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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타협하기” 위한 길찾기에 나서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08년 7월호에 실릴 글
“자연과 타협하기” 위한 길찾기에 나서자.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2기 졸업생, 회원)
물론, 이러한 석유 고유가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은 국영기업, 헤지펀드의 책임 문제를 제기한다. 일명 ‘투기설’이다(윌리엄 엥달 등). 여기에 대해 폴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투기설’이 엉터리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일명 ‘수급불균형설’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너지 절약이니, 새로운 생활패턴이니 하면서 금방 대안적인 생활에 대해 얘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괜찮은 ‘재생에너지, 기후변화’에 대한 뉴스 또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문제가 먼 얘기가 아니라,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얘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작년과는 매우 다른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런 ‘고유가’ 시대의 전환적 사고가 실제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 ‘고유가’ 상황 속에서도 국제자본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만들어질 때, ‘녹색’과 ‘적색’의 결합 등을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이에 대해 ‘녹색’과 ‘적색’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위적으로 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 색깔이든, 그렇다고 자기 색만 가지고 말하기도 참 껄끄러운 시절이기도 하다.
내일(7월 7일)부터는 일본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탄소배출을 해온 선진국 G8뿐만 아니라, 새로운 탄소배출‘강국’(?) 중국, 브라질, 인도, 남아공 등도 참가한다. 이 회의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탄소배출 국제기준인 교토의정서는 2012년에 완료될 예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가 진행중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계적으로 유가와 곡물가가 급등하면서 전세계 수억의 생존이 분초를 다투고 있다. 당연히 G8에게 수억의 생존보다도, 자본의 생존이 더 중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필요성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지금에 우리가 참고할만한 책이 있다. 좌파 잡지 Socialist Register 의 편집자 리오 패니치가 엮은 <자연과 타협하기>가 그것이다. “Socialist Register”는 각 해마다 한 주제에 따라 여러 필진들의 글을 모아 발행하는데, 2007년의 주제가 바로 ‘자연’ 및 ‘환경문제’였다.
이 책은 교육원 회원들이 참 읽기 힘든 책일텐데, 무엇보다 번역된 책이라는 점, 많은 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생소한 환경문제에 대한 글이라는 점, 그리고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518쪽)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생태환경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이해하고, 대안사회를 반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반환경파괴사회로 상정하고자 한다면, 이 책만큼 종합적인 현안 분석과 폭넓은 대안을 제시해주는 책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17명이나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필자들이 17개의 주제에 걸쳐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닐 스미스가 쓴 2장 “축적전략으로서의 자연”과 엘마 알트파터가 쓴 3장 “화석자본주의의 사회적, 자연적 배경”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2장에서 닐 스미스는 자연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현재의 국면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맑스가 단순제조업에서 근대산업으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는 자본-임노동관계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주도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분석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와 유사하게 자연도 자본에 형식적 포섭 단계에 있던 단계(예를 들어 식민지 자원 약탈)를 넘어 자연이 곧 자본축적전략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에 대한 금융화(석유펀드, 곡물 펀드, 광석 펀드 등)가 이를 주도하고 있고, 자연에 대한 변형(유전공학 등)과 자연과 관련한 (의제)상품과 시장의 출현(탄소배출권 시장 등)이 그것이다.
3장에서 앨마 알트파터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화석에너지가 결합한 현대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석유정점과 화석에너지의 위기에 따라 유지될 수 없고, 대안은 재생에너지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기술적 처방보다는 새로운 사회시스템, 예를 들어, ‘연대의 경제’ 혹은 ‘도덕적 경제’가 재생에너지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앨마 알트파터의 주장은 얼마 전에 번역 출판되었던 그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실상에 대한 글들도 많이 있다. 5장 바버라 해리스 등이 쓴 글은 “영국의 재생가능에너지 정치”에 대한 글이다. 7장은 “중국의 초고속 발전과 환경위기”에 대한 글인데 필자인 데일 원은 우리나라 <녹색평론>(2007년 7-8월호)에서도 중국과 관련한 생태문제에 대한 글이 소개된 적이 있다. 중국 외에도, 6장 허리케인으로 인한 뉴올리언스 사태를 분석한 글, 8장 아프리카의 생태포퓰리즘과 관련한 글, 16장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이었고, 예전 민주노동당 기관지에서도 글이 소개된 적이 있는 프리더 오토 볼프가 실패한 독일 녹색당 기획의 교훈에 대한 글도 소개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의 결합을 갈망했던, 또는 불가능하다고 봤던 진보신당의 당원들이나 ‘당’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주제별 분석으로는, 9장 세계를 먹여 살리기, 농업, 발전, 생태, 10장 물, 돈, 권력 등이 있다. 수돗물 민영화 등이 당장 현안이 되어 있고, 거의 해체상태에 놓여 있는 농업 문제는 한반도 식량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있는 상태에서 서구와 세계농산물시장 등에 대한 이 장의 분석들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위치짓게 한다.
