 도출될 구체적 실천프로그램들의 거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겁니다. 적절한 전공명칭 및 전공의 운용형식에 관한 논의(이를테면 어느 단과대 소속이냐 내지 독립학부냐 하는 식의)는 이 다음에 해도 늦을 게 하나 없는 얘기라 보고요.
어찌 보면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 명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건 아까 말씀드린 ‘겹눈’과 관련을 맺습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지금 겹눈이 절실한 분야가 먹거리-농업 분야라고 전 보거든요.
그 이윤 간단합니다. 일단, 일국적/지구적 수준 할 것 없이 작금의 농업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해 그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는 건, 원리적으로 보나 이 원리를 떠받치는 생태적 조건으로 보나,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10년 내외 정도로야 어떻게든 굴러갈지 모릅니다. 기존의 '관성'은 물론 그보다 더 길게 갈 수도 있겠죠.
여하튼 요는 이겁니다. 짧게는 20여 년에서 길게 50년 이후를 내다봤을 때,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적) 먹거리 생산 및 유통체계가 ‘순탄히’ 굴러가리라 보는 건, 그야말로 초국적 농업자본법인 블럭에서나 바라마지 않을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데요.
자본주의적 이윤욕에 지속가능한 살림살이에 대한 욕구가 무참히 짓밟히는 걸 능사이자 ‘역사적 진화의 산물’인 양 당연시하는 지금의 먹거리생산 및 유통경제 시스템은 자체에 고유한 내적 모순과 아울러, 이같은 생산양식의 해악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저항 속에서 극심한 동요에 휩싸일 공산이 아주 높단 거죠. 이같은 상황은 앞으로 두 가지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물음을 관련연구자에게 던질 거라고 보거든요.
하나는 먹거리의 생산 및 유통, 분배를 아우르는 제분야가 과연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대상으로서 존속하기에 적합한 것인가,라는 물음일 겁니다.
먹거리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빈곤의 해결은커녕,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면서도 그 자신 만성적 공급과잉과 생태적 조건의 악화를 초래할 뿐이라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게 온전한 먹거리의 생산 및 유통에 적합하냔 물음이 나오는 건 외려 자연스런 일이겠죠.
지구 곳곳의 고유한 지역적, 문화적 맥락을 거세-초토화하는 가운데 전일적인 생산/유통연쇄의 구축을 매개로 이윤욕 충족에 골몰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제에서 벗어날 대안적 생산-유통 네트워크의 모색이 중요하고도 절박한 과제로 부상하는 건 앞서의 물음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일 겁니다.
그건 작금의 전지구적 농업생산-유통시스템이 그렇듯, 지구 곳곳을 가로지르며 중-소농들의 생산네트웤 및 자치적 생활기반을 허물고 이들의 궁핍화(나아가 이농)을 강제하며 이윤욕 충족에 올인하는 자본주의적 농식품산업 체제, 이같은 체제의 ‘바깥’을 전망하는 구체적 프로그램/정책의제 형태가 돼야 할 거구요.
이는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서의 미래라기보단 지구화의 파고 속에서 힘겹지만 구체적인 현실로서 이미 조금씩 진행중인 것이기도 합니다.
당장 얼마 전인 2006년 5월이죠? 쿠바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볼리비아 세 나라는 지금 대한민국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떠드는 FTA와는 전혀 ‘게임의 룰’이 다른 PTA(Peoples' Trade Agreement)에 조인했다고 해요.
이들이 pta를 통해 추구하는 발전이란, fta가 그렇듯 ‘이윤발생, 그리고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착취를 기본원리로 하는 (따라서 장기적으론 지속불가능한) 유통시스템의 발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같은 시스템 발전을 거부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살림살이의 고양 및 이에 필요한 상호부조를 기본원리로 한 유통-교역시스템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적 시장 기제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며 나아가 그와 ‘맞서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지역 (먹거리)생산 기반의 발전을 북돋우는 시장(들)’네트웤의 발전이랄까요.
