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43, Oct. 15, 2008
공황, 장기적 시각에서 보기
("The Depression: A Long-Term View")
공황이 시작됐다. 아직도 언론에선 경제학들한테 기껏 지금이 침체 상황인지 여부나 서로 베껴쓰기하듯 캐묻고 있는데, 추호도 귀담아 들을 게 못 된다. 우린 이미 세계 도처에 흐드러질 실업을 동반하는 완연한 지구적 공황의 초입에 서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을 텐데, 명목상의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이로써 초래된 모든 부정적 결과를 평범한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경우다.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이와는 다른 경우를 맞이할 수도 있다. 끝간 줄 모르는 인플레이션이 그것인데, 이 경우 가치잠식이 일어나는 또다른 경로일 뿐이라곤 해도 평범한 사람들한테 끼치는 여파는 훨씬 더 고약하다.
물론 대체 어쩌다 이같은 공황으로 치닫게 됐는지, 어느 누구 할것없이 묻고 있기는 하다. 워렌 버핏이 “대량금융살상무기”라 부르는, 파생금융상품 탓일까? 아니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탓일까? 이도 아니면 석유에 대한 투기세력 탓일까? 이런 식의 접근은 남탓하는 재미만 쏠쏠하다 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페르낭 브로델이 말했다시피, 단기적 사건들이라는 먼지에 휘둘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또렷이 보이는 서로 다른 두 시간대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가 중기적인 순환주기라면,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구조적 추세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적어도 수백 년에 걸쳐, 두 주된 순환주기를 보여왔다. 하나는 이른바 콘트라티예프 주기로, 역사적으로 50~60년 주기를 그렸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는 주기가 훨씬 더 긴데, 헤게모니 주기가 바로 그것이다.
헤게모니 주기부터 이야기해 보자. 미국은 1873년 무렵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둘러싼 쟁투에서 주요후보로 떠올라 1945년 경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했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쇠퇴를 겪는 중이다. 완만하던 쇠퇴의 흐름은, 조지 W. 부시 덕에 급격한 양상을 띠게 됐다. 그리고 이제, 미국이 누렸던 그런 헤게모니 국면이 또다시 도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통상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는 이미 다극체제적인 세계로 들어선 상태다. 미국의 경우 강대국이라 할 만한 부류로서의 위상은 유지하는 가운데, 아마 걔중 가장 강할 수도 있겠지만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여타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인 쇠퇴를 지속해서 겪게 될 것이다. 누가 됐든, 이런 흐름을 바꾸겠노라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콘트라티예프 주기는 앞서 이야기한 헤게모니 주기와는 다른 시간적 추이를 보인다. 1945년 무렵 세계는 이 주기의 B(하강)국면 종반부를 벗어나 A(상승)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이 국면은 근대세계체제의 역사상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 시기였다. 콘트라티예프 주기는 1967/73년 사이에 정점을 친 뒤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B국면은 선행했던 여러 B국면들보다 훨씬 더 긴 것이었고, 우리는 여전히 이 B국면 속에 있다.
콘트라티예프 B국면의 특징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으로, 1970년대 들면서 세계경제가 겪었던 상황에 해당한다. 상품생산 활동의 이윤율, 특히 그간 가장 높았던 여러 생산 부문의 이윤율이 하락한다. 그 귀결로, 매우 높은 이윤율 수준을 유지하고픈 자본가/자본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투기와 연루된 금융 부문에 기댄다. 제반 생산 활동은 이윤율의 과도한 악화를 막고자 세계체제의 중심부에서 여타 지역으로 이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인건비를 발생시켜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것이다. 디트로이트, 에센, 나고야 같은 지역에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중국과 인도, 브라질에서 공장이 계속 늘어난 건 바로 그래서였다.
