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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호각, 이시영, 창비시선 230] 그리고 연상

 

책가방에 넣어 다니다 보면, 어느새 책갈피는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책가방이라기 보다는 거의 잡동사니 창고쯤 되는 것이라, 이것저것에 짓눌리다보면 서점에서 처음 샀던 모양을 온전하게 보존한채 책꽃이로 넘어가는 일은 드물게 된다. 특히나 이번 시집처럼 2년에 걸쳐 읽는다면 말이다. 2004년부터 2005년을 걸쳐 읽다보니 뒤죽박죽 앞뒤로 옮겨가며 손떼만 가득하다. 

 

개인적으로는 시집을 어렵게 읽지 않는다. 더 오래 깊히 느끼고 싶은 시가 없지는 않았지만, 날 계속 머물게 하는 시가 아니라면 그냥 훑고 지나가는 편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난 시를 '감상한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라고 한다.

 

각설하고, 이시영의 '은빛 호각'은 참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시인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인물 혹은 이시대의 굵직한 사건 -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 금강산 기행, 이사 그리고 공간의 연상으로 비롯되는 회상 - 이 소재가 되어 이야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제2부는 시의 길이도 몇행되지 않는 짤막한 선문답같은 시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의 산문시의 지리한 고통의 여정을 겪은 독자만이 간결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시를 읽을 자격이 있다는 시인특유의 장난질이 녹아 있는 시집의 구성은 아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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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오늘 아침 또 한식구가 집을 비우고 떠났는데

마당을 깨끗이 쓸어놓고 갔다

대빗자루 자국 선명한 그 위로

오늘은 어떤 햇살도 내리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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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에 한참을 머물렀다. 어쩌면 감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감상에는, 감정의 배설에만 익숙하며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소리높혀 외치는 나의 무색한 일상도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 머리속에 한참동안 잊혀진 1995년과 1996년의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봉천5동이 그려졌다. 가슴 한편이 자꾸 울렁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사진동아리엔 많이 있을 법한데, 정작 찾아보려니 아직 공부방활동을 하고 있을지 모를 후배들의 홈페이지에 있는 두 사진밖에 없다. 몇년 되지 않은 사이 꽤 많은 일이 열리고 닫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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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我/非我 의 구분

예전에는 조금씩 자주 아픈 것 같은데, 요즘은 뜸하게 대박으로 아프다. 견디기 힘들어서 온갖 곳에 기대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고, 비몽사몽간에 내 몸을 'RESET'하면 괜찮을까라는 터무니 없는 상상도 해본다. 휴대폰에 문제가 생기면 자주 컸다 켰듯이, 어제 나의 몸도 혹 그런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무서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아픔의 순간만큼은 진실한 바램이었다. 유기체를 로봇으로 비하하는 건, 유구한 생명체의 진화단계를 무시하는 듯 한 느낌이다.

 

최근에 난 속앓이를 주로 한다. 물론 한번 시작하면 응급실에 달려가고플 정도의 고통이다. 이는 어릴 적 치통이후에 가져보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 지속된다. 주로 위산의 분비때문에 쓰림이 수반되는데, 이 고통의 와중에 번뜩하고 생각나는 게 초기 생명체의 가장 큰 선행과제 - 我/非我 의 구분 - 이다. 이 구분이 불명확해 먹이감을 먹어치운다는 것이 자신의 세포를 잠식해 버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음식물을 분해하기 위해 분비되는 위산 - 배가 아플때마다 그 위산의 Toxic함은 영화 Alien의 침 못지 않다 느낀다. - 은 터무니없게도 위벽을 갉고 있으니 말이다.  고등생명체라고 자부하는 인간의 소화기도 원시단계의 문제의식을 완벽히 해소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만약 정말 똑똑한 생명체라면 위벽이 깍이는 걸 인지해 위산분비를 억제해야 할 것이 아니던가?

 

그나마 다시 정상적인 몸뚱아리를 갖게 된것을 행복해 하며, 이틀에 걸친 비몽사몽의 혼미함을 횡설수설 옮겨본다. 2005년 한해 절대 아프지 마시고 항상 건강과 함께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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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와 소수 그리고 규칙

영화 '반칙왕'을 보면, 험한 세상을 아주 비굴하게 살아가는 회사원과 규칙을 깨뜨려가며 생존을 그리는 한 가면안의 레슬러가 있다. 사실 그 회사원과 레슬러는 생존을 위해서 한편은 암묵적인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혹은 철저하게 파괴하는 묘한 대조가 있다. 그리고 그 가면속의 레슬러는 그 속에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4년 정기국회 회기가 며칠 남지 않은 연말에, 뉴스를 가득 메운 얼굴 중에는 꽤 익숙한 한 정치인도 있었다. 카메라는 연신 그를 비추기 바빴다. 사실 한평생을 국가보안법이라는 굴레속에서 몸서리 친 선배와 동시대의 사람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씁쓸함이 가득 머리를 파고든다. 그리고 또 화가 난다. 의사봉을 손바닥으로 대신하는 모습은 그들이 비판한 지금껏 '날치기'와 하등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규칙이 있는 판에서 뭘 해보겠다는 일군의 사람이 있었고, 이제 그들은 더이상 설득과 대화의 여지는 없다며 그 규칙을 무너뜨렸다.