하여, 이들 세 나라에선 이같은 무역협정 틀을 (기왕의 자본주의적 시장기제가 철저히 깔아뭉갰던) ‘통상정의’의 구현이라는 기치 아래 중장기적으로 확대해갈 참이라고 합니다(자세한 건 <녹색평론> 9-10월호에 실린 “연대와 상호부조의 무역- 남미의 민중무역협정에 관하여”와 “지역농업을 지키기 위한 직거래 농민장터”를 보시기 바라구요).
전 이네들의 사례가 추구하는 생산/유통의 원리와 이를 떠받치는 근본적 철학이 뭔지, 나아가 이같은 움직임이 지속가능한 지역(문화)발전이란 큰 틀 속에서 어떤 시사점을 갖는지 등을 검토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어떤 명칭을 부여받게 될 진 몰겠지만) ‘농업경제학’ 전공 분야가 앞장서 다뤄야 할 지적 프런티어이자 ‘블루 오션’ 아니냔 생각을 해요.
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오지랖이 비록 지금이야 가히 위압적이랄 만큼 지배적이라곤 하나, 이 PTA 사례를 ‘이모작 인생’을 대비하는 데 있어 ‘겹눈’을 하고서 눈여겨봐 둬야 할, 의미심장한 문화·정치적 징후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대략 25~50년 후, 또는 이 기간에 걸쳐 한층 완연해지리라고들 하는 포스트-자본주의 국면을 대비할 그런 징후로서 말이죠.
그럼 기존에 다루고 배우던 건 다 쓸모가 없다는 거냐?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보지도 않거니와, 별로 바람직하다고 보지도 않아요. 제가 기회있을 때마다 얘기해왔듯, 비판이라는 게 (굳이 밝히자면 칸트적 의미에서;;) 지금 사는 현실의 얼개와 그 지속조건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인 한, 제가 이렇듯 제안하는 전공의 근본적인 혁신을 기존 교과의 전면 배제와 연결짓는 건 곤란하다고 보거든요.
‘주류-표준’ 경제학 이론이 됐건 여타 ‘주류-표준’ 사회/자연과학 이론이 됐건, 그것들 역시 현실을 지속시키는, 달리 말해 비판을 통해 알아야 할 사회적 조건의 일부니까요. 그렇건만 비판이란 이름으로 이걸 아예 내친다? 바보 같은 일일 겁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알게 된 그 이론들(의 쓰임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일 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요거 하난 분명히 전제돼야 한다고 봐요. 뭐냐면, ‘먹거리’란 테마(혹은 농업 및 식량이란 테마)에 대한 기존의 연구경향이나 이론틀, 또는 접근방식에 대한 보다 근본적 성찰이요.
이건 기존에 계셨던 분들이 견지해오신 지적 성향의 내적 쇄신, 혹은 비판적 성찰이란 형태로도 가능하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기존 교수님과는 성향이 크게 다르거나 방법적으로 이질적인 교원들을 과감히 임용함으로써 추동될 수도 있을 거라 봐요. 그런 분들의 존재가 앞서 계신 분들게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럼으로써 동일한 또는 익숙한 주제더라도 좀더 다각적이고 깊이있는 접근이 이뤄진다면, 이런 가운데 전공의 면모도 전반적 쇄신의 실마릴 찾게 되지 않겠냔 겁니다.
뭐, 아무튼 연구테마 및 이를 둘러싼 현실의 추이와 관련하여 이런 포괄적 틀 내지 비전을 대전제로 하여, 교원의 신규임용 및 기존 교원과 신규 교원 간의 역할분담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도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교원임용이 안 된 채 그저 기존 (밑)그림에다 계속 덧칠이나 하고 제목만 바꾸는 식으로 전공의 존속을 도모하는 한, 현 상황의 타개는 요원한 일 아닐까 합니다. 정말로 현 전공의 '명목상 존치'가 다가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죠.
현 상황이야 어디까지나 급한 불부터 일단 끈 것일 뿐, 불씨마저 끈 게 아님은 누가 봐도 분명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