13장 “더 많이 일하고, 팔고, 소비하기”라는 글에서 코스타스 파나요타키스는 맑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1차모순, 생태맑스주의자인 제임스 오코너가 주장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생산력과 자본주의 생산조건간의 모순인 ‘2차모순’을 넘어 자본주의 소비주의 속에서의 강박적인 경제성장 추구를 ‘자본주의 3차모순’으로 개념화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분석보다는 대안 위주의 글들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필자들이 눈에 띄는데, 미셸 뢰비와 그레고리 앨보가 그런 사람들이다. 15장 “생태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이라는 글은 미셸 뢰비의 글이고, 17장 “생태지역주의의 한계-규모, 전략, 사회주의”는 그레고리 앨보의 글이다.
당연히 이 글들의 필자들은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앨마 알트파터는 3장에서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을 주장했지만, 4장에서 대니얼 벅은 ‘자본주의가 생태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지 않는 한, 자본주의든 그 무엇의 체제든 간에 재앙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각주만 해도 60쪽이 넘는다. 17개의 주제들에 500쪽이 넘는 분량은 접근을 힘들게 한다. 생태주의 문제에 대한 글들을 엮었지만, 자본론과 관련한 언급들, 맑스주의의 주요한 이론가들, 역사가들부터 현실 정치인들까지, 환경과 관련한 제도의 문제에서, 좌파의 역사, 민주주의와 사회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론들과 개념, 분석과 사람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환경생태문제를 이제 곁다리로 한번 언급해 보는 장식품 정도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안사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게라도 독서모임을 조직해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 자본은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그들은 준비하는 것이다. 생태문제는 이미 시장화, 상품화 단계를 거치고 있다. 즉, 우리의 생존을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넘어, 자본의 새로운 축적의 영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둬서는 수십억의 세계 민중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게 이 책이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교훈이다.
지역 사회에서도 이러한 요구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태양의 시대’로 가는 ‘태양혁명’을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화석연료’ 중심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는대로 먹고사는 20세기형 자본-노동타협 경제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생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다음에 고민해야 하는 차선의 문제가 아니다. 작금의 변화는 생태 문제를 이렇게 안일하게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제 생태 문제는 바로 안전하게 ‘먹고 사는’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이다. 따라서 ‘정치’의 문제이고, ‘경제’의 문제이다. 중산층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 길목에 서 있다.
문제는 사람들과 어떤 꿈을 함께 꿀 것인가? 꿈의 상에 대한 것이다. 그 꿈은 단지 생태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일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사회경제적 대안’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상력의 주체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생활 속에 뿌리박고 사는 우리들이어야 할 것이다.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2008년 1․2월호 (2008년 1월 8일)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2년
그리 길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숫자는 ‘역사적 투쟁’의 법칙성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1960년의 4.19 혁명,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이 10-20년 단위의 년도가 그러하다. 작년은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또한, 1996-9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단지 ‘표지’해 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극복 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심리적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숫자가 반복적인 ‘시간적 주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숫자적 의미로만 본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7년의 노동법개악 반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난 지 10, 2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은 뭔가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해봄직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적, 정치적 주체형성과 투쟁의 고양을 의미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그 어떤 주술적 힘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믿는다면, 우리 노동운동은 아직 이러한 발전을 이루어낼 만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풍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조직노동 외 계급적 대표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에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나마 기록된 자기 역사에 대해 그 구성원들과 나누고자 하지 않았다. 기껏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의 몇몇 정리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회원들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해근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339쪽, 13,000원)이다. 이 책은 2001년에 구해근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을 2002년에 신광영 선생이 번역을 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3월에 구입했는데,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2008년 신년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저어했던 이유는 이 책이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사에 대해서 글의 비중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이후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단절적’이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을 ‘계급 형성’이라는 핵심 단어로 묶어 내고 있는 것이다.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은 바로, 책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제목을 차용한 것과 같이 톰슨의 관점, 즉 계급을 역사주의적, 구성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을 “구조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로도 보지 않”고 계급을 “사회적․문화적 형성으로서…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은 (코카의 주장처럼) “항상 형성 또는 소멸의 과정 속에 또는 진화나 퇴화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고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치적, 문화적 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대만이나 서구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을 서술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섭렵하여 담고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적 자료들이나 논문들이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강점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요한 테마로 보고, 이의 계기와 과정, 조건과 이를 돌파하는 계급형성의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흥미롭게 볼 만한 점은 뒷부분에서 많은 외국의 노동분석가들과는 달리 구해근 교수는 한국의 경우 브라질, 남아공과는 다르게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구해근 교수는 그 원인을 첫째, 기업별 노조에 가해진 법적, 정치적 제약, 둘째, 낮은 실업수준과 적은 비공식 부문 규모, 셋째, 노조운동이 공장 특유의 문제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점 등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운동의 폭발성, 전투성과는 상관없이 경제노조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IMF 이후,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이전과 달리 무르익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상상하면서, 과거의 우리 행동의 선택지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 정당운동의 지체와 학출 활동가들의 조급함, 자본과 비교해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들 등,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실패들을 사심없이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더욱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80년대 말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그러나 현재 ‘소멸’ 혹은 ‘퇴화’의 과정에 있을 지도 모른다.
