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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품

솔직하게 얘기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재미가 없다.

 

회사에서 난 하나의 톱니바퀴로 기능한다.

내가 속한 파트는 "듀얼마스터시스템"이라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파트의 업무를 크게 네 분야로 나누고 각 분야의 메인 담당자를 정한다. 그리고 각 담당자는 다른 분야의 메인이나 다름없는 서브 담당자가 되어 메인 담당자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을 경우 백업의 역할을 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하게 주담당자와 부담당자로 구분된 포디즘적인 분업체계보다 안정적이다. 부품 하나가 나가떨어지더라도 새로운 인원이 들어올 때까지 운영에 지장을 크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톱니바퀴의 입장에서 보면 알아야 할 업무의 범위가 두 배(실제로는 그 이하이지만)로 늘어나는 셈이고, 실제로 결원이 발생할 경우 업무량이 엄청나게 폭주하기 때문에 결코 호감을 느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최근에 파트의 인원이 3명으로 줄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이 결과로 세 분야의 업무를 메인으로 처리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해버리는 식이다.

 

그렇지만 1인 1업무의 분업시스템은 질색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듯이 나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고, 어떤 업무를 주로 담당하던지간에 일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나의 주요한 스킬은 아무래도 프로그래밍이고 이 분야에서 가장 큰 효율을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디자이너가 없다고 해서 페이지를 만들지 못하거나 기획자가 휴가갔다고 해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 개발하지 못하는 상황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기능추가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하더라도, 왜 이 기능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이 기능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그리고 이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얻게 되는지 알고 싶고 또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의미 따위는 제껴놓고 당위에 의해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는 효율성을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본다면, 프로그래밍에 더하여 UI 작업도 하고 있으며 기능에 대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덧붙이고 있다. 동시에 이 기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역시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거의 혼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는 이런 경험이 매우 흔하다. 개발 도중에 혼자 고민할 성질이 아닌 문제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기획자나 디자이너에게 물어봐도 "기술적인 것은 잘 몰라서..."라는 대답을 듣는다. 서로의 업무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도 특별히 뭔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서 대단한 뭔가를 완성하는 것보다, 같이 고민하며 발전시키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천재적인 누군가에 의해 혼자서 만들어낸 것에 비해 여럿이서 만들어낸 결과의 질이 더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난 후자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더 보람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같이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경험을 서로 많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의 일이 재미없는 이유는, 클래스부터 UI까지 손을 대고 있으며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를 거의 혼자서 생각하고 있음에도, 이 기능의 의미를 고민하고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경우에 역시 해법은 효율성을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치는 것.
소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소모품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덧붙여 요즘 새삼스레 깨달은 점 두 가지.

난 정말 일시켜먹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회사에서 잘 부려먹는 것을 보면 역시 자본주의는 대단하다는 생각.

그리고 난 아마도 대학시절에 한총련 운동을 했어도 잘 적응했을 것 같다는 생각.

 

 


♪ "Bandits" OST - Pupp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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