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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黑と茶の幻想)

개인적으로 난 온다 리쿠(恩田 陸)의 팬이다. 아마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온다 리쿠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 사람 소설은 색다른 뭔가가 있다고 느껴진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특징 짓는 단어는 "미스테리"와 "초감각"이다. 온다 리쿠의 모든 작품이 미스테리물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량이 가장 빛나는 장르가 바로 미스테리물임은 분명하다. 미스테리물에서 그녀의 스토리텔링 기술은 매우 뛰어나다. 정체모를 무언가에 대한 긴장감, 적절히 배치한 복선 등 최소한 클라이막스까지 숨쉴 틈을 주지 않는 그녀의 기술은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점점 가속되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녀의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의 미스테리는 결말을 잘 짓지 못한다. 터질 듯 팽팽하게 부푼 긴장감을 한 방에 터뜨리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결말은 생뚱맞게 보일 때가 많다.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처럼, 지나친 결말이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는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이 소설은 반전에서 반전을 거듭한 결말을 제시하는데, 최후의 반전만 없었으면 최소한 수작으로 남을 수 있었을텐데, 너무 지나친 마지막 반전이 결국 이 소설을 범작으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개인적인 평가지만)

이런 의미에서 <흑과 다의 환상>은 긴장감과 결말이 절묘하게 균형잡힌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상/하권으로 나뉘어 제법 무시못할 분량을 자랑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한 순간이라도 지루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네 명의 동창들이 Y섬의 태고적 삼림으로 전설의 벚나무를 보기 위해 투어를 떠나는데, 한 명씩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 사이의 숨겨진 관계들이 드러난다는 꽤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시점이 바뀔 때마다 이들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고, 그 비밀들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또다른 동창을 매개로 하나로 연결된다.

<흑과 다의 환상>은 장이 바뀔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보이지 않는 공포에 심장이 조여드는 류의 미스테리는 아니다. 오히려 <밤의 피크닉> 같이 여러 사람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가 중심이라 잔잔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서로가 숨겨왔던 비밀이 하나씩 공개되는 과정과 이들의 숨겨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결코 무시못할 긴장감을 가져다 준다. 이 작품은 확실히 다른 미스테리물과는 차별되는 매우 고급스러운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하 <삼월>)이라는 온다 리쿠의 전작에 나오는 액자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정이 약간 바뀌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삼월>에서 먼저 예고편이 나온 후 발간된 본편 같은 느낌이다. 온다 리쿠는 자신의 작품과 등장 인물들로 이런 장난을 곧잘 친다. <흑과 다의 환상>의 중요한 인물인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창 카지와라 유리도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 등장한 인물이다.

에구 초감각까지 더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온다 리쿠의 초감각 이야기는 다른 작품 소개 때 써야겠다. 여튼 이 작품, 강추다(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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