구해근 교수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계급이다. 앞으로 이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계급조직을 갖추고 건설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하는 길”이며, 또다른 길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고립되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갈래 길은 사실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의 순간순간마다 나타날 것이다. 그 갈래를 결국 선택할 주체는 한국 노동계급이며 그 선택 자체가 바로 계급을 고유의 모습으로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는 지금, 노동운동과 당 운동이 몰락과 쇄신의 갈래에 있는 지금, 우리는 지난 노동운동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선택을 위한 지혜와 결단력을 공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태양광 발전소인 Kramer Junction solar power plant
엘마 알트파터,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7
엘마 알트파터
월드 워치(World Watch),『지구환경보고서 2006』
덴마크 미델그룬덴 앞바다 풍력발전
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제2호(2007년 11․12월호) 서평글 (2007.11.6)
노동사회교육원 졸업생 양솔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Jean Zigler) 지음, 갈라파고스, 2007년, 201쪽
우리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정체를 토대로 하는 이전 사회와 다르다고 배워왔다. 참으로 자본주의의 무한한 생산력은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다. 맑스 역시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곧 해방의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운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현재,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인한 시력 상실이 3분에 1명 꼴로, 한 해 700만 명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현재, 지구에는 1분에 250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제3세계에서 태어난다. 그 중 많은 수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를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굶어죽은 아이들과 살찐 소라는 이러한 끔찍한 이분법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살찐 소를 비롯한 육류소비는 주로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영양과잉 상태의 선진국 국민들은 살을 빼기 위해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우리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반박하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참상, 그리고 기아를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고발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Jean Zigler)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이다. 그는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원(사회당)을 지냈으며, 실증적인 사회학자로 현재는 제네바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초국적 식량자본은 과잉생산과 가격덤핑으로 제3세계의 식량 가격과 생산을 교란시킨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은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통해 전세계 식량의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이윤과 기아를 동시에 극대화(?)한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이 생산하는 식량은 그 자체가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대상이기도 하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밥’을 미끼로 번성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격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농산물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계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책임은 초국적 기업과 제국주의, 부패한 정치집단 및 독재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민주주의이다.
장 지글러는 또한, 북한의 기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95년 이후 기아로 인해 북한에서 죽은 인구는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장 지글러는 미국 등의 봉쇄 정책의 야만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아’를 무기로 한 강제노동수용소와 식량원조를 이용한 군사화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살인적인 세계 경제구조는 ‘구조적 기아’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기아’를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기는 ‘멜서스주의자’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아’를 통해 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자연적 법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84년 기준으로 FAO의 평가에 따르면, 84년의 식량생산을 가지고도, 120억 명을 하루 2,400-2,700칼로리를 공급하며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물며 2007년의 생산량으로는 몇 백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장 지글러는 1970년 칠레 인민전선의 첫 번째 행동강령을 언급한다. 15세 이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강령은, 그러나 칠레의 커피와 우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초국적 식품자본 ‘네슬레’는 아옌데 정부의 정상적인 가격하의 분유 구입 요구를 거부한다. 더구나 미국정부와 다국적기업, CIA 역시도 이를 조장한다. 1973년 결국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는 무너지고,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인민전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라는 나라가 있다. 83년 젊은 군인 네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대통령은 토마스 상카라 대위이며, 그의 동지들은 블레이즈 콤파오레, 앙리 총고, 장 밥티스테 링가이 등이다. 부르키나파소는 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인데, 상카라가 집권한 당시, 절대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상카라는 자주관리정책, 인두세 폐지, 개간 가능한 토지 국유화 등을 하면서 4년 만에 자급자족과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게 부르키나파소를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의 프랑스 꼭두각시 정권들은 상카라의 동지였던 블레이즈 콤파오레를 부추겨 상카라와 그의 동지들을 제거한다. 결국 부르키나파소는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만다.
상카라는 저자인 장 지글러와의 만남 속에서 39세까지 살다 간 혁명가 체 게바라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비관했다고 한다. 결국 상카라는 그의 우려처럼 39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의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자원전쟁(석유, 다이아몬드, 곡물 투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전쟁은 다시 기아를 급증시킨다. 또한 아마존 등의 환경파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사헬 지대의 사막화를 확대시키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줄인다. 더군다나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 가세로 인한 에너지 수요 폭증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에너지 위기와 지구 온난화,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와 전세계 경제의 요동, 전지구적 ‘슬럼’의 확대와 ‘기아’의 심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하지만 이러한 ‘기아’의 문제를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기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엎어야 한다.
장 지글러는 인도적 지원이 효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FAO와 WFP가 지원하는 대상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구호단체는 크메르 루주 등 학살정권을 지원한 아픈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혁명적 행동은 인도적 구호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프라 정비를 해야 한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장 지글러는 이윤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기아에 대한 투쟁을 가로막는 행위자로 WB, IMF, WTO를 지목한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며, 장 지글러는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고.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이다”라고.
따라서, “식량권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처럼) 새로운 국제 법규로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유약한 UN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희망은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노동조합 등 전지구적 민간단체에 있으며, 이들의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짧은 분량(201쪽)에다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의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적은 모두 담고 있다. 아울러, 『슬럼, 지구를 뒤덮다』(창비, 마이크 데이비스),『초국적자본, 세계를 삼키다』(창비, 존 매들리),『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제레미 시브룩)을 본 책과 함께 읽으면, 더 깊은 이해와 풍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남 고성 창포리 동진대교 아래의 한 레스토랑에 다녀왔다.
