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 달 거 없이, 한마디로 훌륭한 글.
두고두고 곱씹고, 풍부화해야 할 내용들이 그득하다.
근데 지금 나한텐, 결정적으로 체력이 부족하다는 거.
죈장..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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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김강기명 osr1998@hanmail.net / 2008년06월20일 9시44분
사건
5월 2일, 여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우병 쇠고기 반대시위가 시작된 이후로 이전에 지식인들이 쏟아냈던 수많은 미래에 대한 전망(그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전망이 '해석'이 되어버린 이 난감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 할아버지 음성을 꿈결에 들었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빨리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일이다. 전망하고 해석하는 신체에서, 변혁하는 신체로. 그러나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 한 달여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는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주체"론에서부터 네그리의 다중론까지, 혹은 웹 2.0이라는 틀로 분석한 세대론적 고찰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는 전망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언정 변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변혁은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 위에서 다시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 이 사건에 참여하는 너, 나, 우리 모두가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사건이 존재에 우선한다.
물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사건이란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쫓아다니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갑자기 모일 때(5/2), 공연이나 보고 자유발언이나 듣는 "촛불문화제"가 몇 주씩 이어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로 쏟아져 나갔을 때(5/24), 시민들을 보호하는(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던) 경찰이 시민들을 공격할 때(5/25), 물대포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 물대포가 쏟아질 때(5/31), 닭장차에 끌려가야 할 시민들이 스스로 닭장차에 오를 때, 며칠 째 시위대를 가로막은 차벽과 컨테이너 앞에서 장시간의 논쟁을 거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 권력을 조롱할 때(6/10)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벌어질 때마다 국면은 전환되었고, 권력자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시위대의 힘은 커져 갔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6월 10일을 전후하여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촛불은 잦아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분출된 힘을 담아낼 정치적/정책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최장집 같은 이는 속히 정당정치를 복원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한홍구의 말을 따라 "국회에 맡기느니 차라리 천일기도를 하겠다." 사건들은 좀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건들을 창조할 상상력과, 그것을 실천할 강철의 체력이다. 이미 대중은 청와대로의 행진이 막힌 곳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고 전선을 넓히고 있다.
전위
전위란 이런 상상력과 체력의 주체다. 즉 전위는 대중을 결집하여 이끄는 주권적 명령형식이 아니라 대중의 흐름이 몰화되지 않도록 분열을 조장하는 자, 대중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 '여러 방향'을 제시하는 자, 곧 '소수적 흐름'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놀랍게도 이번 시위에서 대중들은 어떤 이들이 전위인지를, 그리고 어떤 이들이 전위가 아닌지를 명확하게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무엇보다 "다함께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24일에 시위대가 청계광장을 벗어나 행진을 벌이기 시작하자 26일, 소위 "운동권"들 중에서 <다함께>가 가장 먼저 개입을 시도했다. <다함께>는 대책위가 사실상 방임하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며 스스로도 행진의 맨 앞에서 구호를 선창하며 진로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의 개입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전체 시위대 일각에선 심지어 이들에 대한 각종 비토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다함께>는 조직된 대오가 앞에서 이끌어야 행진이 질서 있고, 위력이 있을 것이며, 연행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다함께(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된 대오)가 없었던 24일과 25일의 집회 역시 질서 있었으며, 위력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연행'은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다함께>가 행진을 이끌다가 경찰과의 충돌이 우려되는 지점에서 자신들만의 결의로 해산하는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프락치론"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이 지점이 현재 시위대의 연대를 부분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프락치론의 시발점이었다. <다함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이들의 좌파적 성향을 문제 삼고 색깔론 마녀사냥을 벌인 것에 격노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부수적인 일면에 불과하다.(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다함께> 비토 사태의 본질은 이들의 지도에 대한 대중의 거부에 있다. 다만 그 방법이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대중의 <다함께> 경험은 기타의 다른 모든 운동조직의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자유발언대가 열리기만 하면 대책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이들이 운영하는 방송차가 대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이 가장 컸다. 이번 시위에 나타난 대중들의 표현욕구와 그 능력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기존의 조직된 운동권이 가진 조직론과 시위에 관한 관성은 끊임없이 대중과의 불화를 겪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중은 소위 "운동권"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시위가 교착상태에 다다르자 "대학생들은 뭐하는가?", "노동자들은 총파업이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요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지도"를 원한다기보다는 전술한 의미에서의 "전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사건을 만들어줄 전위에 관한 한 대중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에 보내는 "성원"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촛불집회가 이어질수록 운동권과 일반 시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조끼를 벗고 일러스트가 그려진 귀여운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아고라를 중심을 모인 네티즌들이 마치 '운동권'처럼 조직을 구성하고 커다란 깃발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그러면 또 "아고라가 권력화 되었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권위가 사라진 지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운동권과 그 바깥에 있던 시민들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연대는 결코 부드럽고 평화롭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예비군 논쟁이나 비폭력 논쟁 등의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체의 변환을 요구하는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도 변하고, 지식인-운동권도 변한다.
