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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2006)

주의 : 스포일러입니다-_-

 

가면 쓴 기괴한 남자의 뒷모습이 인쇄된 포스터도 인상적이지만, <브이 포 벤데타>는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각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뭔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개봉일이 회사 프로젝트 기간과 완벽하게 겹치는 바람에 비록 극장 관람은 놓쳤지만, DVD 예약 주문까지 해가며 <브이 포 벤데타>를 보려 했던 것은 이런 막연한 기대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매트릭스>는 화려한 와이어 액션과 플로-모Flow-Mo 같은 첨단 촬영기법으로 주목받았지만, 오히려 나는 <매트릭스>가 철학적, 정치적인 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자는 정치세력/군대 같이 눈에 보이는 힘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억압적 국가장치), 제도/교육 같은 시스템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이데올리기적 국가장치), 아예 의식 저 편에 존재하여 매트릭스 안의 세계 자체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발상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워쇼스키 형제가 각색하고 <매트릭스>의 조감독이었던 제임스 맥티그가 감독한 <브이 포 벤데타>에 쏠린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는 2040년, 그러나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사회와 비슷하다. 전체주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조작된 언론과 비밀경찰, 집단 수용소에 의해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 영화는 17세기의 화약음모사건으로 시작한다.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는 가이 포크스와 여러모로 동일시되는데, 그는 형사재판소 폭파를 시작으로 하여 의사당 폭파를 마지막으로 혁명을 완수한다. 그 와중에 V는 체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암살하고 방송국을 통해 메시지를 뿌리고 대중들을 선동하는 등 "나홀로 혁명"을 진행하는데, 참으로 고맙게도 대중들은 V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이해하여 V의 마지막 불꽃놀이를 같이 구경함으로써 혁명에 동참한다-_-;;;

 

<매트릭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인 스미스 요원이 연기한 V는 공적으로는 정치적 테러리스트, 사적으로는 복수에 불타는 로맨티스트로 그려진다. 휴고 위빙은 매력적인 혁명가의 캐릭터를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잘 연기해 냈다. 그러나 이에 비해 V의 파트너가 되는 이비(나탈리 포트만)의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이비는 V가 만든 지하 감옥에서 깨달음-_-을 얻고 사회의 모순에 맞설 용기를 얻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혁명의 한 축을 맡기보다 V의 내면적인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기차의 레버를 당기는 일 외에 이비가 혁명에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V의 혁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V 혼자만의 북치고 장구치고였던 것이다.

영화의 원작인 앨런 무어와 데이빗 로이드의 만화는 반대처리즘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 한다. 그 시대의 영국에서 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노동자의 파업을 주먹으로 때려잡던 대처리즘과 영화 속의 촌스러운 전체주의는 왠지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군사정권 아래의 한국이었으면 그런 분위기가 와 닿았겠지만, 매트릭스의 세련된 통제 시스템을 보다가 이 영화의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시스템을 보니 별로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신비로운 카리스마에 귀족적 분위기, 뛰어난 계략과 단칼에 적을 그어버리는 냉철함, 게다가 검술 실력-_-까지, 가슴에 S마크가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완벽한 혁명 지도자 V는 "역시 DC 코믹스!"라는 찬사를 충분히 받을만 하다.

물론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재치와 갖가지 메타포들은 영화를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끌어준다. 하지만 원작의 원죄인지, 아니면 워쇼스키 형제의 영웅적인 혁명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브이 포 벤데타>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차라리 V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V가 철저하게 개인의 복수를 달성하려는 인물이었다면 좀 더 괜찮은 영화가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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