고성이 좋은 이유는 마산창원과 가깝다는 것. 그리고, 통영이나 다른 곳 못지 않게
풍광이 좋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그리고 서울 사람들은 남해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매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부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호수 같은 잔잔함과 거칠지 않은 넉넉함이 있는 바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창의 많은 활동가들도 이 레스토랑(펜션)를
다녀오거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고기 구워먹고,
바다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잠이 깼다.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레스토랑(실은 숙박업)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설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경남 고성은 공룡서식지로 유명한 곳인데
얼마전, 조선특구로 선정되면서 아름다운 남해안에
크고 작은 골리앗크레인이 들어서고 있다.
이제 고성의 잔잔한 바다도 자본의 폭격에 끝장나겠지.
그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통영일까? 남해일까?
경남 고성 동진대교 건너 내산리 or 외산리?
팬션 앞은 바다
날씨는 화창하고, 단풍은 물들고, 바다는 잔잔하다
바다를 보며 깨는 아침
두 개의 봉우리는 섬이 아닌 육지이며,
그 사이에 옅게 비치는 봉우리도 역시 섬이 아닌 육지임.
정말 오래간만에 경상도를 벗어났다.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을 찾았다.
고즈넉하고 화려하지 않은 검소한 폼새가 그만이었다.
백제의 미소라고 하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생각보다 길가와 가까이 있었다. 관람 마감시간을 10분 남기고
갔기에 근처 풍경과 그 맛을 오랫동안 느낄 수는 없었다.
충청도 땅을 밟아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나로서는
충남 예산 등지의 '대공업적' 사과 Line도,
안면도 상인의 못된 바가지도,
충남 아산의 순천향대학교 젊은 학생들의
'서울말씨'도 신선했다.
2007년 8월 20일
노동사회교육원 회보 <연대와 소통> 창간호 원고
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2007년 7월
창원 터널을 빠져나와 남산동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다. 그것도 <통일>이니 <두산>이니 하는 사원기숙사가 아니라, 새로 지어진 상업적인 아파트들이다. 창원 도시가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고 주거공간은 상품이 되었다. 도시는 행복해지는 것일까?
창원을 처음 봤을 때 이 도시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길가에 심어진 푸른 잔디와 2층 빨간 벽돌 양옥집들이 평지에 가지런히 정렬한 모습은 공업도시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미국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들의 마을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군데군데 있는 공원들의 잔디와 분수대, 그리고 ‘평지’는 서울이나 부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계획하는 도시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슬럼”이라는 단어가 ‘창원’ 아니,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한국의 도시들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3년 UN 인간정주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은 슬럼 인구수로는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가 새로운 슬럼을 형성하고 있다. 판잣집이 아니라고 슬럼이 아닌 게 아니다. 홍콩이나 도쿄, 서울과 같은 글로벌 메가도시(Mega City)에도 슬럼은 곳곳에 형성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로 잘 알려진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가 쓴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원제: Planet of Slums)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정육점 직원, 트럭 운전수(그 유명한 팀스터 노조) 등으로 일했으며, 미국 신좌파 학생 조직인 SDS(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맹) 등에서도 활동했다. 영국의 뉴레프트리뷰(신좌파평론) 편집진으로 일하며, 맑스주의적 환경주의, 도시사회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는 학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현장활동가와 연구자의 이력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론과 실천의 접합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대단히 성실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방대한 각주와 자료 목록은 그의 지적 성실함을 반영해 준다.
슬럼(slum)은 간단히 말하면 도시빈민 주택지구를 말한다. 우리로 치면, 달동네, 판자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옛날 서울의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등에 거대하게 형성된 동네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슬럼이 어쨌다는 것일까? 이 책의 부제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이후 슬럼은 세계 도시의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혹은 2008년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획기적인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다. 바로, 전 세계 인구 중 농촌 인구보다 도시 인구가 더 많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20세기는 거대한 농촌인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인도, 중국, 남미, 동남아 등 수많은 ‘남반구’의 농촌은 거대한 대지의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세계 인구를 ‘논’과 ‘밭’에 ‘저장’하고 있었다. 캘리니코스는 데이비스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출현 이후 1950년 전까지 진행된 첫 번째의 도시화의 물결은 북반구(서구)에 주로 해당된 반면, 현재의 2차 ‘도시화’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도시화의 속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남반구를 장악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인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두려워했고, 온갖 장치를 이용해 도시 진입을 봉쇄했다. 그러나 2차 도시화는 탈식민지 시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힘들고 고된 농민들이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도시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준 것일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과잉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힘은…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전 지구적 동력들은 도시화를 지속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농촌에서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는 것이다. 도시화는 곧 산업화라는 등식은 ‘2차 도시화’의 물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이 정착하는 곳은 전 세계 도시의 빈민촌, 즉 ‘슬럼’이다. 슬럼을 부르는 명칭은 나라에 따라, 도시마다 다양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인도 뭄바이의 ‘촐’,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 미얀마 양곤의 ‘뉴필즈’ 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달동네’ 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될까? 빈민들이 도시 내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은 더럽고, 불편하고, 토양과 식수는 오염되어 있고,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그런 곳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빈민 지역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저항의 사령부’가 될 지도 모르는 슬럼은 그들에게 더럽고, 위협적이다. 올림픽이나, 미인대회,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그들은 슬럼을 쓸어버린다. 또는 반란의 씨앗을 없앤다는 이유로, 개발 독점권을 얻기 위한 이유로 쓸어버리기도 한다. 불도저가 밀고나간 그 자리엔 중산층을 위한 주거단지가 세워진다. 한국의 88년 올림픽을 앞둔 철거는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에 2위로 기록되어 있다. 퇴거주민 수는 80만 명에 달했다.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이다.