즉, 지금의 촛불집회 국면에서는 그 어떤 정치조직도 대중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가 없다. 대책위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몇몇 정치조직들의 헤게모니 싸움은 대책위 바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위'(아방가르드)다. 전선은 더 넓어지고, 이슈는 더 다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중이 요구하는 '전위'는 바로 그 사건의 주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운동조직들의, 혹은 대중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정치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1조"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것처럼 이번 시위가 "공화주의의 회복" 혹은 "발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할 어떤 "정치적인 것"(공화주의적이고 대의적인)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까?
대중의 공화주의적 요구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의도하거나 결정한 바 없이 진행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한 공포와 훼손당한 자존심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정부나 축산자본이 반복적으로 "촛불집회는 한국의 국내문제"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지속적으로 쇠퇴해 왔다. 이명박의 당선은 정치가 보수화되고 있는 증거라기보다는 정치의 행정화, 혹은 행정권력이 정치권력에 대해 거둔 최종적 승리의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는 세계 경제체제, 세계 주권체제에 포섭되어 있으며 따라서 밖으로는 한 없이 약하고, 안으로는 한 없이 강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대중의 삶에 부과된다.
따라서 대중의 저항은 그것이 일국적 요구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또한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 역시 국가주의라기보다는 대안적인 삶의 조직화에 대한 갈망에 더 가깝다. 내 삶을 내가 직접, 그리고 내 이웃과 더불어 직접 꾸려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위 현장이 이미 수십만 명이 모여도 생수와 김밥이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뮨"이 되어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이 꺼질 것을 염려하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환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의 장소가 정치적인 것 바깥의 삶 그 자체라면,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정치는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며칠 전에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인권침해를 고발하며 전교생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사건이나 시위대가 한강을 넘어 공영방송 수호를 외치며 여의도로 행진한 사건은 촛불이 진화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의 모든 요구가 촛불이 되어야 할 시점이다. 착취가 일어나는 모든 장소에서, 억압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촛불이 켜지는 것이 먼저이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쉽사리 개헌이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변화를 통해 대중의 분출을 봉합/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지속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의 연대를 이뤄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좀 더 우리의 활력을 이어갈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또 운동단위들을 만들고 키워가는 일이다. 제헌의회든, 국민정당의 건설이든, 이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분출한 대중의 에너지의 총체가 아니라 잉여로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항상, "제헌된 권력"보다 "제헌하는 역능"이 우선한다.
촛불은 미래였던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특히 지식인들이 할 일은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감히 68년과 87년을 망각하는 것이다. 더 많은 상상력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사실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결코 아닐 것이다.
훌륭한 시민들 속으로 안내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찾을 일들이 내일 함께하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헉, 참으로 신속한 댓글이라 송구스럽습니다만,,ㅋ '대중'이 된다는 건 이렇듯 사람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거듭나는 과정 아닐까 싶어요. 정치적 지향을 떠나, 이런 과정을 두려움을 앞세워 (개)무시하거나 성가셔할 때, '독재'의 충정과 감수성이 한껏 탄력을 받잖나도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