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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을 그어버린 아이

거의 4년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20대의 학생운동 조직활동가였던 이 친구는

해군 소위가 되어 다시 눈 앞에 나타났고

군에서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다가

결국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친구가 사라진 후 술자리에서는

그 친구에 대한 품평(...을 가장한 뒷담화)이 이어졌는데

(역시 술자리는 끝까지 남고 봐야 한다-_-)

저 자식은 술만 먹으면 저 얘기만 한다는둥

거기서 성질은 못 내면서 여기와서 이러는 게 이해 안된다는둥

보나마나 군에서는 모범생임이 틀림없을 거라는둥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한-_-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난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말았는데

작년인가 (아마도 연애문제로 인해) 그 녀석이 손목을 긋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의 분위기상

이런 종류의 이야기조차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_-

미친 거 아냐로부터 시작해 아마도 쇼였을 거라는 얘기까지

즐거운 뒷담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살면서 죽고싶단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만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렇게이렇게 죽어야지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나도 진심으로 손목을 그어보고 싶단 생각을

이제까지 단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오른쪽 손목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어버려야겠다는 (지금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그 필요성은 생각만으로 그쳤지만

죽음이라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온갖 관념적인 죽음의 이미지들,

편안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뭔가 구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들은

벌어진 손목의 틈 사이로 배어나오는 검붉은 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날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뭔가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_-

여튼 손목을 그어버린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로 한 판의 장렬한 쇼였는지 지금와서 알 수 없지만

피투성이가 된 손목을 바라보게된 절실함만은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자해라는 방법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타인에게 가하는 아이러니한 폭력.

그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오랜만의 허클베리핀이어요. :)
♪ 허클베리핀 - 갈가마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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