슬럼은 재난과 동거한다.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빈민과 중산층은 동일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험요소의 노출 정도와 건물의 견고함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지진도 공평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층진(層震)이라는 신조어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슬럼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화재’이다. 특히 개발업자 등이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방화를 ‘뜨거운 철거’라고 부른다.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방식이다. 방화는 개발업자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다.
신자유주의의 대리기구인 IMF와 세계은행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요된 민영화는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교통의 사유화는 교통요금의 폭등을 가져왔고, 빈민들은 그나마 빠듯한 수입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통요금에 부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배변권(排便權) 및 물 공급과 관련한 것이다.
북경의 어느 지역의 경우 화장실 하나를 6,000명 이상이 이용하기도 한다. 콩고의 킨샤사는 하수처리 시설이 전혀 없고, 나이지리아 나이로비에는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나 ‘스커드 미사일’에 의존하는데 이는 배설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인데, 배변을 위해 밤을 기다린 여성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성추행과 강간이다. 도시 배변이라는 ‘사업’을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 기구들은 ‘성장 산업’으로 주목하고 있다. 가나의 유료 공중화장실은 90년대 후반 민영화되었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도시 슬럼에는 그 밖에도 매매혈(賣買血)과 아동 매춘, 아동 강제노동, 장기 판매 등이 비공식적 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깨끗한 물은 가장 저렴한 약이자 가장 중요한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O에 따르면, 2025년에 500만의 제3세계 아이들이 물을 구하지 못해 질병으로 죽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의 운동사회 내에서 ‘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참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속화한 것은 80-90년대 진행된 국가의 후퇴와 공공부문 지출 축소 및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은 명백하다. 농촌은 몰락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며, 이에 따라 여성 및 아동들이 비공식 또는 불안정한 노동에 투입되었고, 보건 서비스는 민영화되면서 이용권을 상실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생긴 엄청난 수의 면직노동자(laid-off)와 호구에는 잡히지 않는 떠돌아다니는 민공조(民工潮)들의 수가 몇 억이다. 중국과 인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휩쓸고 있다. 단기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길은 장기적으로는 계급적 지위를 영속화하는 길이 되었다. 이에 반IMF 폭동 또는 총파업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89년 일어난 폭동, ‘카라카소(Caracazo)’ 동안 최소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에는 거대한 제2세계(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가 자본주의로 편입됨에 따라 빈곤의 규모도 급증했다. UN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러한 국가들에서 극빈층 인구는 1,400만 명에서 1억 6,800만 명으로 높아졌다. 푸틴 정부 하 러시아의 옛 아파트단지는 슬럼 상태가 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할 당시의 상황”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이제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 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 곧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공식 부문에서 ‘활동’ 실업 상태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활동’ 실업이란 불완전고용과 위장 실업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하는 슬럼가에서 생계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서면서, “‘비공식 부문’은 성장하지만 비공식 부문 내에서의 소득은 감소”하고 만다.
도시 슬럼은 이제 펜타곤과 전쟁 연구소 등 세계적인 공안기관들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은 MOUT(도시화 지형에서의 군사작전) 개념을 정립하면서, 신세계질서의 가장 위협적인 곳으로 거대슬럼을 꼽는다. 도시 빈민과의 저강도 세계전쟁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자(서구 도시)는 ‘방어’해야 할 ‘조국’의 도시들이고, 후자(제3세계 슬럼)는 ‘자유’ 세계 전체의 건강과 번영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지원하는 소굴”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이러한 슬럼 분석은 다소 패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배변권조차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감내해야 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도대체 저항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고, 누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지금 준비중인 이 책의 속편에서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연구할 것이라고 한다. 혹 여기에는 88년 상계동과 사당동 투쟁이 다뤄질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자는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물론 도시 빈민과 슬럼의 주민, 비정규노동자 및 실업자 등이 반드시 겹치는 동일한 집단은 아닐 테지만 상당부분 겹치거나, 겹쳐지는 ‘추세’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 주체나 일방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이미 지배자들은(대표적으로 랜드 연구소) 이미 이를 간파하면서 세계 빈곤의 도시화가 ‘반란의 도시화’의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잉여인간’, ‘활동 실업’, ‘퇴축’과 같은 저자의 매력적인 신개념 속에서 저항의 실마리보다는 비참한 파국적 결과가 더 많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20세기는 맑스주의의 예언과는 달리 도시혁명이 아닌, 수많은 농촌의 인민들을 근거로 한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를 가져왔지만(마치 중국혁명기 구추백, 이립삼의 노선처럼), 21세기의 판도는 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계급적 구성도, 지정학적 구성도 달라졌기 때문이며,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시장 안의 진정한 유목민(비공식 경제의 빈곤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트’)이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면 지배층들이 예상하는 데로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비대칭 전투’가 예상 전투 지역인 카불, 라고스, 킨샤사, 마닐라, 북경, 뭄바이, 리우데자네이루, 모스크바, 방콕, 자카르타 등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을 지도!