투기 거품에 관해 말해보자. 상당수 사람들은 그 거품으로 늘상, 크게 돈맛을 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투기 거품은 늘상, 머잖아 터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콘트라티예프 B국면은 왜 이렇게 오래 가는 거냐고? 미국 재무성과 연방준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서유럽 및 일본에 거점을 둔 협력기구들이 세계경제를 떠받치겠노라며 때를 맞춰, 그리고 중요한 고비마다 개입해왔기 때문이다. 1987년 주식시장 대폭락 당시,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사태 때,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때, 1998년 롱텀 캐피탈 부도 사태 때, 2001~2002년 엔론 사태 때 바로 그랬다. 앞서 겪었던 콘트라티예프 B국면들, 그리고 그 국면들이 체제에 가할 법했던 타격에 대한 학습효과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법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다. 지금 우린 이미 그 한계와 마주서 있는 상태다. 헨리 폴슨과 벤 버냉키도 울분, 그리고 짐작컨대 황망함 속에서 곧 깨닫게 되겠지만 말이다. 최악의 상황을 돌려막는다는 게 이번엔 그리 쉽지 않을 텐데, 아마도 불가능하지 싶다.
과거에는 공황으로 모든 게 일단 초토화되고 나면, 세계경제는 상당 기간 준독점 상태에 있는 여러 혁신들을 바탕으로 재활했다. 주식시장이 되살아나리라고들 하는 건 따라서, 과거에 그랬다시피, (공황으로 인한) 모든 손실을 세계 인구 전반에 걸쳐 전가하고 난 다음에야 그들 생각대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얘기다. 몇 년 정도 지나면 그리 하려 들긴 할 것이다.
그러나 한 500년 간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온 이 훌륭했던 주기적 패턴은, 이제 전에 없던 새로운 요인으로 흐트러질 공산이 큰 상황에 놓여 있다. 구조적 추세들이 주기적 패턴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가 특정한 세계체제로서 지닌 구조적 특징들은, 도표화하면 상향하는 균형점에 다다르는 특정한 법칙들로 굴러간다. 문제는, 다른 모든 시스템이 구조적 균형에 이를 때와 마찬가지로, 이 균형점에 일단 이르면 법칙적 패턴을 보였던 곡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균형에서 벗어나 더는 예전의 균형 상태에 이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균형 상태를 한참 벗어나게 되는 건 왜일까? 아주 간략히 말해 지난 500년 동안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축을 이뤘던 기본비용, 즉 임금/인건비와 투자비, 조세가 판매가능한 가격대에 육박할 만큼 꾸준히 오른 결과, 주요한 자본축적 과정에서 늘 그 기초가 됐던 준독점 생산으로 대규모 이윤을 얻기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는 데 실패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향후의 축적 토대를 마침내 스스로 잠식할 정도로 너무나 잘 굴러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자본주의가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체제는 (복잡계 연구에서 쓰는 용어로) ‘분기’를 겪는다. 그 즉각적인 결과로 굉장히 혼돈스런 동요가 발생하는데, 우리가 바로 지금 겪고 있으며 향후 20~50년 동안 겪게 될 상황이기도 하다. 누구 할것없이 각자 판단하기에 지금 당장 최선이라 여기는 방향을 어느 쪽이든 취하는 가운데, 하나의 새로운 질서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경로 중 하나를 취하며 혼돈 상태로부터 생성될 것이다.
확언할 수 있는 건, 현존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예측할 수 없는 건 이 체제를 대신하며 들어서게 될 질서가 어떤 것이겠느냐 하는 점인데, 이는 개개인들이 어떤 압력을 지속적으로 형성해 낼 것이냐에 달려 있어서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는 조만간 자리잡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이지야 않겠지만 (양극화와 위계서열화의 정도 면에서) 훨씬 더 나빠질 수도, 반대로 현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더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면에서) 훨씬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이 중 어떤 체제를 택할 것이냐는 우리 시대, 지구 전반에 걸쳐 이뤄질 정치적 투쟁이 감당해야 할 주요의제(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내다보건대, 어디고 할것없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명백하다. 우린 지금 (소위 세계화는 이제 잊으랍시고) 보호주의 기조를 앞세우려는 세계로 이동중이다. 생산 영역에서 정부의 직접적 역할이 훨씬 더 커지게 될 상황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조차 은행과 거대 사양산업 부문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할 참으로 있다. 중도좌파적인 사민주의 형태가 됐든 극우적인 권위주의 형태가 됐든, 대중추수주의에 입각한 정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이 시행될 참으로도 있다. 그리고, 개별국가별로 전보다 더 쫄아든 파이를 놓고 모두가 경쟁을 벌일, 그런 첨예한 갈등 상황도 목전에 두고 있다.
단기적으로, 그리고 크게 봤을 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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