일상에서 다수와 소수의 대결은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그 대결은 대체로 다수의 표면적 승리로 귀결되기 일수다. 그런 패턴은 몸서리칠정도로 아주 오래되었다. 수영장에서 어린 아이를 내리치는 한 중년의 사내아저씨의 거대한 손바닥은, 그런 폭력에 항상 침묵으로 동조하는 방관자로 이어지고, 또다시 종교적인 이유를 핑계로 구획긋기를 합리화하는 거대권력으로 번지며, 이도 모자라 총부리를 겨눈다. 학교는 '왕따'로 이를 반영하고 회사는 '줄타기'로 대변한다.

현실의 아득한 권력짓기 속에서 누구 하나 예외일 수 없는 다수가 가진 폭력, 대체 어디서부터 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인지? 이 사회의 소수의 권리에 대한 옹호는 정말 가당키나 한 것인가? 자꾸 회의적인 생각만 머리를 짓누른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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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시승기

KTX를 2004년 9월 15일에 처음 탔으닌깐, 좀 되었다.

열심히 시집 뒤켠에 시승에 관한 짧은 노트를 적어뒀는데, 그 시집은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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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야 만족할까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12 Monkeys (1995)'가 떠오른다. 순식간에 비행기로 퍼지는 바이러스의 충격적 비화는 가히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불균형을 가져오는 외래종의 유입은 어제 오늘의 얘기도 아니며, 인류를 포함한 어느 생명체든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 힘든 실정이다. 육중한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는 것과 거대한 함선을 바다에 떠보내는 것, 이것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나 그 만큼 적들이 오가는 대로이기도 한셈이다. 손쉬운 교류가 가져오는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지구환경보고서 2003'도 참고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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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빠르다. 땅에 붙어 있음에도 시속 300Km를 육박하는 고철덩어리는 처음이닌깐.  밤에 타서 밖이 보이진 않아지만, 실내 모니터에서 표시되는 실시간 속도표시는 290을 이미 넘어섰다. 더 빠르고 싶었다. 종착역이 목적지가 아니라면 정신 바짝차려야 할 것 같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다간 /곤난/해질 수 있다. "어라 언제 부산까지 왔댜? 대전에서 내려야 했는데". 술먹고 타지 말지어다.

 

2. 승무원의 유니폼은, '새마을, 무궁화, 통일호, 비둘기'로 이어지는 박정희식 생뚱한 이름을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답답하다.  쥐색이다.

 

3. 자리는 비좁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서울~대전간을 타본 나로서는 그 답답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솔직히 비행기 Economy보다 훨씬 여유롭다는 기분이 들었다.

 

4. 보안요원처럼 보이는 승무원의 눈초리는 KTx 첫 시승의 기분을 망쳐놓기에 충분했는데, 손님 하나하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꼼꼼히 검사(?)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마치 9/11이후로 엄격해진 비행기 탑승보다 어쩌면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비행기는 1)수속입구에서 신분증과 항공권 검사 2)수속시 짐검사 3)비행기 탑승전 항공권 체크 4)기내탑승전 좌석 확인 - 솔직히 이것도 맘에 들진 않지만, 처음 비행기닌깐, 좌석을 안내해주기 위해 항공권을 달라는 줄 알았다 - 이라는 번잡하고 짜증나는 절차가 있더라도 일단 타고 나면 의심하진 않는다. 보안요원의 행동은 차라리 새마을의 좌석확인보다 더 후퇴한 기분이다.

 

5. 선반은 상당한 배려가 느껴졌다. 투명 재질로 된 유리판을 써서 그런지 앉은 좌석에서 위를 쳐다보면 자신의 짐이 안전한지를 금방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6. 화장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움직이는 곳에서 볼 일을 보는 경우를 거의 만들지도 않지만. 객차사이에 두개의 접이식 의사가 있는 점과 여유로운 공간이 좋아 보인다.

 

7. 소음/진동은 견딜만 하다고 느꼈는데 속도가 올라가면서 굉음을 내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치만 밤에 100Km로 서행한다면 아마 기차가 움직이는지/멈췄는지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하다.

 

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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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김영산, 창비시선 234

까치밥

 

간짓대 닿지 않는

홍시 하나 위태로이 달려 꼭지 야위다

실핏줄 쩍쩍 보타지는 가슴 찬서리 맞으며

제 살점 쪼아먹으러 오라고, 어서 오라고

껍질 갈라서 물컹거리는 발간 속살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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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그리운 지난 것 혹은 두려운 올 것로의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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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얘기나 써볼까라고 생각한 2004년 7월 27일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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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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