아직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슬럼이라는 지정학 속에서의 전투상과 전력 분석은 저자의 차기작에 맡겨 두고, 일단, 우리는 우리가 전지구적 지정학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대로 “슬럼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반빈곤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빈곤화라는 직조 속에서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투쟁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으며, 또한 투쟁의 성격이 그야말로 국제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슬럼 관광’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동시에 미래의 국제주의적 투쟁을 예행연습하는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이기웅(버스복수노조(준)) / 2006년09월13일 19시34분
한국노총 전자노련 서울시버스어용노조는 늘 버스노동자들을 기만하여 왔다. 해마다 임단투에서 파업 투쟁을 예고했으나 총파업 투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새벽에 극적 타결이라는 수순으로 파업쇼를 벌여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꺾어 왔다. 올해는 그동안의 밀실교섭과 직권조인, 지연교섭과 파업쇼에 더해 단체교섭권을 포기한 노동위원회 중재쇼까지 벌임으로써, 서울시버스어용노조는 스스로 노동조합임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버스노동자들은 곧 다가올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하여 탄압과 핍박을 무릅쓰고 사측과 어용노조에 맞서 싸우며 버스복수노조준비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수개월의 사전준비를 거쳐 2006년 7월 5일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한국노총 전자노련 서울시버스노동조합 각 지부에 속한 버스노동자들이 어용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민주노조의 길을 가기 위하여 2007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하여 버스복수노조준비위원회를 공식 발족한 것이다.
버스 현장은 어느 타 현장보다 단결이 안 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단결과 단체행동이라는 것은 힘있는 자의 몫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금까지 잘 이용하여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이 아니라 사측의 노무부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잘 알고 있는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이 복수노조시대를 대비하여 이제는 버스현장의 노동조합도 바꿔야 우리 노동자가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복수노조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버스현장에서는 유니온샾 제도를 적용받아 입사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한국노총 조합원이 되어 노조에 가입을 하고, 사측의 눈치에다가 지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얼음판을 걷듯이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이며 열악한 근무환경과 승객과의 마찰, 시간과의 싸움, 나날이 늘어가는 첨단 기기들의 조작과, 교통여건의 악조건 속에서 편안할 날 없는 일상을 보내야 했다.
시민의 손과 발이 되어 편안함과 안전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우리 버스노동자들의 인고의 생활을 저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잘 하면 잘 한 것은 묻혀지고 못하는 만큼은 우리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은 우리 버스노동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당하고 느껴봤을 것이다.
서울 시내를 운행 중인 시내버스 회사는 약 68개 회사가 있는데 이중 단 한 개 회사도 민주노총소속의 민주버스노동조합에 가입된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버스회사가 서울시버스노동조합소속으로써 기업별노조이면서 산별의 성격을 띠고는 있지만 지부도 별도로 조합설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부장에게도 막강한 힘과 권한이 주어져 지부장의 힘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막강하다.
이러한 지부장의 막강한 힘을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막강한 힘을 우리 버스노동자들을 위해서 써달라는 것이다. 그 힘 있는 두 주먹을 노동자 민중을 위해서 힘 있게 뻗을 때 노동자 민중은 진정한 힘으로 믿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버스자본에 대항하여 버스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써야할 노동조합의 단결력을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박해하는데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용 한국노총은 9.11 미국무역센터 희생자 추모식이 진행되는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자본가와 밀실 야합을 자행하였다. 이 9.11야합은 노동기본권을 유린하는 반노동자적 폭거이다. 여기에 어용노총인 한국노총 지도부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가운데 사용자 단체인 경총과 노동자에게 고통만 안겨준 노동부와 합의하였다.
노동기본권을 유린하는 9.11야합으로 노무현정권의 노동탄압적 성격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은 아이엘오(ILO) 총회장을 박차고 나오는 따위의 깜짝쇼를 연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노사정위원회와 노동부 주변을 맴돌면서 노동기본권을 유린하였다. 경총으로 대표되는 자본과 정권은 한국노총의 기회주의를 활용하여 노사관계 선진화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합의를 했지만 결국은 알맹이는 전혀 없는 9.11 밀실야합이 되고 말았다
우리 버스복수노조준비위원회는 노조를 민주화시키고 독선적인 지부운영을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복수노조 시대가 하루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노동계는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손발을 놓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가면 또 유예하면 되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인 복수노조 전면 허용,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가 그대로 시행된다면 그동안 버스복수노조준비위원회를 위해서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버스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가 막막할 따름이다. 이상수 노동부장관은 덧붙여 "현재 부당해고 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되어 있는데 이제는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를 하더라도 아무 형사상의 문제가 없고 해고의 유연성을 확보하는데 획기적인 진전을 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버스 현장에서는 조금만 잘못을 하면 징계위원회에 회부 당하기 일쑤이고 금전적인 불이익과 정신적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탄압이 자행될 것이 뻔한 마당에 이번 유예안은 그동안에 사업하기 좋은 여건과 관리하기 좋은 사람으로 제도적 보안을 한 다음에 복수노조를 허용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 고래 힘줄 같은 어용지도부를 깨부수기 위해 9.11 밀실야합을 자행한 한국노총과 전면적인 투쟁에 나서고자 한다. 허울뿐인 선진적 노사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진보적인 노사관계를 위하여, 그리고 노사관계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돌입하자. 9.11야합의 수괴 이상수 노동부장관 퇴진과 경총해체 그리고 어용 한국노총 해체투쟁으로 나아가자!
버스 노동자의 새벽을 위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 안건모 / 보리 / 2006년 / 8500원, 310쪽
내가 버스운전사 안건모씨를 처음 본 것은 김용만, 김국진이 진행하던 MBC 느낌표 ‘칭찬합시다’ 프로에서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던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 뒤로 언제 다시 안건모씨를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글은 꽤 재미있게 읽었던 거 같다. 불규칙하고 바쁜 생활 때문에 꼼꼼히 챙겨 읽지는 못했지만, 버스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전달해 준다는 느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나는 버스 관련 공부를 하게 되었고 마침 떠오른 것이 안건모씨가 지은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였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인 6월 1일, 나는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지우기 위해 안건모의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다시 붙잡았다.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자, 열차는 벌써 서울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개찰구를 나오고 있는데, 내 옆에 ‘안건모’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을 다녀오는지 가방은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특유의 뿔테 안경에, 개량한복 비슷한 윗옷, 튼튼해 보이는 운동화(등산화)를 신었다. 운동권스러운 실용적인 ‘패션’인 것으로 봐서는 맞는 거 같기도 한데. ‘에이, 설마 이런 우연이 있을라구’ 하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말이나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안건모씨 아니세요?”
“맞는데요. 누구시죠? 어디서 본 듯한”
안건모씨는 부산에서 전날 시청자미디어센터 주최 강연을 마치고 하룻밤 묵고 KTX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마침 나 역시 그 열차를 탄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제1장에는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라는 주제로, 손님들이 시내버스 운전사나, 시내버스 체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여러 가지 일화를 섞어서 소개하고 있다.
버스 운전사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손님들, 졸음운전에 얽힌 사연들(교대제), 시간에 쫓겨 안절부절하는 손님들과 기사, 불친절한 기사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내버스의 사정. 돈 내는 여러 가지 유형의 손님들, 잔돈 거슬러가지 않는 손님들과 공돈버는 회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제2장의 제목은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다. 정말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기사들과 연관되는 우리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버스일터 모임의 고문변호사였던 정연순 변호사, 한화그룹 해고 노동자 명님, 상희, 미정, 할머니와 같이 사는 정희씨 등. 그 중 안건모의 단골손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안건모의 단골들’이 있었기에 그가 MBC 칭찬합시다에 출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단골은 반가운 단골도 있지만, 보기 싫은 단골도 있단다. 술취한 사람, 돈 안 내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한마디 외침은 ‘또라이’다. 하지만 달님이나 현지 같은 안건모 팬클럽도 있는 듯 하다. 회사 차 번호 전체를 외우고 안건모의 차 1774호를 3,40분씩 기다리는 팬들 말이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뒷날 후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건모의 ‘팬관리’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재미있고 더 마음이 따뜻해진다.
3장 삶이란 곧 싸움이다와 4장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는 본격적으로 시내버스의 문제점들에 대해 ‘참여관찰’한 장편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사업주와 어용 노동조합이 매년 차고치는 고스톱 비슷한 임금인상 투쟁과 요금인상, 그리고 파업. 이 신기한 ‘교감’에 대해 안건모와 버스일터는 용감하게 ‘들이’ 댄다. 사고가 나서 ‘자부담’을 요구하는 사측에 맞서, 구상권 청구할 수 없다는 단협 조항을 들이 대거나, 취업규칙을 어겼다는 사측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들이 댄다. 연월차 적치하지 않는 사측에 맞서고, 이렇게 10년의 ‘바위치기’를 통해 버스 현장도 서서히 변화된다. 급기야 버스 현장 최초로(?) 조합장 선거에 ‘민주파’를 출마시켜 선거다운 선거를 해보기도 하고 (물론 낙선했지만) 8억 가까이 되는 상여금을 꿀꺽하려는 사측에 맞서 일인시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측도 만만치 않다. 징계와 해고 위협, 블랙리스트 심지어 테러로 맞선다. 하나씩 떠나가는 동료들(그래봤자 레미콘, 택시, 마을버스, 관광버스 등 ‘발통’ 노동시장이 한정되어 있지만), 힘빠지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들이다.
재미있는 내용으로는 버스 기사들의 “삥땅”이 있다. 워낙에 저임금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버스 사측과 개별 노동자들은 ‘삥땅’이라는 관행을 유지해 왔단다. 임금은 박하게 줄테니 알아서 ‘돈통’에서 빼가라는 것이다. 버스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건모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의 덫이기도 했단다. 항상 삥땅은 해고, 징계의 위협이 되어 돌아왔고, 노동자들은 순종했다. 몇 백원 커피값 벌려는 노동자에게 상여금, 밀린 임금, 퇴직금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건수’이기도 했다. 포기할래? 경찰서갈래?
교통카드 등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삥땅’의 문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전에 CCTV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흩어져 홀로 노동하는 노동과정의 특성상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정말 사측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CCTV는 결국 노동자에게는 배차간격 무시와 난폭운전을 유도한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글들은 한겨레신문과 작은책에 실린 글, 전태일문학상에 출품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무엇보다 쉬운 글들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모두가 한 번씩 경험해 봤고, 모두가 한 번씩은 생각해봤음직한 얘기들을 조리있게 설명한다. 알라딘에 가면 이 책에 대한 서평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부분적으로는 ‘시내버스’가 그처럼 우리 삶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에는 지하철이 있어 버스의 수송분담률이 낮기는 하지만 여전히 버스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운송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과 서비스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밀접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태껏 나는 버스 노동자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말은 하지만, 그저 그런 미조직 노동자로 무의식 속에 방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너도나도 하나씩 자가용을 끌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버스 노동자의 새로운 출발에 금속이나 여타 노동자들이 도와줄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버스 기사의 얼굴을 유심하게 보게 되었다. 내가 운행지를 물을 때도, 거스름돈을 받을 때도, 앞차가 꾸물거릴 때도, 그의 표정을 살피며 책 속의 한구절 한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6월 초, 마창에서는 버스 파업이 있었나보다. 또 7월부터는 마산창원도 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또한 변형근로제의 일종인 Shift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되풀이되는 파업-요금인상과 버스 준공영제, 그리고 일련의 제도변화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단다. 전면 공영제와 공공성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사관계의 무법천지를 바꾸는 길만이 요금과 임금의 인상 경로를 차단시킬 수 있고, 노동자와 승객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안건모의 책을 보다 보면, 누가 버스를 거꾸로 가게 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버스를 제대로 가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날이 올까? 13만이나 되는 버스 노동자들이 7만의 어용 노조를 뒤엎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것인지, 흥분되는 순간이 기대된다.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유예를 노사정 합의한 순간, 한국노총에 항의 농성하러 간 버스 노동자 3인은 아직도 실형을 살고 있다. 집행유예로 나올 것으로 예상한 버스 노동자 동료들은 과연 마련했던 고기와 술을 그날 밤 어떤 기분으로 먹고 마셨을까? 하지만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던가? 이런 고전적인 글귀가 아직도 어울리는 까닭은 버스 현장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호철이 그린 표지그림을 보며, 그림 속의 조는 소님과 손을 흔드는 기사, 장을 보는 차창 밖의 사람들을 보며, 이러한 아름다운 일상이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버스 노동자는 프로다. 프로 기사(노동자)에게 영광 있으라!
로이 디캐러바 Roy Decarava
미국의 사진작가. 흑인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져 할렘의 생활상을 사진에 담았고, 민권운동과 자연풍경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활동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할렘 연작이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헌터대학 등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국적 : 미국
활동분야 : 사진
출생지 : 미국 뉴욕
주요작품 : 삶의 달콤한 끈끈이종이
1919년 뉴욕 할렘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38∼1940년 뉴욕에 있는 쿠퍼유니언미술학교(Cooper Union Art School)에서 회화와 판화를 공부하였고, 1940년대에는 할렘커뮤니티예술센터와 조지워싱턴카버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흑인들의 생활을 담은 미술작품을 만들었다. 1940년대 말부터 표현수단을 사진으로 바꾸었으나, 계속해서 흑인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갖고 할렘의 생활상을 사진에 담았다.
1952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구겐하임 기금을 받았으며, 1955년에는 시인 랭스턴 휴스와 함께 만든 책 《삶의 달콤한 끈끈이종이 The Sweet Flypaper of Life》에 할렘 사진 140점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와 1975년 이래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면서 쿠퍼유니언인스티튜트(Cooper Union Institute)와 헌터대학(Hunter College)에서 가르쳤다.
뉴욕 할렘 지역의 일상생활에서부터 1960년대 초에 벌어진 민권운동 및 서정적인 자연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루이 암스트롱과 존 콜트레인, 빌리 홀리데이, 밀트 잭슨 같은 전설적인 음악가들의 사진도 찍었다.
주요작품으로 할렘 연작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는 흑인 사진작가만이 해석할 수 있는 흑인들의 창조적 표현력과 날카로운 통찰력 및 이해력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주요 전시회로는 ‘Always the Young Strangers’(뉴욕현대미술관, 1953), ‘검은 눈을 통하여 Through Black Eyes’(할렘스튜디오미술관, 1969), ‘The Nation's Capitol in Photographs’(코코란아트갤러리, 1976), ‘최근 사진들 Recent Photographs’(위트킨갤러리, 1990), ‘로이 디캐러바 회고전 Roy DeCarava:A Retrospective’(1996∼19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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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가 있었네요? 종종 올께요^^그런데......제가 누굴까용???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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